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해 기대에 미치는 게임성이라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기대감이 너무 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레디 앳 던' 스튜디오가 제작한 '디오더:1886'. 한때 이 게임 때문에 PS4를 사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전에 다른 게임 때문에 사고 말았지만 말이다.

안개가 가득한 음울한 런던, 양지의 뒷편에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비밀결사, 그리고 19세기를 벗어난 오버테크놀로지의 무기와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산업시대의 요원들까지, 디오더:1886은 게이머를 매혹하는 각종 소재를 주렁주렁 단 채 소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흐르는 물보다 더 유려한 그래픽과 굉장히 자연스러운 인물들의 움직임이었다. 그 부분만은 분명 지금껏 등장했던 어떤 게임들보다도 훌륭했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예로 들자면,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훌륭한 시네마틱 영상 그 느낌 그대로 게임이 이어진다 해야할까? 하여간 영상으로 살펴본 디오더:1886은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모습을 드러낸 직후, 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영상의 내용이 거짓은 아니었다.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캐릭터 모션, 그리고 흔히 컷신이라 말하는 이벤트 신과 단 1초의 유격도 없이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게임 플레이는 내가 영상에서 보았던 그대로였다.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점이었다.

화면 상하단을 통으로 잘라낸 래터박스 덕에 풍기는 영화같은 화면감, 영화같은 연출, 영화같은 카메라 구도, 영화같은... 게임 플레이도 그냥 영화같았다. 3인칭 슈팅 게임의 모범답안으로 불리는 '기어즈 오브 워'의 제작자인 클리프 블레진스키는 디오더:1886을 두고 '할리우드에 대한 게임업계가 숨겨온 열등감이 폭발해버린 작품'이라고 평했다. 흔히들 농담삼아 던지곤 하는 '열폭'이다.

▲ '레디 앳 던' 스튜디오 수석 인게임 애니메이터 '아담 브라이언'

GDC2015에서 '디오더:1886'에 관한 강연이 개설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사실 그리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심하게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디오더:1886'에 대한 게이머들의 평가는 '빛 좋은 개살구'다. 겉으론 번지르르해도 입에 넣으면 떫은 맛이 가득한 개살구 말이다.

하지만 강연의 요약을 읽은 후, 난 강연을 들어가 보기로 결심했다. 강연의 주제가 시네마틱과 모션 연출에 관련된 내용이다. '빛 좋은 개살구'에서 오로지 '빛'에 대한 이야기만을 한다고 하니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시네마틱,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의 연결'. 강단에는 두 명의 강연자가 올라왔다. '레디 앳 던' 스튜디오의 수석 인게임 애니메이터인 '아담 브라이언', 그리고 수석 시네마틱 애니메이터인 '다니엘 사이프스'. 누가 뭐라 해도 두 사람은 최고다. 비록 게임은 최고가 아니었을망정, 저 두 사람이 맡은 부분 만큼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으니까.

▲ 수석 시네마틱 애니메이터 '다니엘 사이프스'




■ '레디 앳 던'은 어떤 게임을 원했는가

일단 생각해 볼 것은 '레디 앳 던' 스튜디오가 플레이어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고자 했는가이다. 인게임 애니메이터인 아담은 간단한 문장으로 '디오더:1886'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Filmic Realisic' 영화같은 사실감이다. 100% 이해하기엔 솔직히 무리였다. '디오더:1886'이라는 작품만을 평가할 때, 아담이 이야기한 '영화와 같은 사실감'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만점을 줄 수도 있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어느 게임 개발사도, 종합 평가에서의 혹평을 감수하고 한 부분만을 적극적으로 강화하려 하지 않는다. '디오더:1886'과 비슷한 평가를 받은 게임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크라이텍이 제작한 '라이즈: 로마의 아들(이하 라이즈)'. XBOX ONE의 런칭 타이틀이자, 크라이텍의 명성을 다시 한 번 알린 작품이다. 라이즈에서 주인공은 아주 잘 싸우는 로마의 군인이다. 당시 어떤 게임보다 깔끔하고 멋진 그래픽, 그리고 박력을 보여주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5시간에 걸쳐 동일한 칼질을 반복하는 것 외에 라이즈가 가진 메리트는 단 하나도 없었다.

