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역사상 수많은 기병부대들이 활약해왔지만 그 중 최고의 간지를 자랑하는건 역시
초기 근대시기(1500년~1775년경)에 활약한 윙드 후사르가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예 기병부대로써 간지나는 날개와 여러 전장에서 보여준 활약상으로 아직까지도 여러 미디어에서 회자되고 있는 기병중 하나입니다
무장을 들여다 보자면

갑옷과 투구,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속을 파낸 길이 5M가량의 랜스, 기병도인 샤블라와 에스터크등으로 무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시 눈에 제일 띄는 특징은 등 뒤에 달린 날개인데요 저 날개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말들이 있는데

1.몽골군이 유럽을 침공할 때 후사르들에게 그물을 던져 낙마시키자 그걸 막기위해 뒤에 철조각들을 날개처럼 붙인데서 유래하였다.

2.적에게 위압감을 주기위하여 붙였다 (커다란 물체가 나 잡는다고 꼬챙이들고 빠르게 달려오는데 등에다 날개까지 달려
더 커 보이니 무서울 수 밖에...)

3.상징적인 측면에서 폴란드의 상징은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이고 리투아니아의 상징은 달려나가는 기사인데 이 두가지를 합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결합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

고 합니다.(개인적으로는 3번설을 지지합니다.)

윙드 후사르의 활약상을 들여다보면 스웨덴,오스만 제국(오스만은 로마가 아니다!), 합스부르크 왕조,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활약하였는데요 그 중 몇몇 전투를 소개하자면

1514년 9월 8일 폴란드 vs 러시아 오르샤 전투


12,000명~30,000명의 기병대가 45,000~80,000명의 러시아군 중 10,000명~30,000명을 전사시키고 3,000~5,000명의 포로로 삼았다


현재 비치나Byczyna의 모습

폴란드 국왕 스테판 바토리 사후, 막시밀리안 대공이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침공해 오자 비치나(Byczyna)에서 깨부수고
막시밀리안 대공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600년 스웨덴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벤덴(Wenden), 코켄하우젠(Kokenhauzen), 락베레(Rakvere), 비아위 카미엔(Bialy Kamien)등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1605년 스웨덴과의 키르홀름(Kircholm) 전투에서는 12,000명의 스웨덴군을 2,500명의 윙드 후사르가 돌격하여 스웨덴군의 전열을 파괴하였고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의 60~80%가 전사했습니다

위의 전투들에서 대패한 덕에 스웨덴은 폴란드군과의 평지에서 싸우는 것을 최대한 피하게 되었죠

쿠쉰전투의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지긋지긋한 윙드 후사르의 랜스에 대한 대책을 세워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목책을 세우고 흙으로 방벽을 만들어 윙드 후사르의 돌격을 막고 뒤의 파이크병과 머스킷병으로 공격한다는 전략이었죠.
두 군이 만나 대치하다 후사르가 돌격을 시작한는 순간까지 러-스 연합군은 작전대로 되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사르가 목책과 흙벽에도 불구하고 정면돌파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사격 개시!"

러-스 연합군의 머스킷병들은 사격을 개시했고 달려오던 후사르 몇이 총에 맞아 낙마하였습니다.
 날아다니는 총탄과 퍼지는 화약 연기속에 점점 다가오는 후사르를 본 러-스 연합군은 무언가 이상한걸 느끼기 시작하죠

"뭐지? 분명 무언가 이상한 것 같은데?"

갑옷? 날개? 두 가지 다 있었지만 보이지 않던 것은 후사르들의 랜스였습니다. 한번 찌르기에 6명을 꿰뚫은 기록도 남아있는 후사르의 상징 무기 랜스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점점 다가오던 후사르들은 방벽 앞까지 다가왔을때 준비하고 있던 피스톨을 꺼내어 방벽뒤의 러-스 연합군을 향해 발포하며 카라콜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카라콜 전술이란?

1열이 사격후 측면으로 산개 다시 후열로 모이고 그 사이 2열이 사격하는 식의 전술입니다. 적 방진의 바로 앞에서 사격후 이탈 다시 재집합 및 사격의 고도의 훈련 과정이 필요한 전술이죠 당시 피스톨의 유효사거리는 10미터 안쪽이었기 때문에 말그대로 적의 코앞까지 달려간 후 사격해야만 했습니다.

