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4편


20. 새로운 질서


9차 십자군이 실패하고 돌아오는 기사. 처량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십자군이 9번의 원정 끝에 실패로 끝나며 유럽은 외부의 적을 잃고 다시 내부의 갈등이 커지게 됩니다. 십자군 원정을 위한 물자를 납품하던 상인들은 큰 돈을 벌어 발언권이 강해졌고, 십자군 원정으로 막대한 재산과 병력을 잃은 귀족들과 교회는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슬람 세계로부터 복잡한 관료제 체계가 전래되면서 왕들은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제 3계급, 그러니까 부르주아지들에게 기존에 귀족들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뺏어서 나눠주게 됩니다. 11세기 정도의 중세 절정기였다면 바로 반란이 일어났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십자군 전쟁 이후 상대적으로 강해진 왕의 세력 하에서 이는 자살행위였기에 대규모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군과 왕권의 상관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세 봉건제의 개념을 나타낸 그림

일반적으로 전쟁은 왕권을 강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결집시킨다는 심리적 이유가 아니라, 봉건제라는 정치 체계의 특성을 고려할때 전쟁은 왕에게 일석이조, 삼조에 해당하는 상책이죠. 우선 봉건제의 기초가 상위 영주가 하위 영주를 보호하는 대신, 하위 영주는 세금과 병력을 제공한다는 것인데 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왕의 하위 영주들, 그러니까 귀족들은 왕에게 병력을 제공해야 하며 이에 대한 유지비는 직접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왕은 전쟁을 통해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죠. 

또한, 새로 정복된 땅은 당연히 왕의 소유가 되고, 왕은 이 땅을 기존의 영주가 아닌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하사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새로 영주가 된 사람은 다른 귀족들보다는 왕과 가까울 것이고, 귀족들과 왕이 신경전을 벌일 때 왕의 편에 서게 되겠지요. 고증을 별로 따지지 않은 소설이나 영화, 게임으로 중세를 배운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봉건제는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닙니다. 왕은 서로의 이해 관계에 의해 봉건 계약 상위에 있는 또 하나의 영주일 뿐, 동아시아의 왕과 지방관의 관계처럼 상하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중세 이슬람 세계의 안과 진료

각설하고 이 때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페르시아나 중국같은 동방의 천문학, 화학, 물리학, 의학, 법학 심지어는 중세동안 잊혀졌던 고대의 그리스 철학들도 다시 유럽으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이슬람 세계의 과학 수준은 서양을 수 세대는 앞서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라고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해부도는 이미 200년 전 이 시기에 이슬람에서 서적으로 출판되어 의료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면 - 물론 당시에도 의학은 매우 복잡한 학문이여서 대부분이 귀족이나 귀족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 한 번쯤 읽어봤을 내용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의학적 발견을 르네상스의 결실이라고 하면 당대 무슬림들이 웃을겁니다

이러한 무슬림들은 신기술들은 중세 유럽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를 위해 학자들이 모여 대학이 설립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파리 대학(1150년 설립, 오늘날의 소르본 대학교입니다), 옥스퍼드 대학(1167년 설립), 발렌시아 대학(1208년 설립) 등이 있겠습니다. 물론 유럽 최초의 대학은 1086년에 설립된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지만, 신학을 위해 설립된 학교이므로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지성과 과학의 발달은 자연스레 교회의 권위를 낮추게 되었고, 교회는 결국 십자군이 실패하면서 귀족들과 부르주아지 양쪽에서 치여 전과 같은 위상을 다시는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21. 아나니 사건과 아비뇽 유수

눈을 잠시 돌려보면 중동의 마지막 기독교 치하의 도시 아크레가 1249년에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전 글에서 말씀드렸는데, 이에 중동에서 나고 자란 기독교도들이 대거 유럽으로 유입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의 대부분은 당연히 유럽이 처음이었고, 재산이라고는 가지고 나온 것이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유럽의 빈 땅들을 개척, 정착했고 이 결과 14세기에 들어설때 쯤이면 유럽에 미개척지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이 결과 이전처럼 어느 정도의 미개척지를 대략적인 기준으로 하는 "어느 마을까지 우리나라, 저쪽 마을부턴 남의 나라"같은 경계선이 희미해지는데, 당연히 국경 분쟁은 물론, 각 영주들 간의 영지 간에도 경계를 두고 수차례의 무력 분쟁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이 분쟁들은 역사에서 따로 이름을 남길 만큼 큰 규모로 확대되지는 않았고, 결과적으로 각국간의 협정을 통해 오늘날의 국경 개념이 확립되게 됩니다.

이 "국경"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데요, 국경이 확립되면서 어느 나라의 국민 - 아직까지 시민 개개인에게 그런 생각이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 이라는 개념이 정착되고, 국민의 수와 거주지가 측정되면서 근대적인 조세 체계가 실시될 수 있게 됩니다.

