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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5.18'의 아픔이 지금의 '신천지'를 만들었다.>

광주는 오래도록 아픔과 소외감, '차별'의 서러움을 겪어왔다. 특히 1980년대의 그것은 차라리 뼈 속에 사무치는 추위였다. 사회학적으로 가난하고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일수록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사람들에게는 메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을 채워줄 것이 필요하다.

1980년 9월 14일, 이만희가 '신천지' 설립을 시작했다. 정식 설립은 1984년 3월 14일이지만, 실질적인 시작은 그로부터 3년 6개월 이전으로, 이만희는 1987년 9월 14일까지의 7년을 반반으로 나누어 '인치는 역사'와 '14만 4천을 모으는 역사'로 구분했다. 따라서 '신천지'는 1980년에 시작되었고 1984년에 선포되었다. 그러나 분명히 하건데, 신천지는 1987년 시점에도 별볼일 없는 소수 종파에 지나지 않았다. 1987년 종말론이 불발되자 많은 이들이 신천지를 떠났다.

그러나 그 시점에 신천지 조직의 성장을 완전히 책임지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지재섭, 일흔을 넘긴 2020년 현재까지 신천지 베드로 (광주전남) 지파장이다. 그는 결혼 직후 장모를 통해 신천지에 들어왔고, 광주에 내려와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평소 알고지내던 '학생운동가'들을 조직에 끌어들였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많은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운동권' 대오에서 이탈했다. 지재섭은 그중 일부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베드로 지파 구성원들에게 "장년부는 죄다 '운동권' 출신"이라는 말은 상식이다. (장년부는 35세 이상 남성 부서다)

신천지 호남지부에 해당하는 베드로지파는 1987년 광주 동구 산수동에 위치한 작은 골방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다른 지파가 주로 장년층이었던 데에 비해, 베드로지파는 대부분 청년, 대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두고, 다른 지파로부터 속된 말로 "애기들 데리고 뭘하냐"고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평범한 청년이면서 동시에 학생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전직 대중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신도를 모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전도했다. 이 과정에서 마치 학내서클처럼 새롭게 포섭된 이들을 대상으로 '주기적인 학습'을 실시했다. 이들은 마치 '주사파'들처럼, 이만희가 교주라는 사실을 6개월간 알려주지 않고 '바보 과대표'로 행동한다. 이들이 '품성'을 갖추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렇듯, 대중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던 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베드로 지파는 전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급성장했다. 후발 주자에 불과했던 지파가 본부 신도수를 추월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전도수법'을 개발하여 전국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이들은 신천지 세력을 주도하게 되었다. 지재섭 지파장은 1987년 이래 34년째 현직을 유지하고 있다. 다른 지역들을 관할하는 11개 지파의 수장들은 평균 2년 주기로 교체되고 있다. 그의 권력의 막강함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만희 교주는 요한계시록 6장 '밀 한되 보리 석되' 비유를 인용하며 지재섭이 '보리 석되' 쯤은 된다며 조직내 2인자임을 공인했다. 이만희가 옥좌에서 권세를 누릴 때, 지재섭은 마치 사마의라도 된 것 마냥, 그 의자 앞에서 군림했다.

광주 세력은 문화적으로도 신천지를 주도하며, 집회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조국통일 평화마라톤'을 개최하기도 한다. 신천지 만국회의 때는 '통일 관련 카드섹션'을 펼치기도 하는데, 이것들을 보며, 주체사상의 영향력이 아주 이색적인 곳에서 펼쳐지는 것을 실감한다.

현 신천지 신도 20만명 중 5만명이 호남 소속이다. 본래 베드로 지파는 호남 전체를 관할했다. 그러나 너무 세력이 강성해지자, 지재섭 지파장이 직접 전북을 '도마지파'로 독립시켰고, 전북에 가서 손수 조직을 꾸리는 것을 도왔다. 베드로지파 3만 5천명, 도마지파 1만 2천명을 더해 호남의 신천지 구성원은 약 5만명으로, 전체 신천지 구성원의 25%를 차지한다.

이들이 이토록 극성으로 '전도'에 골몰했던 데에는 5월 광주가 남긴 아픔과 소외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주도세력과 신입들이 공유했던 공통의 경험은 '5.18'이었다. 그 아픔으로 인해 형성된 공허감과 방향감각의 상실이 사람들을 혹세무민의 종교로 끌어들였다. 물론 변혁을 꿈꾸며 사회운동에 뛰어든 사람들도 있었고 '한총련'과 같은 조직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신천지를 향하거나, 6월 항쟁 - 연대사태 등으로 다시금 방향성을 상실하고 신천지로 옮겨오는 경우도 많았다. (신천지는 NL세력에게 조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현존하는 NL들이 신천지를 극혐하는 것은 물론이고, 애시당초 이탈하고 합류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에게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내 이야기를 듣더니, 그는 "광주의 오월로 인해 가슴에 뚫린 구멍을 메울 수 없었던 사람들이 NL과 신천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고 담담하게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