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전쟁을 다루는 매체에 있어서 반드시 빠지지 않는 소재 중 하나가 바로 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이다.

 

예전 전쟁영화는 주인공의 영웅적 행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요즘 전쟁영화는 PTSD를 소재로 한 경우가 더 많을 정도이다.

 

PTSD는 당연스럽게도, 수많은 연구가 진행중에 있으며, 이미 상당수가 연구되어지기도 했다.

 

필자는 이러한 PTSD, 그중에도 전쟁으로 겪는 PTSD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PTSD는 1차대전 중 갑작스럽게 그 증세가 집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쉘 쇼크(포탄 충격)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처음에 이를 단지 겁쟁이에게서 나타나는 증세로 생각했다.

 

쉘 쇼크를 겪는 병사는 갑작스레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증세를 호소하거나, 제대로 걷지 못하거나, 몸을 경련하기도 하였다.

 

 

쉘쇼크를 소개하는 간단한 영상. (주의 : 혐오스러울수 있는 부상자의 모습도 있음)

 

 

앞서 설명한대로, 처음엔 사람들이 이러한 쉘쇼크를 겪는 병사는 단지 겁쟁이여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년간의 전투경험을 갖는 베테랑, 심지어 훈장 수훈자들도 이러한 쉘 쇼크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자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걸 깨달았다. 이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였다.

 

 

 

처음에는 단지 PTSD는 전투 피로증이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피로감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하였다.

 

육체가 지치듯, 정신도 지쳐간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여가를 주는 방향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미국 같은 경우도 이처럼 생각하여, 전후에 필리핀 등의 나라를 일종의 미군을 위한 휴양지로 개발하여 그들의 전투피로증을 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2차대전이 되자, 미군은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2차대전 과정에서 미군은 무려 50만 4천여명이 정신적 붕괴로 인해 손실되었다.

 

이는 거의 50개 사단에 달하는 수치였고, 이는 모집 단계에서 80만명을 정신적 부적합자로 선정한 이후에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 중에서 발생한 수치였다.

 

스웽크와 머천드는 2차대전 노르망디에 참가했던 전투원들이 겪은 일을 간단한 그래프로 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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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일수가 0일에서 60일까지 진행되는 동안, 전투 효율을 나타낸 그래프이다.

 

최종적으로 2차대전에서 노르망디에 상륙했던 미군은 60일간의 지속전투에서 98% 의 병사가 정신적 사상자가 되었다.

 

정신적으로 살아남은 2%는 '공격적 정신병 상태' 였다.

 

이 수치는 대체로 전체 인구수 중 사이코패스의 비율과 일치한다.

 

결국 약 60일 정도의 전투가 계속된다면, 거의 참가한 전원은 정신적으로 붕괴한 상태에 처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투에 있어서 PTSD를 겪는 주된 요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이 죽을수 있다는 공포'가 아니였다.

 

이는 원인에서 나오게 된 결과에 불과하다.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PTSD의 주 요인은 '다른 사람을 살해한다는 트라우마'였다.

 

 

 

2차대전이 종전했을때, 사람들은 무차별한 폭격을 당한 민간인들을 위해 정신적인 치료를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막상 1949년에 발간된 랜드 연구소의 전략폭격에 대한 연구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바로, '폭격을 당한 민간인의 정신적 장애는 전쟁 전에 비해 아주 근소한 차이만을 갖을 뿐이다.' 라는 것이였다.

 

나와 가족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PTSD의 원인이 아니였다.

 

오히려 국민들의 전투의지를 깎고자 했던 이런 폭격들은, 국민들에게 싸울 의지를 더 높이는 역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정신적 사상자가 될지도 모르는 지속전투 현장에서도 독특한 존재는 항상 있었다.

 

바로 의무병과 군종병, 그리고 포병들이였다.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나오는 군종병의 장면.