후사르들의 카라콜 전술에 놀란 러-스 연합군은 파이크병을 후방으로 보내고 머스킷병을 앞열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카라콜 전술에는 파이크병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죠.
머스킷병을 앞으로 보내 카라콜을 대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다시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음? 갑자기 적들의 깃발이 많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3열째의 후사르는 카라콜을 위한 피스톨이 아닌 깃발이 달린 랜스를 들고 랜스차징을 위해 돌격하기 시작했고 목책과 흙벽 사이사이로 돌진하여 혼란에 빠진 러-스 연합군에게 랜스차지를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1,2열은 카라콜 3,4열은 랜스차지라는 후사르의 전술에 러-스연합군은 많은 피해를 보긴 했으나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계속 된다면 숫자에서 우월한 러-스 연합군의 승리로 전투가 끝날수도 있었죠.

"내 기억에 따르면 어떤 중대는 적을 향해 8번에서 10번 이상을 적을 향해 돌격하였다. 계속된 적과의 전투 때문에 우리의 장비는 서서히 부서져 가고 있었고, 우리의 힘은 점점 빠져 갔다, 군마들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다 군마들은 적들과의 약 5시간의 걸친 전투때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계까지 힘을 내고 있었다."
-당시 출전한 후사르 사무엘 마스키에비츠(Samuel Maskiewicz)의 일기에서-

이때 러시아 총사령관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지친 후사르들에게 2열에서 대기중이던 기병대를 돌격시킨다면 지친 후사르들은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기뻐하며 좌익중 3개전대의 라이터 기병대를 방책 옆으로 우회하여 후사르를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러시안 라이터(Reiter) 기병대

달려오는 러시안 기병대를 본 후사르들은 전의를 잃기는 커녕 오히려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방병뒤에서 파이크로 콕콕찌르며 박혀있는 적군보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있는 적 기병대쪽이 더 손쉬운 먹잇감이자
싸우고 싶게 만드는 적이었죠. 피스톨을 들고있던 후사르 들도 피스톨을 내려놓고 다시금 자신의 랜스를 들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랜스차지를 사용하는 나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외엔 없다고 무방할 정도로 거의 모든 기병대는 카라콜 전술을 기본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사거리가 좀 더 길었던 라이터 기병대가 먼저 사격을 개시하였지만 효과는 별로 업었습니다 후사르들의 흉갑은 피스톨의 탄환정도는 막아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좁힌 후사르들은 랜스를 들고 차징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러시안 기병대를 향해 차징하는 후사르의 모습

수많은 러시안 기병대가 랜스에 꿰뚫리거나 낙마하고 파고든 후사르들은 부러진 랜스를 놓고 허리춤에 있던 샤블라와 에스터크등을 뽑아들고 주위의 적들을 썰어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러시안 기병대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패닉에 빠지기 시작한 러시안 기병대가 적들의 보병 전열을 흐트러뜨리며 달아나는 모습을 본 후사르의 총대장은 전 후사르들에게 러시아군을 상대로한 전면적인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러시안 기병대가 보병사이로 파고들며 도망치면서 부상을 입은 보병도 있었고 자신들의 기병대가 패닉에 빠져 도망치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게된 러시안 보병들은 후사르들의 전면적인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방책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러시아군은 후사르들의 크고 아름다운 랜스의 제물일 수밖에 없었죠.

러시아군이 짓밟히며 도망거던 와중에도 스웨덴이 지휘하던 용병부대들은 자신들의 방책을 사수하며 방어하고 있었지만
마침내 도착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보병들이 대포로 사격하여 방책을 무너뜨리자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후사르들의 승리로 쿠쉰전투가 마무리 되게 되었습니다.

기타 기록들로는

1620년 체초라 전투에서 15,000명의 오스만 투르크군에게 300명의 후사르가 돌격하여 1,000명이상의 피해를 입히고 퇴각 시킨적이 있으며,1621년 코침 전투에서도 오스만군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반지의 제왕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에서의 로한기병은 제2차 빈포위당시의 후사르의 포지션을 모티브로 하였다고 합니다.
다만 생긴건 노르만 기병

뛰어난 역사의 기록들과 등 뒤에서 나부끼는 날개로 자신의 능력을 자랑했던 윙드 후사르(Winged Hussar)
그 매력에 빠져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