평화로운 오후에 메일이 하나 온다.


정기산악회 초대장.


물론 말이 초대장이지 의사결정권따윈 없다.




모 부장이 사무실에 들이닥친다. 산악회를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다.


각 부서별로 참가자 명단 제출하란다...


아 저는 무슨 일이 있는데요, 저는 뭐시기 일이 있는데요.


표정이 썩는다. 그리고 한마디 한다.



'가급적이면 다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너 그거 다음에 해도 되잖아? 그거 안가도 되잖아? 산에 와 산에'


다음에...? 가족모임, 부모님 생신, 여자친구와의 기념일 등등을 다음에 할 수 있나..?




'여자친구와 2주년이라 못 갑니다.'


용기를 내서 말했다. 내 여자친구한테 사정 설명하면 이해는 해 줄거다. 하지만 그러기가 싫다.


서운하지만 티 안내려는 여자친구에게 너무 미안해서다.



그리고 나를 더 서글프게 하는건 돌아오는 대답이다.


'그까짓거 때문에 안가는거냐? 남들도 다 오는데'



그까짓거.....그까짓거....


말 참 쉽게한다. 너한텐 그까짓거지만 나에겐 아니다. 막말로, 결혼 전제로 만나고 있는데


이거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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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2주간을 시달리다가 끝내는 산악회에 끌려간다.


아직 쌀쌀한 오전 8시. 산악회장이 나를 부른다. 버스에 먹을것 좀 싣잔다.



산악회장....말이 좋아 회장이지 사실 나랑 나이차이도 한두살 밖에 안 난다.


그리고 결정권은 없다. 어디로 갈지, 장을 보러 가면 뭘 살지, 코스는 어떻게 할지 등등


아무것도 결정권이 없다.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고 비호감이지만 오래 붙어있어서 직급이 좀 되고 (지 돈 안쓰고)노는거 좋아하는


차부장급 두 명이 모든걸 결정한다.




무거운 술과 물 따위를 낑낑대며 옮기는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저 사람이 안쓰러워서 기꺼이 도와준다.


여직원 서넛은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다.


'시ㅡ발ㅡ년들아 구경났냐'라고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모가지다.




금요일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일어나서 온 터라 몹시 노곤노곤하다.


차를 타니까 졸음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런게 있을리가



낑낑대며 잔뜩 실은 술이 빛을 발한다. 소주와 맥주를 부지런히 돌린다.


사람들은 익숙한듯 버스의 커튼을 치고 음악 테이프를 넣고 마이크를 셋팅한다.




빈속에 소주 맥주 쳐먹고 옆에서 쿵쾅거리니 정신이 있을 리가.


제발 빨리 도착만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는 길은 빌어쳐먹게 멀다. 가까운곳 쳐 가지....


알고보니 문제의 그 배후세력은 항상 먼 곳으로 장소를 정한다더라.


그래야 차에서 먹고 마시고 논다고.




애꿎은 시계만 수없이 보던 나를 누군가가 불러낸다.


'사원이 돼서 눈치없게 그러고 있냐. 한 곡 뽑아봐라'




죽여버리고 싶다. 눈치? 누운치이? 들고있던 소주병으로 머가리를 박살내고 싶은 충동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컨디션 안좋습니다. 안합니다.'



두번 세번 불러내지만 끝내 거절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걸 교통사고 나는 것 보다 싫어하는 저 인간은 능숙하게 마이크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시ㅡ발시ㅡ발 거리며 한숨 돌렸다고 생각하는 찰나 어딘가에서 나지막하게 말소리가 들린다.



'저놈도 참 쯧쯧쯧'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신기할정도로 똑똑히 들었다.


내가 실수한걸까? 아마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다.


미래를 선도하는 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조직에서 이런 쌍팔년도 잔재가 남아있다는게 새삼 놀랍지도 않다.




우여곡절 끝에 등산로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맑은 공기 마시면서 산길을 걷다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리라.


서둘러 출발하려던 나를 누군가가 불러 세운다.


앞서 서술한 노답 차부장급 두 명중 한명이다.


등산로가 제법 길어서 음료를 좀 챙겨가야 한단다.


그래 당연한 얘기지...목마르면 답도 없지...하고 음료를 받아서 가방에 넣는다.


음료는 개뿔 소주랑 맥주다.



'차장님. 물 없습니까? 이거 술입니다'



씩 웃으면서 얼른 갖고 올라가란다. 정상에 도착해서 시원하게 한 잔 하면 기력보충도 되고 기분도 상쾌하단다.


미친소리다.


산은 오르는 것 보다 내려오는게 더 힘들다는건 씹돼지 파오후새끼들도 잘 알고있다.


정상에서 술을 쳐먹고 하산한다........?


가볍게 한 잔 할 분량은 절대 아니다. 이미 나처럼 술셔틀이 된 직원이 여럿 보인다.


전부 사원 병아리새/끼들이다.



여직원들은 아직도 수다꽃이 만발해있다.


역시 가벼운 차림이다. 가방따위는 매지 않았다.


남자 사원들에게 왜 큰 가방을 매고 오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래야 술을 많이 넣을 수 있으니까..... 반면 여직원은 가방이 필요없다.



여직원들은 점심을 작은 종이가방에 넣어서 가져왔다.


뒤에서 소리가 들린다.


'어이 xxx, 저거 좀 들어줘라. 여직원들 무겁잖아'




뿅뿅/같은새끼야. 내 등짝에 얹어진 소주병은 가볍고 샌드위치 들어있는 종이가방은 무게가 천근 만근이더냐.


