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후협상을 시작했다. 명나라 이여송(명 하급장수, 연대장급)과 일본육군 총사령관 '고니시 유키나카' 와 단둘이서 조선반도의 전후협상을 했다. 이회담에 조선의 장수들은 끼지도 못했다. 단둘이서만 조선반도에 대한 협상을 했다. 명나라는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주장했고 일본측은 경상도와 전라도까지는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다가 은근슬쩍 일본육군은 3년간 부산에 주둔했고 매일 동네 아녀자들을 잡아다가 강간을 했다. 부산 사투리가 일본어와 매우 유사한것도 그 때문이다.


둘째, 일본군이 부산 동래에 상륙해서 한양까지 불과 15일 걸렸다. 길앞잡이들이 바로 조선농민들이였다. 일본군은 지나가는 마을마다 보릿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동안 양반+아전들에게 가렴주구 당했던 조선 농민들은 일본군이 나누어주는 보릿쌀을 받고 일본군을 대환영했고 일본군 첨병으로 활동을 하였다


셋째, 한양을 방어하는 최후에 방어선인 용인전투에서 7만의 조선병사는 1600명의 일본 기습대에게 전멸 당한다. 이광, 신익, 곽영, 김수등 조선의 내노라하는 명장들은 졸개옷으로 갈아입고 가장 먼저 도망쳐버린다. 남은 졸병들은 우왕좌왕 하다 일본군에게 무참히 도살당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 기습대중 약 600여명이 조선인이였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이들이 왜 일본군에 가담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넷째, 선조가 의주로 도망칠때 개성에서 윤두수라는 자에게 묻는다 "적병의 절반이 조선인이라는데 사실이더냐?"
이에 윤두수는 읍소하며 벌벌떨며 고개를 숙일뿐 아무말도 못한다 (-쇄미록 발췌-)


다섯째, 조선은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억압하였다. 조선시대 중들은 천민계급이였고 백정과 동급취급을 받았다. 조정은 중들에게 천민계급을 없애줄테니까 의병활동을 해달라고 부탁했고 중들이 일본육군과 전쟁을 한것이다. 이중 유명한 이가 바로 사명대사다. 사명대사도 조선시대에는 천민계급으로 인간취급도 못받았다


여섯째, 전후 일본군에 협력했던 수많은 조선농민들이 일본군을 따라서 일본(가고시마현)으로 건너간다. 일본 영주들은 이들을 고려촌(고라이 무라)에서 살게했으며 농사지을 땅을 주었다.

일곱번째, 임진왜란때 '이삼평'과, 정유재란때 '심당길'이라는 도공이 일본에 끌려왔다. 일본 영주는 조선 도공들(약 160명)에게 사무라이 계급(당시 도공은 조선에서 천민층)을 주고 은화 30냥(현재가치 2억원)과 밭과 집, 여자를 함께 주었다.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에서 귀족 대우를 받고 마음껏 도자기를 구웠으며 전후에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정에서 귀국을 종용했으나 조선 도공들은 귀국을 거부했고 일본에 정착하였다. 지금 심당길의 14대 후손(93세)이 도자기를 굽고 있는데 일본의 중요 무형문화재다.


여덟째, 일본군이 한양으로 진격해 오자, 궁궐에 있던 관노비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 도성문을 열어 일본군을 반겼다. 한양공격의 대장이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는 관노비들에게 은화 상금을 내린다, 그런데 그는 추격대를 만들어 의주로 도망치는 선조를 추격하지 않았다는게 의문이 남는다.








"약자는 과연 선량한가?"

-윤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