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이었다. 휴가를 맞아 여자친구와 알콩달콩 좋은 시간이라도 가져볼까 하고 신도림역을 지나는 중 역 한편에 수입 과자를 가득 쌓아놓고 판매하는 전문 매장을 보았다. 어린애 입맛은 버린 지 오래인지라 과자 자체에는 별 흥미가 일지 않았지만, 호기심은 동했다. 과다포장으로 말이 많은 요즘, 수입 과자는 대세니까.

무조건 하나에 천원. 넉넉히 다섯 봉지를 집어 들고 열어본 수입 과자는 확실히 알찼다. 포장재가 없어서 다소 파손된 부분도 있긴 했지만, 어차피 부서진 과자야 봉지째 입에 털어 넣으면 그만 아니던가. 가장 맘에 드는 건 고작 천원이지만, 돈값을 톡톡히 한다는 거다. 가끔 밤에 맥주라도 한 캔 할까 싶어 감자칩 봉투를 들었다가도 망설이곤 하는게 요즘이다.

대작 게임이라고 사실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작년부터 광고를 해일처럼 내보내던 '와치독'은 나오자마자 수그러들었다. 얼마 전 선을 보인 '번지'의 '데스티니'도 그럴싸한 포장에 비해 그 내용물이 썩 달지만은 않았다. 광고는 그럴싸했으나, 그 콘텐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편의점 한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과자랑 다를게 뭐가 있나.

'미들어스: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이하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도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크게 광고를 한 것도 아닌데다 걷잡을 수 없는 대작들의 침몰 때문에 그저 지나가는 게임 중 하나로만 보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출시와 동시에 치솟는 유저 평점과 매체 평가.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게 스팀에서 즉시구매를 해버린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 34기가바이트라는 용량의 봉투를 뜯자, 입구부터 가득 찬 내용물이 눈에 들어왔다.



◈ '압도적이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전투 연출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가 던진 가장 강렬한 인상이자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요소는 의외로 기본에 있었다. 3인칭 액션 게임은 엄청나게 많다. 그리고 다 나름의 흥밋거리를 가지고 있다. 캡콤의 '데빌메이크라이'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을, 코에이의 '진삼국무쌍'은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적병 속의 일기당천, 유비소프트의 '어쌔신크리드'는 암살단과 엮어가는 복잡하면서도 비중있는 스토리라인을 주력 무기로 삼고 있다.

그에 반해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가 보여주는 최고의 강점은 심플하기 그지없었다. '전투'. 3인칭 액션, 아니. 시점과 관계없이 '액션'게임이라면 무조건 포함하고 있는 그 '전투'가 미치도록 강렬했다.

▲ 비오는날 17대 1의 전설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유저에게 선택지를 던진다. 오크들이 우글거리는 요새를 어떤 식으로 헤쳐나갈 건지에 대한 질문이다. 잠행과 암살로 쉽게 풀어나가려는 유저도 있을 수 있고, 멀리서 활을 사용해 강력한 적들을 먼저 처리한 후 진행하는 유저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처럼 뒤도 안 보고 뛰어 나가 컨트롤에 모든 것을 맡기는 유저도 있을 테고.

멋진 점이라면 어떤 방향이든,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그만큼의 재미와 연출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일단 싸웠다 하면 17대 1은 기본. 옛 어르신이 전설같이 이야기하던 그 전투를 약간의 조작만 가미해주면 영화보다 더 멋지고, 살벌하고, 강렬하게 보여준다. 썽둥썽둥 날아가는 머리통은 그저 영화의 특수효과로만 보일 뿐 잔인해 보이지는 않는다.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의 전투는 유혈과 고어가 주는 자극적인 쾌락이 아닌, 호쾌함과 긴박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 말로 설명하는거보다 눈으로 보는게 더 나을 것 같다.(잔인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니 게임이 쉽사리 질리지 않았다. 오픈월드 게임의 경우 모든 수집요소를 모으고, 사이드퀘스트를 모두 깨야 게임을 접는 내 성격상 플레이 중 엄청나게 많은 전투 수는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 꼬리와도 같다. 그런데 지겹지가 않다. 전투 자체가 너무나도 재미있는데 지겨울 이유가 없었다.



◈ 나는 '반지의 제왕'을 모른다.

사실이다. 물론 진짜 반지의 제왕이 뭔지 모른다는 말은 아니지만, 엄청난 수의 톨키니스트와 반지의 제왕 팬들이 존재하는 것을 감안할 때 나는 반지의 제왕의 '반'도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고작해야 6권의 소설, 그리고 세 편의 영화 정도를 본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영문판에다가 배경 지식도 부족한 내가 과연 이 게임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100% 빠져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몰입되어 빠져들 수 있는 게임은 단순히 콘텐츠와 시스템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이성이 아닌 감성을 자극하는 드라마. 그게 필요했다.

▲ 응 그래 어떤 사람인지 알거같아. 좋은 사람이네.