여직원들은 웃으면서 종이가방을 내민다.


여지껏 남녀차별, 여성혐오 이런 것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순간부터 생각을 바꿔먹게 될 것 같다.




제발 저인간들이랑 떨어지고 싶었다. 앞장서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운동을 제법 했던 터라 체력은 자신있다. 집중해서 산만 타면 이정도쯤은 금방 오른다.


뒤에서 몇번인가 천천히 같이 가자고 소리를 쳤지만 나는 안들리는척 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이쯤이면 됐겠지...하며 잠시 쉬어가려고 바위에 걸터 앉았다.


이런 세상에


여자친구 때문에 못간다니까 '그까짓 것'이라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내 기분을 삽시간에 박살내버린 사람이 바로 뒤이어 올라오네??



이인간은 회사에서 무능하기로 소문이 시발 심하게 크게 난 사람이다.


대체 평소에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닌다.


근데 본인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자약이다. 지금 와서 보니 멍청하고 눈치없기가 대박이라 아예 모르는 듯 했다.


그런데 꼴에 운동을 좋아해서 산을 더럽게 잘 탄단다.


나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다.



'이야~니 산 잘타네? 나만큼 타는 사람 잘 없는데'


'.......'



그리고 본의 아니게 같이 산을 오르게 됐다. 젊은놈이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산 꾸준히 탄 아재를 이기기는 버거웠다.


내가 오로지 내 힘으로 산을 탄다면, 저인간은 요령이 있는 듯 했다. 연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천천히 오르며 간격을 벌리면 저인간은 씨ㅡ발 눈치없이 나를 기다려준다.


그리고 쉴새없이 말을 건다.


하나같이 뿅뿅도 영양가 없고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얘기들이다.


내가 지 자식새/끼 좋아하는 음식 얘기를 왜 듣고 있어야 하는가.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우리 애비가 저런 인간이었으면 진작에 연 끊었다.'


진심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인간이다. 어떠한 유형의 인간인지는 다들 어렴풋이 짐작가는 바가 있으리라.





드디어 정상에 도달했다.


나머지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려 점심을 먹는다.


술먹고 산타는게 개/병ㅡ신짓이란걸 잘 알고 있지만 솔직히 맛은 있더라.


시발 뭔들 맛이 없겠냐만은.....




내려가는 것은 별 거 없었다.


빈 병, 빈 캔들이라 가방 무게도 제법 줄었던 터라서 더더욱 그렇다.




아마 이런 산악회와서 '그나마' 건질 게 있다면


조금 이른 시간에 먹는 저녁이다. 등산 후 시원한 동동주에 먹는 파전....그리고 각종 음식들.....


사실상 이를 위해 여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악회 지원금은 충분하다. 결재 올라가는걸 매번 보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모여있는 회비도 제법 된다는 산악회장의 언질도 있었다.



'그래 시발 기왕에 와서 어쨌든 거의 다 하긴 했네. 이거 먹고 그냥 잊어버리자'



그리고 이 생각은 정확히 5분만에 산산조각났다.




한테이블 네 명에 파전 한 판, 동동주 한 병.


이게 끝이었다.




'어이 다들 모자라면 얼마든지 더 시켜먹어 알았지'



다들 대답은 예예 하지만 주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장의 눈치만 보고 있다.


뒤이어 부장의 훈화가 시작되었다.



이런 자리는 가급적 모두 참석하라. 그래도 오늘 오니 좋지 않더냐. 이렇게 마치고 한 잔 하면서 친목을 다지는거다. 등등



코웃음과 함께 나지막히 씨ㅡ발..ㅋㅋ 하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내 옆에 앉은 대리가 나를 쿡 찌른다. 다행히 내가 앉은 테이블은 병아리새끼들만 있는 테이블이라 문제될건 없었다.




보다 못한 산악회장이 운을 뗀다.


'부장님, 우리 좀 더먹지요'


선선히 그러라고 한다. 나는 메뉴판에서 가장 비싼 음식을 골랐다.


닭볶음탕.




그리고 10초만에 제동이 걸렸다.


'배 안부르나? 뭐 그리 비싼거 먹나. 우리는 파전만 하나 추가했구만.'




너무 뿅뿅같았다.


ㅡ씨/발새끼야 이거 내가 사비로 살게 시발 됐냐? 됐냐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세상에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결재 올라가는 지원금만 60만원이다. 모인 돈도 내가 알기로 백단위다.


지금까지 먹은거 다 계산해도 절대 10만원이 안 넘는다. 근데 시발 뭐라고오????????




글쎄....나중에 경조사 일 도우면서 느낀거지만.


원래 이렇다.


자기 돈도 아닌데, 안아껴야 될 것을 아낀다.


그리고 지원금? 회비?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짐작은 간다. 꿀꺽 했겠지 뭐....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그렇게 파전만 하나씩 추가한 채 자리가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서글퍼졌다.


내 미래, 비전....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없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뿅뿅소기업 평균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참고로 업력 제법 된 상장사다. 그런데 이 모양이다.


노오오오오오오력이 부족했다고 하지 말아달라.


노력으로 될 문제는 아닌 듯 싶었다.




정말 오기 싫은 산악회였지만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첫째,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


둘째, 누가 병/신이고 누가 아닌지 피아식별이 됐다는 것.




그 이후 나는 회사의 행사 일체에 불참하였고

 

고의적으로밖에 볼수없는 연말 대리 승진 누락 후 바로 퇴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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