 

 

의무병, 군종병들은 항상 지속전투에서도 특이하게 큰 동요를 보이는 일이 없었고,

 

수많은 참전자들 사이에서도 '중대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묘사되며 엄청난 용기를 가진 이들로 칭송받았다.

 

 

포병 또한 정신적 사상자에서 '면역'인것과 같아 보였는데, 이들은 직접적인 살상률로 따지면 가장 큰 책임을 가져야 하는 반면

 

실제로는 역사적으로도 정신적 사상을 앓는 비율은 극도로 낮았고, 사격을 기피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전투에서 일어나는 공포의 효과, 생리적 각성, 전율, 육체적 결핍은 과소평과 되어서는 안되지만, 명백하게 이는 PTSD의 원인이 아니였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의외의 곳에서 밝혀지기 시작했다.

 

 

<살인의 심리학>의 저자인 데이브 그로스먼은 자신이 인터뷰한 2차대전과 베트남전 참전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의아한 점을 찾았다.

 

자신의 동료가 전사한 일에 대해서는 비교적 담담하게 증언을 하는 반면,

 

자신이 사살한 적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는 증언을 피하거나,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진짜 사람들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었던 일은 바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사용한 무기에서도 나타난다. 먼 거리에서 사격하는 무기일수록, 심리적인 피해는 더욱 적었다.

 

"전반적으로 볼 떄, 거리는 효과적인 완충 장치다. 포수들은 자기 눈으로 볼 수 없는 격자 좌표 속의 표적을 향해 쏘고, 조종사들은 목표물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 ㅡ Deyr, G

 

"너도나도 총을 쏴대는 상황에서, 누가 맞췄는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 총을 쏘고 한 녀석이 쓰러지는걸 봤다고 해도, 누가 맞췄는지 알수 없으니까." ㅡ 데이브 그로스먼

 

"내가 만나 본 대부분의 참전용사들은 최전선에서 복무한 보병들이였지만, 자기가 실제로 적군을 죽였다고 믿는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고, 이러한 믿음은 대체로 증거가 빈약하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었다." ㅡ 리처드 홈스

 

"보병들은 소총으로 정확한 사격을 가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수류탄을 주무기로 삼았다." ㅡ 존 키건, 리처드 홈스, <병사들>

 

"수류탄이 그토록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수류탄 살해와 연관된 정서적 트라우마가 근거리 살해 시 유발되는 정서적 트라우마보다 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ㅡ 데이브 그로스먼

 

 

 

 행여 총기를 들고 적과 수 미터 내에서 접촉하는 상황이 오면, 사격률은 급격히 낮아졌다.

 

"막상 들어가보니 적 저격수는 저격용 장비를 걸치고 있어서 재빨리 뒤돌아 설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45구경 자동권총으로 쏘았다. 이내 수치감이 들었다. 바보같이 '미안해'라고 중얼거린게 기억난다. 그것은 내가 어릴 적 부터 배워온 것을 배신하는 짓이었다." ㅡ 윌리엄 맨체스터

 

"주위를 둘러보니 다섯명 정도의 독일군이 있었다. 우리의 인원 수도 네다섯 명 정도였다. 처음 우리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중략) 그러나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자 우리는 참호의 가장자리에 찰싹 붙어 몸을 숨겼고, 독일군들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그렇게 되자 다음에는 기묘한 소강상태가 벌어졌다. 우리는 담배를 꺼내 서로 돌려가며 피웠다. 그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순간 분명하게 느낀것은 서로를 향해 총을 쏘아댈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고, 그들도 단지 무서웠을 뿐이다." ㅡ 존 키건, 리처드 홈스, <병사들>

 

"윌리스 대위는 상대방 북베트남군의 가슴에 M-16 소총을 겨눈 채 섰다. 그들은 5피트도 채 되지 않을 거리에 마주서있었다. 대위는 격렬하게 머리를 가로지었다. 북베트남 군인도 그만큼 격렬하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 둘만의 휴전, 적대적 행위 중지, 신사협정, 거래가 이루어졌다." ㅡ 데이브 그로스먼

 

 

 

거리가 완전히 줄어, 대검이나 단도를 사용해야 하는 지경이 되면 역설적으로 전투원들은 살상과 완전히 멀어졌다.

