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네가 태어나던 날... 온 로데론이 네 이름을 속삭였단다. "아서스".

내 아들아, 정의의 수호자로 자라는 네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아느냐.

명심하거라. 우리 가문은 늘 힘과 지혜로 왕국을 다스렸음을.
또한 네가, 그 강한 힘을 신중하게 사용하리라 믿고 있음을.

하지만 아들아, 진정한 승리란 백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란다.

기억하거라. 나의 시대가 끝나는 그날... 너는 왕이 되리니.




첫 추억은 '워크래프트3'였다. 첫 번째 휴먼 시나리오에서 영웅으로 등장한 아서스 메네실, 정의감에 불타 항상 선두에서 스컬지를 물리치는 왕자.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정의의 주인공을 곱게 놔둘 블리자드가 아니라는 것을.

멀쩡해 보이던 이 녀석이 스트라솔름에서 흥분한 채로 사고를 치더니, 북극 같은 동네까지 가서 웬 집채만한 검을 뽑아와서는, 개선식에서 "썩시딩 유 퐈더"를 읖조리는 그 순간까지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어어 이거 뭐야 이러지마 너 왜 그래" 라며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로데론 왕국이 스컬지들의 놀이동산이 되더니 달라란 등 주요 거점들은 아주 박살이 나고, 결국 그는 리치왕의 투구를 쓰고 얼어붙은 왕좌에 앉는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분기점이었다. 아제로스 세계 역사에서, '워크래프트3' 이후 시나리오의 중심은 아서스였다. 가장 많은 사건의 싵타래가 그로부터 풀려나갔고, WoW에서 언급되는 스토리 중 상당수에 그가 얽혀 있었다. 시나리오에서 느낄 수 있는 내면 갈등 역시 가장 복잡했다. 아서스는 역대 블리자드 캐릭터 중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어느새 6년 전 일이다. 와우의 두 번째 확장팩 '리치왕의 분노'는 이 아서스라는 희대의 패륜아가 최후를 맞는 장면까지를 그려냈다. 당연히 연출과 스토리텔링 역량이 최대한 여기에 집중되어야 했다. 큰 기대와 우려 속에서 오픈했던 이 확장팩은 우리 기억에 어떤 순간들을 남겼을까.

WoW 10주년 6부작 기획 제3부, 대 서사시의 한 축이 종국을 맞이한 당시를 되돌아봤다.

"오게 두어라... 서리한이 굶주렸다"





위상변화의 힘으로 구현한 시나리오, 노스렌드에 찾아온 죽음의 기사


주무대가 어디일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얼음으로 뒤덮인 북녘의 땅, 노스렌드(Northrend)다. 스컬지의 본거지이자 리치왕이 앉은 곳. 수많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장소였다. 노스렌드로 날아간 대도시 달라란을 거점으로 삼아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대 스컬지 원정이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친구도 찾아왔다. 기존 55레벨 이상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야 생성이 가능한 신규 "영웅" 직업 '죽음의 기사'였다. PvP 파트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죽음의 기사는 이름에 걸맞는 포스와 신규 직업에 걸맞는 강력함으로 확장팩 내내 입에 오르내렸다.

▲ 노스렌드 전체 지도, 시작 지역이 두 곳이었다


위상변화는 리치왕의 분노를 빛나게 해준, 가장 중요한 시스템이었다. 개별 플레이어는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에 따라 같은 장소라도 전혀 다른 환경을 맞이할 수 있게 됐다. 적으로 가득한 땅이 점령 퀘스트를 완료하고 마을로 변하거나, 시네마틱 영상이 펼쳐진 후 전장이 폐허로 변하는 등.

위상변화라는 키 카드가 생기면서 노스렌드 레벨업 과정은 굉장히 다이나믹해졌다. 퀘스트 진행에 따라 스토리가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고, 특정 퀘스트에서는 리치왕이나 티탄의 비밀에 얽힌 속사정을 더 내밀히 살펴보기도 했다. 얼음왕관 공략 과정도 이 위상변화에 의해 한 편의 영화처럼 구성되었다. 퀘스트 진행이 가장 재미있었던 확장팩은 단연 리치왕의 분노 아니었을까.

