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비문엔 투후 김일제를 자기들의 초대선조, 그 7대 손인 성한왕을 한반도에서의 직접 조상으로 거론한다. 문무왕 비문 같은 금석문은, 후대의 사람이 쓴게 아닌 문무왕 당시의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거라는데에 큰 의미가 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가 끝나고 250년이 지난 후 김부식이 남은 문서등을 분류 정리해서 만든 사서인데, 아무래도 250년 이후 후손들 시각, 신라가 아닌 고려의 시각으로 쓰인거라 어느정도 후대인의 시각이나 각색이 들어가게 된다.

반면 광개토대왕비문이나 문무왕비문 같은 금석문은 가감없는 당대의 사람들의 인식,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잠시 아래 영상을 보고 오자


그리고 하나 더

신라말 유명한 최치원 이라는 사람이 신라인의 조상(아마 김씨)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도 유명했던 학자로 헛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면, 아직 신라시대였던 최치원 당시에 그가 연구한 자료는 신빙성이 높다. 연나라는 요서와 산동반도에 할거했던 선비족(기마민족) 이다.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 피난해 와 있던 곳이다. 그 때문에 연나라의 강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읍과 마을을 사돌(사탁), 점돌(점탁)이라고 불렀다.” - 최치원

또 후한서엔 이런 기록도 나온다

“진한(辰韓)의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진나라(秦)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들어오니 마한이 동쪽 땅을 떼어주었다. 서로 ‘무리’라고 부르는 그들의 언어는 마치 진나라의 말과 같았다. 그래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이곳엔 12개의 조그마한 나라들이 있어 각각 1만 호가 되었는데 저마다 ‘나라’라고 일컬었다.” 


물론 김씨왕들의 무덤을 파보면, 도저히 한반도 물건이라고 할 수 없는 각종 기마민족의 마구나 동복, 상징을 담은 장신구들이 나온다.

단지 기록만이 아니라 무덤형태나(적석목곽분은 흉노 무덤양식) 많은 유물로도 그것이 입증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