이 결과 각국 내에 있는 교회의 입지가 이전과는 달라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각각의 교회는 교황이라는 종교 지도자의 봉신이라는 개념, 그러니까 영주와 교회는 주군이 다른 서로 독립된 관계라는 인식이 있었으나, 이제 왕의 입장에서는 "내 나라"안에 있는 독립세력이었던거죠.

▲ 프랑스의 "공정왕" 필리프 4세의 초상화

이에 당시 가장 왕권이 강했던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교회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중세 카톨릭 교회 몰락의 전조라고 볼 수 있겠죠. 교회에 과세한다는 결정은 전 유럽의 국가들에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중세의 시각으로는 당연히 교회는 세속 영주들과는 독립된 곳인데, 필리프 4세는 교회 또한 세속 군주의 봉신이라고 본 것이죠.


▲ 보니파시오 8세

모두가 예상했던대로 당대의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이 결정에 격분했으며 당장 교회에 대한 과세를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필리프 8세는 교황의 요구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교황의 사자를 성의 정문이 아니라 쪽문으로 나가게 하는 굴욕을 주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결국 교황은 파문을 위해 고위 주교들에게 소집을 명하고, 자신은 교황령 내의 순방을 통해 무력 충돌시의 지지 세력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필립 4세의 비밀 명령을 받은 기욤 드 노자레가 월경, 로마 근교의 마을 아나니에 있던 교황을 납치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을 아나니 사건이라고 합니다.


▲ 프랑스군에게 납치당하는 보니파시오 8세

아나니 사건으로 프랑스에 납치된 보니파시오 8세는 종교 재판에 회부됩니다. 필리프 4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교황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로써 은밀히 악마와 내통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교황의 방에 마녀들을 들이는 등 신성 모독을 저질렀다는 명목으로 기소했습니다. 당연히 보니파시오 8세에게 제대로 된 반론권같은건 없었고, 신의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기욤 드 노자레에게 뺨을 맞기도 합니다. 당시 80대였던 교황은 이 재판에서 심각한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아 수 주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교황령은 프랑스에게 굴복, 다음 교황으로 프랑스인이었던 클레멘스 5세를 선출하게 됩니다. 새 교황 클레멘스 5세 당연히 필리프 4세에게 충성했고, 교황청을 프랑스 인근의 도시 아비뇽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를 아비뇽 유수라고 합니다.


▲ 아비뇽의 교황청. 지금도 남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후 클레멘스 5세가 죽고 선출된 5명의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이었으며, 5명의 재위 기간의 총합이 60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 왕의 입김에 의해 자주 교체되었습니다. 이후 1370년에 선출된 그레고리오 11세는 백년 전쟁으로 프랑스의 관심이 미치지 않은 틈을 이용해 로마로 돌아가게 됩니다. 


22. 서방 교회의 대분열과 백년전쟁

문제는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간지 1년만에 죽으며 발생했습니다. 추기경들은 프랑스의 입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탈리이아인을 교황 후보로 밀었고, 결국 이탈리아인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그러나 프랑스인 추기경 13명은 이 결과에 불복, 프랑스인 추기경 로베르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옹립합니다. 이를 서방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합니다.


▲ 1054년의 동서 대분열

첫 글에서 1054년 교회가 카톨릭과 정교회로 분열되었으며, 이를 동서대분열이라고 칭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 300년이 지나 카톨릭 교회는 내부의 갈등으로 분열되고 있었으며 정교회는 동방의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이라는 악행에 대한 징벌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

단순히 교황의 자리를 두고 싸우는 것이었다면 크게 확전이 안됐겠지만, 이 교황령과 과 프랑스의 대립을 유럽의 국가들이 양측을 지지하는 입장이 갈리면서 일이 커지게 됩니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갈등이 백년 전쟁인데, 우선 백년 전쟁의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 에드워드 3세의 초상화

우선 1328년에 프랑스의 왕 샤를 4세가 병으로 죽게 됩니다. 문제는 샤를 4세가 일찍 죽는 바람에 직계 후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 법률대로라면 계승권 1위는 샤를 4세의 외손자였던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이며, 계승권 2위는 샤를 4세의 사촌 필리프 6세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귀족들은 영국의 왕이 프랑스의 왕을 겸하면 왕의 힘이 너무 강해져 귀족들이 탄압받을것을 염려, 같은 프랑스인이기도 한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으나, 당시 스코틀랜드의 독립전쟁이 한참이었기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결국 스코틀랜드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독립, 에드워드 3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프랑스에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합니다.