라이트 유저를 위한 배려는 특히 많이 생겼다. 중반부터 생긴 던전 찾기 시스템은 일일히 파티를 모집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앴고, 일반과 하드로 나뉘어 진행된 레이드는 일반 난이도를 아주 쉽게 가져가면서 진입장벽을 낮췄다. 퀘스트 위치 추적 등 애드온에서 지원하던 기능을 블리자드가 마음을 열고 직접 수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 결과, 불타는 성전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정규 공격대들은 눈에 띄게 수가 줄어들었다. 정공 대신 유행한 것은 '고정 막공'이었다. 공대별로 차이가 있지만 보통은 명망 있는 공대장이 어느 정도의 비정규 공대원들을 체크해놓고, 매주 정해진 시간에 그 멤버를 우선 초대한 뒤 남은 자리를 공개 모집하는 방식이었다. 그 정도면 어렵지 않게 레이드를 공략할 수 있었고, 골팟이 완전히 정착된 시기라 소위 말하는 '손님'을 받기도 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탱킹 혹은 딜링을 수행했던 '죽음의 기사', PvP의 강자였다





쉬운 레이드의 시작 '낙스라마스', 비운의 명품 레이드 '울두아르'


낙스라마스는 과거 오리지널에서 마지막 레이드로 등장했고, 무시무시한 난이도로 악명 높았던 던전이다. 과거 레이드의 첫 리메이크인 셈. 낙스라마스가 돌아온다는 정보가 나왔을 때 대부분 반가워 하면서, "처음부터 얼마나 공대들의 멘탈을 파괴할 것인가" 하는 걱정도 돌았다.

하지만 웬걸, 뚜껑을 열자 필요 없는 우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렵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쉬웠다. 불타는 성전 첫 레이드인 카라잔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템 파밍이 순조로우니 레이드를 뛰는 입장에서야 감사했지만. 이전까지 시간이나 실력이 부족해 손가락 빨면서 레이드 던전을 지켜보던 라이트 유저들은 편하게 상위 콘텐츠에 진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함축했다고 봐도 되겠다.

▲ 우주 최강의 존재 '켈투 앞 무득 성기사'도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뒤에 나온 '울두아르'는 참, 할 말이 많다. 개인적으로 WoW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레이드를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 울두아르가 무조건 들어간다. 골수 유저들 사이에서도 아직까지 회자되는 명품 던전이었다. 적당히 까다로운 난이도, 다채롭고 참신한 패턴, 그리고 맵 디자인과 스토리 구성까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품질로 극찬을 받았다.

탐험가와 도굴꾼 사이 그 어딘가에서 활동하던 브란 브론즈비어드가 결국 티탄의 비밀 한 조각을 발견하고, 울두아르 지하 중심부에 고대 신 요그사론이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면서 울두아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음으로 하드 모드가 따로 생긴 곳이기도 하다.

총 14개 보스로 방대한 스케일을 가진 동시에 마지막 보스 요그사론과 숨겨진 보스 알갈론은 꽤나 큰 벽이었다. 물론, 일반 난이도의 경우 최상위 공격대는 어렵지 않게 공략해나갔다. 오픈 이틀 만에 쿤겐이 이끄는 엔시디아가 요그사론 노멀 난이도를 쓰러뜨렸다. 심지어 제대로 플레이한 시간은 불과 8시간 정도였다고. 한국에서도 패치 하루가 지나 노르간논 서버의 팀 에볼루션이 첫 킬을 기록했다.

▲ 아름다운 울두아르의 하늘


하드로 불리는 도전 모드에 진입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래 맞아, 이게 원래 레이드였지"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 미미론 하드는 악랄한 패턴과 대미지로 인해 '미미몬드'라는 애칭(혐칭?)이 생길 정도였고, 요그사론 도전 모드에 속하는 0수호자 플레이는 대만의 STARS 공대가 월드 퍼스트 킬을 기록하기까지 무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난공불락이었다.

