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삼국시대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지방 유지들 즉 호족들이 굉장히 많았음.

호족들이 군대를 양성해서 세력을 키우면 군벌이고

그 군벌에서 시작한 군주들이 굉장히 많던 시대가 삼국시대임.


호족들을 싫어한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유비 조조 손권이 이 호족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먼저 아는게 중요함.


조조의 경우 힘으로 찍어눌렀음.
당시 2/3을 지배했던 조조 답게 그냥 다 힘으로 찍어버림. 필요하면 서주대학살 아니 서주대효도를 저지를정도로 피를 부르던 조조였기에 지방 호족들은 조조에게 개기질 못했음.

이 방법은 가장 쉬운 방법이긴 했지만 조조가 힘이 없으면 그 즉시 거꾸로 한순간에 말려버릴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음.
실제로 관우의 북진+위황의 난때 호족들이 동요하자 조조 본인이 천도를 고민하기까지 했다고 쓰여있음.


그리고 유비의 경우 황실 핏줄을 이용한 혼약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음.
의외로 조조는 프리한 연애를 한 사람이였음. 좋게 말하면 저렇다는 거고 대놓고 말하면 쥬지를 꼴리는대로 굴리고 다닌 사람이였음. 조비의 모친인 변부인은 당시 가기(가수)출신이였고, 추씨 때문에 장수한테 몰렸었고, 관우와도 두씨를 두고 싸우기도 하는 등 프리한 연애를 하던 사람이였음.

그에 비해 유비는 철저히 자신의 핏줄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였음.

서주에 입성했을때 서주의 호족인 미씨와 혼약을 맺었었고
형주를 지배할때 손권의 동생과 혼약을 맺었었고
서촉에 이르렀을때 촉의 호족인 오씨와 혼약을 맺었음.

힘으로 다스림과 동시에 호족들과 혼약을 맺는 철저한 계책을 세운 사람이였다고 할 수 있음.
당시 호족들 입장에서 유비는 참 좋은 결혼대상이였음. 망했다고는 해도 황족이니 자신의 가문이 황족의 계보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이였으니.



그렇다면 손권은?

손권을 보기 전에 또 봐야 할것이 손권의 위인 손책임. 
손책은 당시 원술에게 군사를 받아 오 지역으로 내려간 신흥 군벌이였음.
그렇기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기에 손책은 굉장히 복합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었음.

명문가인 장씨는 스승으로 모시다시피 받아들였고(장소, 장굉. 이 둘의 관계는 정확치 않지만 둘 다 서주출신인것은 확실함. 당시 명사로 소문난 사람은 높은 확률로 호족이라고 보면 얼추 맞음. 특히 장소의 경우 손권과 사사건건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동오의 특성상 호족이 아닌 다음에야 저런 모습을 보이기 힘들것이라고 생각함)

명문가인 교씨와는 혼약을 맺었고(대교, 소교)

명문가인 육씨는 전쟁으로 짓밟았음.


즉, 유비와 같은 포지션을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음.

문제는 손권이 손책이 아니라는것이였음. 손권이 손책의 뒤를 이을때의 나이는 고작 17세였음.
어리디 어린 손권이였지만 당시 호족들은 손권을 대놓고 무시할 순 없었음.
아직 주유가 살아있었기 때문임.



주유는 당시 손책과 함께 호족들을 쳐바르고 다니던 사람이였음.
즉, 호족들 입장에선 주유가 있었기에 손권을 대놓고 무시하진 못했고 주유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군사의 조련에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음. 

실제로 적벽대전 당시, 주유는 손권의 곁에 있지 않고 파양에서 수군을 조련하고 있었음.
즉, 당시 호족들과 주유는 기싸움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라는게 추측임. 


그리고 조조의 남하가 시작되었음.