'레디 앳 던' 역시 그런 결과를 원할 리가 없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진짜 게임 제작에 앞서 논의되었던 이야기인지, 혹은 혹평을 받은 후 강단에 서 자신들의 실수를 환기하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낸 타이틀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강연이 의미가 있는 것은, 적어도 그 분야에서만큼은 그들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킹스맨'이 '오락 영화'라는 한정적 분야에서만큼은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었고,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이 '공포'의 분위기에 대한 구현만큼은 최고로 해놓은 것 처럼 말이다.


■ '애니메이션'을 말하다

이어 아담은 '디오더:1886'만의 무기 주 하나인 '인게임 애니메이션'에 대한 강연을 시작했다. 게임 상에서 진행되는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주변 오브젝트들의 움직임은 지금껏 보아온 게임 중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릭터의 걸음걸이, 홀스터에 무기를 수납하는 과정, 오브젝트를 꼼꼼하게 살펴볼 때의 손목 스냅까지, 개발진은 최고의 노력을 이 하나하나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이 모든 노력은 바로 '리얼리즘'을 향하고 있었다.


최근 3D게임에서 '모션 캡쳐'는 이제 뗄레야 뗄 수 없는 제작 방법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무리 정교하게 캐릭터의 움직임을 다듬는다 해도, 실제 사람의 움직임은 따라갈 수 없다. 때문에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모션 캡쳐'는 이제 게임에서도 전반적 영역에 거쳐 사용되곤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비욘드: 투 소울즈'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유명한 영화 배우인 '윌렘 데포'와 '엘렌 페이지'가 직접 모션 캡쳐에 참여했고,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디오더:1886' 역시 굉장한 양의 모션 캡쳐를 통해 실제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냈다. 하지만 모션 캡쳐로는 게임의 모든 부분을 만들어낼 수 없다. '디오더: 1885'은 게임이고, 결국 플레이어의 조작에 의해 게임의 진행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포인트 앤 클릭과 같은 장르가 아닌, 3인칭 슈터에서 플레이어가 만들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은 플레이어가 조작할 때의 움직임 또한 시네마틱과 같은 리얼리즘을 보여주길 원했다.

그 때문에 두 가지 부분에서 조절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아무 조작도 하지 않는. 이른바 스틱 중립 상태에서 대기하는 캐릭터의 움직임이다. 보통 이럴 때 대부분의 애니메이터들은 몇몇 가지 특정 동작을 제작해, 이를 무작위적으로 반복하게끔 한다. 예를 들어 플레이어의 조작을 받지 않고 대기하는 캐릭터가, 주기적으로 옆구리를 긁거나, 코를 파거나 주변을 둘러보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디오더:1886'은 이 유휴 상태를 단 하나의 긴 호흡으로 만들어냈다. 'One Long idle'. '디오더:1886'의 캐릭터는 유휴 상태 도중 같은 동작을 무한히 반복하지 않는다. 단지 진짜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다 지치면 어깨도 한번 풀어 주고 기지개도 켜면서 긴 호흡의 동작을 이어간다.


다른 한 가지 부분은 '스타트 모션', 그리고 '정지 모션'의 극대화다. 예를 들면 가장 흔하면서 자주 쓰이는 '달리기'에 대한 연출을 제작한다고 한다면, 동작의 구조는 '스타트 모션', '왼발', '오른발', '정지'의 구분을 띄게 된다. 물론 어느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달리는 중에는 같은 모션을 반복해야 한다. 이건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왼발, 오른발 순이 아닌 랜덤으로 뛰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나.

그 때 가장 현실감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가 바로 '스타트 모션', 그리고 '정지 모션'이다. 아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중 2편과 3편을 모두 즐겨본 유저라면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두 게임은 엔진이 바뀌면서 캐릭터의 모델링과 애니메이션이 상당 부분 변화했다. 또한 '달리기'에 대한 감상은 게임 중 엄청나게 자주, 그리고 귀찮을 정도로 많이 할 수 있다. 로딩 중 열리는 백색 공간, 이른바 '화이트 룸'안에서 할 짓이라곤 그저 뛰는 것 밖에 없으니 말이다. 3편의 러닝 모션이 2편에 비해 상당히 부드러운 이유는, 그만큼 동작을 시작할 때와 멈출 때의 과정을 세밀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 인게임 그리고 시네마틱. '심리스'로 이어지다.