정공 아닌 일반 공대는 요그사론 일반 모드도 한참 동안 지옥의 난이도였다. "아놔, 구름 또 누가 밟음?" 이 공식 대사로 자리잡았으니. 이후 구름 건드린 사람의 이름이 표시되면서 개념 패치라는 찬사를 듣는 일도 있었다. 알갈론 역시 즉사 패턴과 시간 제한 덕에 상당히 어려웠는데, 배경과 이펙트 연출이 워낙에 아름다운 보스였다 보니 평가는 매우 좋았다.

▲ 알갈론을 잡으면 얻는 칭호 '별소환사'와 '은하수 방랑자'도 어감이 참 예뻤다


이렇게 파고들 곳이 많은 레이드였지만, 동시에 비운의 레이드이기도 했다. 아래 언급할 다음 던전이 비교적 빨리 나왔고, 게다가 WoW 사상 초유의 최저 난이도를 자랑했기 때문. 낙스라마스 파밍만 마친 공격대원이 다수 있어도 어렵지 않게 클리어가 되다 보니 굳이 길고 어려운 울두아르를 거칠 필요가 없어졌다.

라이트 유저의 진입을 쉽게 유지하려는 확장팩 방침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타이밍이었지만, 기껏 나온 명품 레이드를 즐길 기간이 길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울두아르는 언젠가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던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 처음 보면 "오오 멋져 나도 알갈론 잡을래" -> 나중에는 "뭔 하늘에 구멍 뚫렸냐"





사장님 열 분 모십니다 '십자군의 시험장', 리치왕의 최후 '얼음왕관 성채'


리치왕의 분노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아니었을까. 골수 레이드 유저들은 "이게 레이드야?" 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고, 라이트 유저들에게는 둘도 없는 오아시스였던 곳. 십자군의 시험장은 전에 없었던 가볍고 쉬운 레이드를 표방하며 당시 최상위 아이템을 쏟아내었다.

여기서부터 일반과 하드 난이도를 미리 선택해 입장할 수 있었다. 편리하긴 한데, 10인과 25인도 개별 입장되다 보니 1주 동안 총 4회를 마치 노동하듯 똑같이 돌아야 한다는 불만도 함께 나왔다.

▲ 이곳을 몇 번 입장했을까 생각하다가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레이드 난이도의 급락으로 인한 주사위팟(주팟)의 완전 실종이었다. 이전에도 주류는 골팟이었지만, 낙스라마스에서 '켈투 앞 무득 기사'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던전 초반에는 주사위로 아이템을 분배하는 방식이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 파밍이 갖춰지면 그때부터 손님을 모시고 골팟을 진행하는 공격대가 늘어나곤 했다.

하지만 시작과 함께 손님을 받아도 될 정도로 레이드가 쉬워지자, 주팟은 사실상 전멸하고 대부분의 막공은 골팟만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굳혀졌다. 골팟이 당연해진 환경에서 손님으로 참석해 장비를 맞추기 아주 쉬워졌고, 얼음왕관 성채가 나온 뒤에는 손님 숫자가 정식 공격대원보다 많아지는 일도 발생했다.

전세계적으로 와우 접속자 수가 절정을 달리던 시기였다. 그만큼 대중적 만족도는 높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레이드 성취감이 줄어들고 콘텐츠 소모가 빨라지면서 '레이드가 이렇게 가는 것이 맞는가'라는 논쟁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딱 다섯 개 보스였고, 알아서 하나씩 차례대로 나와주는 백화점 방식이었으니 문화충격일 만도 했다.

하드 모드는 꽤 즐길 만한 난이도였다. 특히 마지막 아눕아락 25인 하드는 예전 레이드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까다로웠다. 아이템이 몇십 단계 좋아진 지금 들어가도 클리어가 쉽지 않다는 점이 재미있다. 마지막 페이즈에서 생명력을 퍼센트로 깎아 자기 체력을 채우기 때문이다.

▲ 불타는 군단의 농부군주 자락서스 "벼에서 쌀을!"