다행스럽게도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나와 같은 '반지알못'에게도 멋진 스토리를 전달했다. '검은 문'을 지키던 곤도르의 레인저이자, 사우론의 군대에 의해 아내와 아들을 잃고, 자신마저 죽음에 반쯤 걸치게 된 주인공 '탈리온'과 그를 돕는 망령(이름의 경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기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망령의 과거를 드러내 주는 반지의 제왕 최고의 섹시 심볼 '골룸'이 함께 만들어 가는 드라마는 내 부족한 영어 실력과 배경지식에도 불구하고 멋진 경험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 근속 10년차 프레셔스 러버

무엇보다도 내가 이 게임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게임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컨셉이 '모르도르'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불필요한 마을이나 NPC는 싹 걷어낸 모르도르에 존재하는 거라곤 오크, 나, 그리고 야생 동물과 인간 노예들뿐이었다. 주적인 오크들은 '네메시스'라는 이름의 시스템 아래에서, 자기들끼리 수시로 싸우며 악착같이 윗 서열로 올라서려고 노력한다. 게다가 날 죽이기라도 하는 놈은 순식간에 잡병에서 대장급으로 계급 상승을 이룬다.

▲ 그 어떤 게임, 영화, 드라마에도 없었던 나 죽인 녀석이 승진하는 장면

한낯 잡병이던 오크 녀석이 날 세번이나 죽이고 베테랑 캡틴으로 승급하는 걸 보면서 내 마음도 찢어졌다. 게임을 하면서 이렇게 가상 인물에게 복수심이 타오른건 또 처음이었다. 물론 그놈도 끝이 좋지 않아 하급 전사한테 뒷통수를 맞고 세상을 뜨긴 했지만 말이다.



◈ 이쯤에서 없으면 허전하니 써보는 단점

단점을 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임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빠심을 억누르는 건 꽤 힘겨웠다. 굳이 첫 단점을 꼽자면, 유저 편의성에서 조금은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했다. 다른 것보다도 '난이도'문제는 조금 아쉬웠다.

어차피 나야 액션 게임을 수도 없이 플레이했고, 조금이라도 재밌다 하면 죄다 건드리고 보는 동네 왈패형 게이머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적절한 시간에 알맞는 버튼만 잘 눌러주면 무적의 용사 탈리온이 머리통을 죄다 수확해버린다. 문제는 이게 '시스템'의 측면에서 볼 때라는 것이다.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다대일 구도를 베이스로 깔고 들어간다.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1:1 대결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 와중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두고 어떤 때는 반격으로, 또 어떤 때는 회피로 피하다 보면 버튼이 꼬이기 마련이다.

▲ 으아 선생님 진정하세요!

액션치 게이머라면 플레이가 꺼려질 수도 있는 정도의 난이도다. 게다가 상기한 '네메시스' 시스템의 특성상 날 죽인 적은 계속해서 강해진다. 실제로 나 역시 각종 옵션을 주렁주렁 달고 온 장군님 오크를 상대하려니 1:1로도 버거웠다. 오만 공격에 다 면역이니 골치가 아플 수밖에. 잘 누르면 쉽지만, 잘 누르는 자체가 어려운 이들에게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다른 액션 게임에 비해 조금은 어려운 게임으로 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 아쉬운 점을 꼽자면 각종 고유명사로 얼룩진 영문 대사 정도를 꼽을까? 많은 이들이 볼륨 부족에 불만을 가졌지만, 8시간을 플레이한 시점에 진행도가 19%에 머무는 걸 보고 돈값은 충분히 하는 게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 '돈값' 하나는 확실하게 해줄 걸작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분명 걸작이다. 외신 평가와 유저 평가 모두 굉장히 우수한 데다, 실제 게임도 알차며 재미있다. 사실 '네메시스'라는 특이한 시스템을 제외하면 아주 기본적인 3인칭 액션 게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양산형 3인칭 액션 게임들과의 차이라면 그 '기본'을 극한까지 잘 다듬었다고 해야 할까?

웅장한 BGM과 전투 시 음악은 피터 잭슨 감독의 3부작 영화 못지않은 퀄리티를 보여준다. 직접 대놓고 욕했다간 맞을까 봐 노래로 돌려까는 골룸의 싱어송라이터 기질이 드러나는 걸 보고있으면 컷신 제작과 드라마 연출도 수준급이다.

기본이 되어야 할 전투는 최고의 강점이요, 너무 많지도, 찾기 어렵지도 않은 수집 요소는 부담스럽지 않고 좋다. 3인칭 액션 게임의 모범 답안을 보는 느낌이다. '누구에게나 추천해 줄 수 있는 액션 게임'. 내가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를 플레이하면서 느낀 감정을 한 문장로 표현한다면 그렇게 말할 것 같다.

11월, 이름만 대면 다 알 법한 대작들이 줄줄이 대중이라는 시험대 앞에 서게 된다. '파 크라이4',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 '월드오브워크래프트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이름만 들어도 게이머의 가슴이 벌렁거릴만한 타이틀들이다. 하지만 봉투는 뜯어봐야 알고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와치독과 데스티니도 출시 전까지는 얼마나 게이머들의 애간장을 태워 왔던가. 변변한 광고는 없었으나, 내용물로 승부 보는 게임. 쉐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한동안 끄떡없이 먹을 만한 수입 과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