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7일 오후 4시경, 한 이브온라인 유저가 게임 내에서 NPC에게 지불해야 할 세금을 체납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가상의 우주에서 벌어진 사소한 실수였지만 연체료는 아주 비쌌다. 21시간에 걸친 전쟁, 그리고 현실화폐로 30만 달러(3억 2천만 원) 규모의 피해액이었다.

▲한사람의 실수가 이 장관을 만들어냈다



■ 전쟁의 발단 - 오랜 앙숙관계

이브온라인에서 한사람의 유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렇기때문에 유저들은 회사(Corp)를 차리고, 회사가 모여 동맹(Alliance)을 만들고, 동맹이 모여 연합(Coalition)을 만든다.

북부 3동맹PL(Pandemic Legion)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N3PL연합은 남부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러시아연합과 오랜 앙숙관계였다.

▲ N3PL과 러시아연합은 오랜 앙숙관계였다


이들은 할로윈전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쟁관계에 들어갔으며, N3PL과 동맹관계에 있던 프로비던스 연합, 러시아연합과 동맹관계였던 CFC가 전쟁에 가세하면서 작년 11월 7일 시작된 이들의 전쟁은 12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지난 1월 27일, B-R5RB 항성계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 세금전쟁 발발

이브온라인의 우주공간은 넓고 콩코드(타 온라인게임의 NPC경비병과 유사한 경찰병력이다)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많다. 그리고 콩코드는 매달 일정량의 세금을 지불하는 연합에게 해당지역의 점유권을 주며, 우주정거장을 보호하고 관리하는데 각종 도움을 제공한다.

N3PL 소속의 PL동맹도 같은 방법으로 B-R5RB성계를 임대하여 주 집결지 및 군수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헌데 한국시각 1월 27일 16시 30분경 B-R5RB의 세금납부기간이 지나가 버렸고, B-R5RB는 주인이 없는 성계가 되어버렸다.

평범한 성계였다면 영토점거유닛(TCU)를 다시 설치하고 활성화 될 동안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B-R5RB는 PL의 주 집결지였고, 이 곳의 소유권을 놓치면 정박중인 함선과 전쟁물자가 동결되어 다른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도 차질이 생기게 될 상황이었다. 반면 CFC/러시아연합에게는 이곳을 탈취하는 순간 PL의 병력을 다른 지역의 전장에서까지 배제시켜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B-R5RB의 전투가 두 거대 연합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 것이다.

N3PL측은 소유권을 복구하기 위해 즉각 영토점거유닛(TCU)을 설치했다. 허나 TCU는 활성화되는데 시간이 걸리고, 콩코드가 제공하는 보호수단이 없는 스테이션은 외부 침공에 무력했다. CFC/러시아연합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함대를 급파, 23시에 스테이션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CFC/러시아연합은 함대 장악과 더불어 별동대를 조직해 N3PL의 제2, 제3 집결지를 공격해 지원군을 효과적으로 봉쇄했고, N3PL의 지원병력들은 자신의 영토였던 B-R5RB로 진입하는 과정에서부터 전력손실을 감수하고 싸울 수 밖에 없었다.

▲ 한국시각으로 28일 새벽 1시부터 함대간 전면전이 시작됐다


N3PL은 스테이션을 되찾기 위해 14시간동안 계속해서 함대를 투입했지만 불리한 싸움이 길어질 뿐이었고, 결국 한국시각으로 28일 12시 총퇴각을 결정했다. N3PL지휘부는 상대적으로 저렴한(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일반 캐피털 함선들을 미끼로 던져 슈퍼캐피탈급 함선들의 워프시간을 버는 퇴각 작전을 내렸지만, 이마저도 CFC/러시아연합의 스파이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CFC/러시아연합의 스파이는 N3PL의 통신망에 잠입해 탈출지시를 받은 슈퍼캐피탈을 CFC/러시아연합에 전달했고, CFC/러시아연합의 수뇌부는 해당 전함의 워프를 방해하고 점사하여 처리했다. N3PLCFC/러시아연합측에 심어놓은 스파이들이 있었지만, 전장의 주도권이 완전히 CFC/러시아연합쪽에 넘어간 시점에서 정보는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이후 약 7시간동안 N3PL은 도망치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지는 전투를 계속했다. 그리고 28일 저녁, 일일점검 시간이 되어서야 간신히 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전쟁이 남긴 기록

이번 전쟁은 이브 온라인 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전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참여인원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역대 기록을 갈아치운 전투였다. 특히 종전 최고기록의 5배에 가까운 타이탄이 파괴되면서 손실액 부분에서는 당분간 깨기 힘든 기록이 세워졌다.

이브온라인의 제작사 CCP가 개발자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공식 기록에 의하면 55개의 동맹, 717개의 회사, 7548명의 캐릭터가 21시간동안 전투를 진행했다. 이브온라인은 하루 한번 점검이 진행되기 때문에 일일 플레이시간을 거의 꽉 채웠다고 봐도 무방하다.

▲ 화면의 붉은색/주황색 점 하나하나가 전부 플레이어 캐릭터이다


순수하게 제작공정에만 6주 이상 소요되고 파일럿 육성에 연 단위의 시간이 걸리는 타이탄 75대(N3PL연합 59대, CFC/러시아연합 16대)가 침몰했고, 그 외에 13대의 슈퍼캐리어, 370대의 드레드노트, 123대의 캐리어가 침몰했다.



CCP는 이번 전쟁으로 발생한 손실액을 11,000,000,000,000 ISK(게임머니)로 파악했다. 이브온라인의 월 이용권 'PLEX' 비율로 환산했을시 30만 달러~33만 달러, 한화로 3억2천300만 원~ 3억 5천6백만 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다. 여기에는 함선가치를 비롯해 수치화 할 수 있는 데이터만 포함됐기 때문에 실제 전쟁 당사자가 체감하는 액수는 더 클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발생한 11조 ISK의 피해액 중 8조 이상이 N3PL연합의 것이었다. N3PL연합은 세금 자동이체가 안된다면 알람이라도 맞춰두었어야 했다.



■ 뒷 이야기

이브온라인의 개발사 CCP는 이번 전투에서 큰 감명을 받았고,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B-R5RB지역에 'Titanomachy'라는 이름의 특별지역을 만들어 이번 전투의 잔해를 영구히 보존하기로 했다.

▲잔해라고 하지만 13km에서 18km에 이르는 타이탄의 크기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전투가 끝나고 몇일 후 CFC 멤버인 RAZOR 동맹 소유의 B-R5RB 스테이션에 PL의 화물선이 도킹해 묶여있던 자신들의 물자를 회수해갔고, 유저들은 커뮤니티를 통해 PL이 N3PL 연합을 버리는 대가로 CFC에게서 자신들의 물자를 돌려받는 딜을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주고 받았다.

▲좌측 첫줄에 위치한 PL의 피해액 그래프. 압도적인 길이를 자랑한다

이에대해 PL의 지주회사 Sniggerdly의 사장 Grath는 "우리는 절대 동맹을 배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회사는 이번에 1조5천억 ISK의 어마어마한 피해를 봤고, PL 전체의 손실은 4조5천억 ISK에 이른다. 우리는 이를 복구하기 위해 (우리의 고향인)북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라고 커뮤니티를 통해 밝히고 북부지역으로 쓸쓸히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