오의 세력은 화친을 하자는 비둘기파와 싸우자는 매파로 갈림.
이때 비둘기파의 멤버들을 보면 장소와 같은 호족들이였고, 매파의 멤버들은 정보와 같은 손가의 가신들이였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삼국지에서 그 어떤 세력도 자신이 속한 세력이 온전했을때 한번도 싸우지 않고 항복을 하자고 했던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는거임.

어느정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항복을 한 경우는 있지만 당시 오 처럼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버리자! 라고 한 적은 없었다는것임. 

형주의 경우 채모가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했지만 이건 당시 형주의 상태가 유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된 상황+유기파가 갈려나간 상황+유비가 유기파에 합류해 있는 상황이라는 복합적인 상황이였기에 형주가 "완전체" 가 아니였고

장수의 경우 조조와 몇번 싸운 뒤에 조조에게 항복을 한 상황이였으며

원담 역시 조조와 싸운 뒤에 항복을 했다가 다시 싸워서 패배하였으며 

심지어 형남 사군(한현, 금선 등)도 유비와 싸운 뒤에 항복을 하였는데 

손권의 경우 주화파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그냥 곧장 항복하자고 하는 상황이였음. 
(이는 후에 노숙이 호족들의 뜻을 파악하여 호족들은 주인이 바뀌는 정도지만 주공께서는 다시는 오로 돌아오실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음)


즉, 손권 입장에서 호족들은 "싸울 용기도 없이 위급한 상황이 되자 날 버릴려고 했던 천하의 쓰레기들" 로 생각할 수 밖에 없던것임.


수성군주의 위치 + 적벽대전때의 원한이 쌓여 손권과 호족들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음. 거기에 불을 붙인것이 주유와 노숙의 사망이였고.
(주유는 손책과 함께 힘으로 호족들을 찍어누를 수 있던 채찍이였고, 노숙은 호족 출신이지만 손가에 충성하는 입장인 호족들에게 있어 당근같은 사람이였음)

거기다 장소같은 경우 손권과 맞지 않는다 하여 집에 틀어박히고 손권이 나와달라고 빌고 안나오자 벽에 흙을 바르고 그걸 본 장소가 또 빡쳐서 집 안에서도 벽에 흙을 발랐다는 이야기도 있는 등, 손권과 호족들 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됨. 

물론 호족들의 우두머리격인 육가와 사돈을 맺기도 하는 등, 손권은 손권 나름대로 호족들을 달래보기도 하였음.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손권이 황제가 되었지 않느냐 
황제는 내가 짱먹었다는 소리니까 그쯤 되면 손권이 호족들을 다 찍어 누른것이 아니였냐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손권이 황제가 된 229년, 군의 실권을 쥐고 있던 사람은 대 호족인 육가의 명장 육손이였음.


(이미지 왜곡이 심하게 된 육손 읍읍)

즉, 황제에 즉위하고도 손권은 군권을 호족과 나눠가진, 완전치 못한 황제였다는 소리임.
손권이 군권을 완전히 쥐지 못했다는 예로 
하제라는 군벌은 "이민족 토벌에 효과적이다" 라는 이유로 중앙군과 다른 복식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지금으로 따지면 "북한군이 무서워하니까 디지털 말고 6.25 당시 군복 입히겠음" 이라고 하는 사단장이 있다는 소리임.

즉 호족들은 손권이 황제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손권과 싸우고 있던 입장이였다는 것임.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이가 좋지 않았고, 육손은 승상임에도 불구하고 건업에 있지 못하고 무창에 있었음.

이러다보니 당연히 손권 입장에서는 호족들을 불신할 수 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싶음.

그리고 이 불신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 
오를 말아먹은 
당시 손권의 평가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다 못해 짓뭉게버린

이궁의 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음.

1. 손권은 수성군주였기에 호족들이 만만히 봤다.
2. 국운이 걸린 적벽대전때 호족들이 항복하자고 했다.
3. 황제가 된 이후에도 계속 마찰을 빚어왔다.


...나라도 호족들이 밉고 찢어죽이고 싶었을것 같긴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