 

전투원들은 교전상황이 되면 아무리 자기에게 유리해도, 도검이나 칼로 찌르기보다는 둔기를 선호했다.

 

대부분의 경우는 상대가 항복하거나 도주하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

 

"제 1차대전 당시 프레데릭 카를 왕자는 한 독일군 보병에게 왜 전투에서 총검보다 개머리판을 쓰게 되는지 물었다. 그 군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전투 상황이 되면) 이 것이 저절로 손 안에서 뒤쪽으로 돕니다." ㅡ리처드 홈스

 

"진짜로 독일군을 총검으로 찔러봤다고 할 수 있는 군인은 아주 적었다. 총검으로 위협하며 칼끝을 들이대기만 해도 대개 상황은 종료된다. 거의 모든 병사들은 칼에 찔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예외없이 두 손을 들고 만다." ㅡ 프레드 마잘라니

 

 

 

 

1950년 미군의 S.L.A 마샬 중장은 <군인의 부담과 국가의 가동성> 에서, 전투의 스트레스를 겪을 때 전투 효율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연구하였다.

 

마샬은 전투중에 사람들은 극도의 집중상태에 처하며, 이때 평상시보다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할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결과는 정 반대였다.

 

대부분 이런 스트레스에 처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돌격하거나(일본군의 반자이어택 처럼), 아예 전투 자체를 거부하였다.

 

인간의 시각 능력, 인지작용, 운동 능력 세 가지는 전투 상황에서 모두 붕괴하였다.

 

 

 

마샬의 PTSD의 기념비적인 연구인 <사격에 저항하는 자들> 에서는 놀라운 통계가 나온다.

 

2차대전에 참전한 소총수 중에 불과 15~20%만이 노출된 적에게 사격을 가했다는 것이였다.

 

기관총과 같은 화기는 거의 95% 이상이 사격을 가했고, 가까운 곳에서 지휘관이 직접 명령을 내리는 경우도 사격률이 상승했다.

 

그러나 완전히 개인에게 사격의 재량권을 맏긴 경우, 사격률은 급감했다.

 

수많은 자료들이 그의 의견을 입증했다.

 

'인간은 타고난 살인자가 아니였던 것이다.'

 

 

 

미 육군은 마샬의 결론을 받아들였고, 미 육군의 인사 연구소는 전투 훈련에 있어서 이러한 낮은 사격율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조건반사를 습득시키기 위해 사격 표적을 교체한 것이다.

 

이전의 원형 표적을 교체하여, 사람모양의 표적이 올라오고, 타격을 할 경우 표적이 내려가도록 바꾼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조건반사 습득만으로도 20%에 머물렀던 사격율은 불과 1년뒤의 한국전쟁에서 55%, 20년뒤의 베트남전에서는 95%까지 상승한다.

 

 

 

이러한 사격율에 대한 심리적 훈련의 중요서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러한 사격에 대한 위화감을 줄인 영국군은 잘 무장하고 신중하게 방어진지를 갖춘 아르헨티나군을 공격하는 조건에서, 화력적 우세도 없고 병력조차 1/3 수준인 상황에서도 연이어 승리할 수 있는 핵심 요인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격률이 늘어날수록, 반대로 PTSD는 급증하기 시작했다.

 

심리적 허들까지 낮출수는 없었던 것이다.

 

 

참고 글 출처 : http://blog.naver.com/bedford_boys/150184850339

 

 

 


 

1줄요약 : 전쟁에서 PTSD의 원인은 공포가 아닌, 살인에 대한 저항감.




출처 : 개드립(http://www.dogdrip.net/125469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