이어 '디오더:1886'의 가장 큰 특장점 중 하나에 대한 강연이 이어졌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게임 그래픽과 컷신의 연계. 내가 게임 중 가장 놀라웠던 요소고, 영상을 보면서 게임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이유다. 하나는 정확히 알 것 같다. '디오더:1886'의 인게임 그래픽 자체가, 컷신으로 바로 돌려도 될 정도로 강력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동일한 방법의 모델과 애니메이션을 사용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자잘하다'라고 생각될 정도의 기법들이 꼭꼭 숨어있었다.


예를 들자면, '홀스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여기서 '홀스터'는 권총집을 말할 때 쓰는 그 무기 수납 공간을 말한다. '디오더:1886'에는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러 종의 무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보통 그 무기는 등에 달고 다니게 되는데, 사실 '디오더:1886' 수준으로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게임에서, 이는 상당히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컷신'에서는 '인게임'에서 구현하기 힘든 복잡한 연출이 다수 들어간다. 예를 들어 능숙한 무술로 적을 제압한다던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공중제비를 돈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모든 과정을 플레이어가 들 수 있는 모든 무기에 적용해 제작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개발진은 약간의 트릭을 준비했다. 그들이 보여준 영상에서, 나는 약 10편에 가까운, 복잡한 동작을 구현해낸 컷신을 보았지만, 그 어떤 장면에서도 캐릭터의 '등'을 명확하게 볼 수 없었다. 심하게 다양화될 수 있는 변수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카메라의 이동'을 선택한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 수 있다. 바로 '시점'의 통일화다. 게임 안에서, 카메라는 보통 캐릭터의 오른쪽 어깨 위에 존재한다. 이른바 '숄더뷰'의 구도다. 이 숄더뷰 구도는 '슈팅'장르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꾸며낼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슈팅에 대한 편의성, 그리고 박진감을 동시에 잡아낼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단점이라면, 게임에 대한 몰입도가 1인칭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흥미로운 점은, '디오더:1886'에서 사용되는 시네마틱 컷신의 도입부, 그리고 인게임으로 전환되는 부분이다. 개발진은 의도적으로 인게임과 컷신이 이어지는 두 교접부를 인게임 시점과 동일한 '숄더뷰'로 만들어 두었다. 영상과 플레이 사이에 '관절'을 만들어둔 것이다. 덕분에 '디오더:1886'은 다른 3D게임들과 다른, 자신만의 무기를 벼려내는데 성공했다. 이른바 애니메이션의 '심리스'를 이뤄낸 것이다.




사실 강연의 내용을 100%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임 매체의 기자는 사회적으로 '게이머'와 '개발자'의 중간에 위치해야 하지만, 아직 개발 분야의 내공이 부족한 나로서는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용어가 난무하는 이 강연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영어다. 만성 영어울렁증의 보유자인 나로서 전문용어가 다수 나오는 기술강연은 고통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이 강연을 듣고 내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미리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디오더:1886'의 매력을 이미 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총점을 매기기는 쉽지 않지만, 한정된 분야라 해도 세계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게이머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감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디오더:1886' 기사를 마무리하는 지금에 와서 다시 한 번 느낌을 되새기자면, 만족스러운 녀석은 아니었다. 마치 살짝 눅눅한 나초 칩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앞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이유는, 나초 칩에 찍은 치즈 소스가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소스기 때문일 거다. '레디 앳 던'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 발을 디딘 잠재력 넘치는 주자다. 그들이 앞으로 또 만들어낼 작품에서, '디오더:1886'의 노하우, 그리고 지금보다 나아질 게임 그 자체를 기대해 보려 한다. 어찌됐건, 다음에 출시될 그들의 작품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기엔 충분할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