그리고 맞이한 3.3 패치 '리치왕의 몰락'. 리치왕과 스컬지의 본거지 '얼음왕관 성채'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드디어 오랫동안 이어진 워크래프트 스토리의 한 축이 클라이막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함께 오픈한 인스턴스 던전 '투영의 전당'이었다. 리치왕과 제이나(호드는 실바나스)의 대립을 보여주면서, 옆길을 통해 리치왕으로부터 탈출하는 시나리오로 연결됐다. 5인 던전 치고 까다로운데다가 탈출 중에 뒤에서 저벅저벅 걸어오는 리치왕의 풍모가 워낙 살벌해서 깊은 인상이 남아 있다.

▲ 길 뚫기는 지지부진한데... 어우 뒤에 저거 뭐야 무서워


얼음왕관 성채에서는 일반과 하드의 모토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반은 누구나 어렵지 않을 만큼, 대신 하드는 본격적으로. 리치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보스들은 일반 모드에서 쉽게 쓰러졌다. 대신 1지구 이후 보스들의 하드 모드는 만만치 않았다.

각종 역발상 보스도 기억이 난다. 공격이 아니라 힐을 해줘야 클리어할 수 있는 발리스리아 드림워커, 빠르게 동료를 물어 흡혈귀로 만들어야 하는 다단계식 보스 라나텔 등. 막공의 벽이었던 퓨트리사이드 교수와 신드라고사 역시 정신없는 택틱을 자랑했다.

리치왕 하드 모드에 이르러서, 레이드 보스의 체력이 최초로 1억을 넘게 됐다. 한 번 트라이에 10분 이상이 소모되는 장기전이기도 했다. 마지막 페이즈에서 파멸을 피하고 사악한 영혼(새우)을 잡아내며 내부의 방을 왔다갔다하면서 무빙과 산개를 반복하는 이 패턴은 지금 봐도 현기증 나는 수준. 밤을 샌 도전 끝에 결국 리치왕 체력 10%를 봤을 때 함께 지른 환호성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막타는 티리온이.

레이드가 쉬워진 리치왕의 분노라지만, 리치왕 하드 모드는 그 누구도 멸시하지 못할 난이도였다. 매달 5%씩 생긴 버프가 없던 시절 이야기다. 결국 한 달을 훌쩍 넘겨서야 3월 27일 유럽의 Paragon 공대가 세계 첫 킬에 성공했고, 나머지 공대는 버프가 10%나 쌓이고 나서야 하나둘 리치왕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한국 첫 킬은 역시 팀 에볼루션이었고, 동시에 세계 4위 킬이었다.

"아버지! 이제... 끝난 겁니까?"
"그렇단다, 아들아. 영원한 왕은 없는 법이지"


▲ 얼음왕관 요새 전경


자잘한 레이드에서도 여러가지 말이 많았다. '영원의 눈'에서 단일 보스로 등장하는 푸른용군단의 위상 말리고스도 나름 화제가 되었다. 명색이 5대 위상 중 하나인데 무슨 인던 보스처럼 허무하게 쓰러지니 아쉬움을 표하는 유저도 많았고. 어쩌면 다시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최초의 40인 레이드였던 '오닉시아의 둥지'는 리치왕의 분노 중반에 리메이크로 돌아왔다. 오리지널 시기에 비하면 조금씩 패턴이 쉬워진 채라서, 화염저항 세트를 굳이 갖추지 않아도 되었다. 오닉시아는 레이드의 기본 패턴을 보여주면서 알찬 장비들을 선물했기 때문에, 레이드에 막 입문한 신규 유저들이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도록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그밖에 3비룡 업적을 위해 한번씩 거쳐갔던 흑요석 성소의 살타리온이나, 뒤에 다시 언급될 겨울손아귀 호수의 아카본 석실 던전도 빠질 수 없는 장소였다.

