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희망을 주던 취임식에서의 국민통합 선언
현실은 극단의 증오가 일상화한 적대 사회
지난 기억이지만 취임사에 관한 한, 문재인은 역대 최고였다.
짧은 취임사 대부분을 "통합과 공존" 선언으로 채웠다.


노무현의 비극 이후 절치부심해 온 그에게서 이런 대범한 국정철학을 듣게 될 줄 몰랐다.
좌우를 극단으로 오가던 시계추의 진폭이 비로소 줄고
관용과 소통의 정치문화가 처음으로 싹을 틔우리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통합은커녕 모든 사안이 진보와 보수,
나아가 이념과도 무관한 내 편, 네 편의 격렬한 싸움으로 치환됐다.
갈등은 자연스럽되 이 정도의 적대와 증오로 뒤덮인 사회는 일찍이 없었다.


윤미향 같은 涊 을 비판하면  토착왜구나 친일파가 되기도 한다.
참고로 증조할아버지께선 항일운동을 하셨고, 난 그분의 후손이다.

그런데   why?

우리 같은 사람들이 도착 왜구, 친일파가 되는 걸까

문재인은 왜 정의연 이슈에 침묵할까? 

검찰이 조사중이라..  적폐 검찰에 대한 믿음,



보편가치인 평등, 공정, 정의도 서로 다른 의미로 각각의 집단에 갇혔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 지경의 적대 사회를 만든, 아니 이리되도록 방조하거나
최소한 방치한 책임만큼은 그 어느 업적과 무관하게 차마 용납기 어렵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담론이 넘쳐난다.
대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종말, 폐쇄적 국가주의의 발호,
개인주의와 배타주의의 범람 같은 것들이다.


구체제가 일거에 붕괴하는 마당에 믿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
각자도생의 길밖에 없다는 극단적 비관론까지 횡행한다.

그러나 코로나의 핵심 메시지는 정작 다른 것이다.


눈 밝게 읽었다면 도리어 "통합과 연대" 공존’만이
나의 안전과 생존, 세상의 발전을 담보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열린 세상에서 나 혼자로는 별 의미도 없을뿐더러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코로나는 우리 각자의 삶이 생각보다 훨씬 더
긴밀하고도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다.
주변의 안전과 행복이 나의 안전 행복과 무관치 않다는 각성이다.


철학적 담론을 빌자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성 속에서 의미를 얻는 존재다.

실제로 폐쇄적 신념에서 비롯된 독선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신천지 같은 사례들이 극명하게 입증해 보였다.
방역 성공도 결국은 소통과 공감에 기반한 정치 사회적 협동의 결과물이다.


어쨌든 문 정부는 빛나는 방역 성과로 국정운영에서 대단한 자신감을 얻었다.
최근 수십 년 어느 정부도 가져보지 못한 성공의 경험이다.
더욱이 역대 최고 수준의 지지율과 입법 권력의 장악으로 뭐든 할 수 있는 동력도 얻었다.


그래서 도리어 우려가 크다.
과한 자신감이 자칫 배제와 독선의 질주를 가속화하지 않을까 하는,

지금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 앞에 놓여 있다.


진단과 해법들이 제멋대로, 심지어 모순적으로 엉켜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큰 정부와 규제 완화가 그렇고, 국가주의와 개인주의도 그렇다.
뉴딜이든 뭐든 어느 것도 일방적 결정으로 몰아붙일 게 아니라는 뜻이다.


코로나로 잠시 덮였지만,

동안 일방 질주의 결과가 경제 쇠락과 고용재난 같은 소주성의 후유증이고,
원전의 딜레마고, 극단의 적대사회화 같은 것이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오직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협의와 설득, 공감을 통해
책임을 나누고 리스크를 분산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개혁이냐 통합이냐" 따위의 양자택일식 질문은 부질없다.
"굳이 답해야 한다면 통합이 우선이다."
취임식에서 한 약속대로, 지지하지 않은 국민들까지 끌어안아 생각을 모으고
선택과 조정을 고심하며 함께 나아가는 길을 가야 한다.


이제부터야 말로 대통령과 여당은 이념과 당파, 내 편의 이해를 넘어
통합, 연대, 공존의 사회를 만들겠다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게 코로나가 바꿀 미지의 세계를 헤쳐나갈 가장 유효한 방법이거니와,
훗날 역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게 평가받을 업적이 될 것이다.


코로나의 메시지는 통합과 공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