▲ 필리프 6세의 초상화

이어 에드워드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노려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왕의 영토를 몰수할 계획을 꾸미는데, 노르망디 공작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의 왕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 왕의 영지중 하나가 되어 상속되온 노르망디와 플랜테저넷 왕조를 연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여공작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역시 부계로 상속된 아키텐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 아키텐의 위치

당연히 멀쩡한 봉토를 회수하려면 명분이 필요했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영국 왕에게 "주군에게 무력으로 대적했다"는 반역죄를 씌우려는 목적으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을 지지, 영국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가라앉게 됩니다. 1년 후에 스코틀랜드는 다시 영국에 병합되게 되고, 무력 충돌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어 프랑스와 관계가 험악했던 부르고뉴와 플랑드르가 영국을 지지하면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선전포고, 백년전쟁의 막이 오릅니다. 

당연히 프랑스를 적대하는 국가들은 서방 교회의 갈등에서 이탈리아의 교황청을 지지했고, 영국을 적대하는 국가들은 프랑스를 지지하게 됩니다. 이로써 서방 교회의 분열은 정치적, 세속적 전면전까지 확대되게 됩니다.


23. 대분열의 지속과 흑사병

대분열이 영국-플랑드르-부르고뉴 동맹과 프랑스-카스티아 연합의 전면전으로 확대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교회의 높으신 분들 싸움인 것이 아니라 민중들에게도 체감되는 사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전쟁은 당연히 징병과 전투, 점령된 지역에 대한 약탈을 수반하므로 평민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줬는데, 설상가상으로 동쪽에서 흑사병이 전래되기 시작합니다. 


▲ 흑사병이 창궐한 유럽의 도시

흑사병, 그러니까 페스트는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된, 설치류에 매개로 하는 전염병입니다. 페스트는 치명적으로 높은 전염성과 치사율을 보유한 질병으로, 21세기 현대에도 제 1종 전염병으로 분류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흑사병은 처음에 킵차크 칸국의 군대로부터 동로마 제국으로 감염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며, 이후 카파 포위전에서 빠져나온 보균자 시칠리아 선원들이 서유럽에 이 질병을 옮기게 됩니다.


▲ 흑사병의 확산 과정

흑사병에 죽은 인원은 전 세계적으로 적게는 7천 5백만 명에서 많게는 2억명정도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농노를 기반으로 하는 봉건제는 완전히 붕괴하게 됩니다.

이와중에도 교회는 서로가 진짜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허구한날 서로를 파문하며 싸웠고, 이에 대한 반발로 롤라드파나 후스파, 공의회수의파같은 이단들이 세를 얻어 기존 교회들과 무력 충돌을 벌이기도 해 유럽엔 생지옥이 펼쳐지게 됩니다. 

이 싸움에 지친 추기경들이 피사 공의회에서 모여 기존의 두 교황 모두를 폐위하고 새로 알렉산드르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한다고 선언했으나, 기존의 교황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교황이 셋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심지어 백년전쟁의 격화로 아비뇽 교황청마저 프랑스 지지파와 부르고뉴 지지파로 분열되어 잠시동안은 교황이 넷이라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24. 중세의 끝

교황의 자리를 두고 싸운 이 일련의 분쟁들, 그동안에 닥친 흑사병이라는 희대의 재앙에 대한 교회와 귀족들의 무기력함, 그리고 농노 기반 경제의 붕괴는 유럽을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만들었습니다. 봉건제는 무너졌으며, 자치권을 쟁취한 자유 도시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어 부르주아지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상인들은 새로운 교역로와 부, 명예를 위해 새로운 땅을 탐색했고, 이는 1492년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전으로 이어지게 되죠

또한 교황의 자리를 둔 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아비뇽 유수 140년만인 144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협상과 전쟁을 통해 다른 교황들을 폐위하면서 로마 교황청의 교황 니콜라오 5세가 유일한 교황으로 남으면서 종식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백년전쟁은 1453년에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프랑스는 이 전쟁을 통해 완전한 중앙집권화에 성공, 봉건제가 몰락하고 전제 군주정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세속 군주들과 동등했던 교회는 마침내 세속 군주들의 봉신으로 전락하게 되죠. 

같은 해, 동방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되어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게 되어 우리가 중세라고 알던 세계의 판도는 사라지게 되고, 이제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룬 국가들이 등장하는 근대가 시작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1453년을 중세의 끝이라고 합니다.


중세라는 700년에 달하는 세월동안 수많은 이들이 성지 회복을 위해, 명예를 위해, 부를 위해, 왕이 되기 위해 싸웠으나 결국 그들의 이름은 역사책에서나 등장할 뿐 현재에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의 땅이 아니며, 부는 기업들의 것이고, 만인의 위에 군림하는 왕은 사라지고 국민이 뽑는 대통령이 나라를 이끄니 인생무상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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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세계의 명문가들에 대한 연작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