▲ 오닉시아 하면 빠질 수 없는 추억의 명대사





흑마 무쌍의 시대는 가고... '죽기 & 징기'로 시작해 '법느님'으로 마무리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흑마법사의 황금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리치왕의 분노 들어 흑마의 시대는 저물었고, 대신 신규 직업인 죽음의 기사가 PvP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죽음의 기사와 더불어 최상위 자리를 누린 직업은 성기사, 그 중에서도 징벌 기사였다. 불타는 성전 막바지 패치부터 전조가 나타났다. 피의 문장과 연계된 딜링도 상당히 아팠고, 생존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안 죽었다. 성기사의 그 질김을 표현한 모종의 별명이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확장팩마다 PvP에서 나타나는 성향이 있다. 전반부는 밀리, 후반부는 캐스터. 장비 수준이 올라갈수록 캐스터들의 체력과 공격력 성장 효율이 더 높기 때문. 리치왕의 분노에서는 그 특성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죽기-징기 듀오가 밸런스 조정으로 힘을 잃어가자, 원거리 캐릭터들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그 중심에는 '법느님'이 있었다.

▲ 법느님 10인 하드 탱딜힐 모십니다. 도냥풀 (2/10)
(출처: 통합 전장 게시판 '페이린시아' 님)


오죽하면 이때부터 이런 가설이 나왔을까. "블리자드 사장 따님이 요즘 마법사를 플레이하는 것이 아닐까". 냉기 법사는 생존이나 메즈나 딜이나 부족할 게 없는 완전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전 법사 역시 아이템 레벨이 올라갈수록 마나 걱정이 사라지면서 무시무시한 폭딜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레이드는 물론이고 전장에 참여하더라도 존엄을 뽐냈다. 기자 역시 본캐가 법사였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안정감이었다.

마법사 유저들에게는 심각한 부작용도 있었다. 사기급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난이도도 높지 않다 보니 인구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레이드에서는 가장 천민 직업이 된 것. 파티찾기글이 올라오마자자 꽉 차는 도적들이 빠르게 귓을 보내려다가 오타가 나며 생긴 '돚거'에 이어 '벗바'가 탄생한 시대였다.

후반은 역시 캐스터의 시대였다. 대부분 상향을 받으면서 빛을 본 경우였다. 마법사 외에도 다양한 주문들이 밀리 직업들을 괴롭혔다. 암흑 사제 역시 우습게 보고 덤볐다가는 헤어나올 수 없는 빨대에 고통받아야 했고, 드루이드나 주술사 등 각종 하이브리드 딜러들이 투기장과 전장에서 맹활약했다. 전사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돌이켜보면, 불타는 성전 시절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밸런스가 자리잡는 성향을 보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직업별로 유불리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상성은 존재했고, 전사는... 아무튼 여러 숙제도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다수 직업이 장비와 컨트롤에 따라 활약할 여지가 존재했다는 점에서는 비교적 나아진 밸런스라고 평가해도 될 듯하다. 딱히 기자의 본캐가 법사라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다.




"호드님, 아카본을... 가고 싶어요" 겨울손아귀 호수


▲ 광물캐러 왔다가 싸움하고 가지요


리치왕의 분노에서 '정복의 섬'과 '고대의 해안'이라는 두 전장을 선보였지만, 인기 전장인 전쟁노래 협곡이나 아라시 분지의 아성을를 뛰어넘지 못했다. 대신 새로운 개념의 필드 공성전장 '겨울손아귀 호수'가 인기를 끌었다. 이전 버전에서도 필드 전장은 존재했지만, 이 '겨손'은 별다른 퀘스트 라인 없이 오직 전장만을 위해 존재하는 필드였다. 접근성이 좋았고, 보상 역시 시간 대비 짭짤했다.

일정 시간 단위로 두 진영이 공격과 수비로 나뉘어서, 공격측이 제한시간 내에 본거지를 점령하면 승리하면서 지역을 차지하는 방식. 명예 점수 말고도 플레이어들이 겨손에 매달렸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지역을 소유한 진영만 들어갈 수 있었던 '아카본 석실' 때문이었다. 수준급의 PvE용과 PvP용 장비를 같이 드랍하는 보스들이 공대를 맞이했다. 레이드를 즐기든, 전장과 투기장을 즐기든 꼭 차지해야 하는 곳이었다.

인구 비율이 무너진 서버를 위해 인구수 적은 진영의 캐릭터에게 단계별로 버프를 주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중반기 이후 버프를 최대한 받고 고급 장비를 갖춘 비전 '법느님'의 경우 비전 작렬 한 방에 적 하나씩을 뒤틀린 황천으로 보내버리는 무쌍 시나리오가 펼쳐지기도 했다.

접속자 수가 절정을 달리던 시기에는 '겨손 렉'이 심해지면서 원성이 자자했다. '달라란 렉'과 더불어 노스렌드 양대 보스 중 하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다양한 재료를 채집할 수 있어 비전투 시간에도 소수 싸움이 자주 벌어지는 곳이었다.




"하이브리드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 평판크래프트에 이은 업적크래프트의 시작


3.1 패치에서 이중 특성이 처음 탄생했고, 공대를 모집하는 과정이 더 유연해졌다. 하이브리드 직종들이 더욱 대접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중 특성이 생긴 초반에는 공격대 내에서 특성 스왑을 강요하는 등의 일로 종종 분란이 생기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

불타는 성전 후반부터 추가된 업적 시스템은 리치왕의 분노 들어 수많은 유저들을 업적 도전의 늪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다른 기존 콘텐츠를 다 제쳐두고 업적 점수를 위해 달리는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보일 정도. 블리자드 특유의 현지화 센스가 발휘된 주옥 같은 업적명들도 이 시기부터 볼 수 있었다.

인벤에서는 불타는 성전 때에 이어 '2차 네임드 토너먼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전 대회의 결점을 보완하고 더 구체적으로 룰을 확립하면서 훨씬 좋은 평가를 받은 행사였다. 초청과 투표를 통해 총 20인의 선수가 참여했고, 결선까지 조별 리그로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4강 결선에는 천상계 3인방인 마법사, 성기사, 죽음의 기사만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 1위결정전으로 법법전이 벌어졌고, 냉기 법사인 Minegi 선수와 Mingz 선수가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다.




라이트 유저의 르네상스, 아서스 스토리텔링의 정점


▲ 히어로즈 승률 최상위권 영웅님에게 6년째 닥치라고 구박하는 패기


리치왕의 분노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편해졌다'로 요약된다. 인던 정도는 클릭 한 번으로 찾아갈 수 있게 됐고, 레이드 일반 모드 대부분은 기본 공략만 읽어본다면 누구나 편하게 갈 수 있을 정도로 쉬워졌다. 이런 성향은 이후 나올 대격변에서도 더 확대되었다. 그만큼 게임 플레이 시간과 숙련도에 따른 격차가 많이 줄었다. 양날의 검이기도 하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확장팩인 것은 확실하다.

난이도가 떨어지면서 우려되었던 빠른 콘텐츠 소모를, 블리자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스토리텔링으로 풀었다. 리치왕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얽힌 시나리오가 위상변화라는 찰떡궁합을 만나 큰 몰입도로 다가왔다. 옛 스트라솔름 등에서 과거 사연을 살펴보며 아서스의 스토리를 느낄 수 있었고, 분노의 관문 앙그라타르에서의 시네마틱이나 투영의 전당 던전은 연출의 백미라고 할 만했다.

티탄의 유적, 그리고 또 하나의 깊은 흑막인 고대 신 요그사론에 얽힌 시나리오도 훌륭하게 풀려나갔다. 리치왕만큼이나 깊은 역사이기 때문에 적당한 비중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블리자드의 스토리 역사에서 리치왕의 분노는 그래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아서스의 극적인 몰락은 와우저들에게 큰 성취감을 주는 동시에, 허탈함도 함께 안겼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제1막이 종료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이 시기에 WoW를 즐긴 사람이라면, '리치왕'과 '아서스'라는 이름은 아주 오래도록 기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리치왕은 쓰러졌고, 일리단에 이어 '어머니 리치왕만 잡고 효도할게요'라던 유저들은 과연 효심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 순간부터 아제로스의 지축은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 주 목요일, 이 대륙을 휩쓴 '대격변'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마련된다.

▲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