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화려보다 익숙한 누추가 아직은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뿅뿅거리는 8비트 미디음과 스케일 라인이 가득한 브라운관이 따뜻하다고 믿는다.

얼마 전이었다. 네일샵에서 오가는 시시한 수다에 지쳐갈 때쯤 귀가 뜨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글쎄요, 요즘 세상에 오락실을 한데요." 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오락실 복원 프로젝트' 이야기였다. 그것도 서촌에서 말이다.

서촌이라 하면 체부동, 누하동, 통인동, 옥인동 등 경복궁 서쪽에 있는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골목길과 한옥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함께 기름 떡볶이로 유명한 통인 시장, 분위기 좋은 카페, 아기자기한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로드샵이 산재해 있어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오락실이라니? 요즘은 학교 앞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오락실이라니. 이거다 싶었다. 왜 오락실인지 왜 서촌인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펀딩 프로젝트를 올린 설재우를 직접 찾아갔다. 알고 보니 5년 전 블로그 방명록으로 대화를 나눈 사이였다. 어쩐지 익숙하다 싶었다.

▲ '용오락실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설재우



■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 "난 서촌을 사랑하는 토박이니까요. "

소위 '핫 플레이스(명소)'로 서촌이 관심을 끌고 있지만, 사실 서촌은 서울에서도 가장 오래된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동네다. 서촌이 떠오르면서 한옥이 밀집된 지역 특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들어와 분위기 좋은 카페와 아기자기한 로드샵들이 들어섰다. 자본이 침투하자 30~40년씩 살아온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다.

하지만 서촌 토박이인 설재우는 떠나는 대신 서촌에 관한 책, 지역 잡지를 만들며 지역과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을 이어갔다. 그 중 하나가 서촌의 마지막 오락실 '용오락실'을 인수하고 그 자리에 '옥인상점'을 낸 일이다. 일견 흐름에 편승한 움직임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 서촌. 이런 동네다.

"생각보다 관심을 많이 받아서 얼떨떨하다. 어느 정도 화제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지 몰랐다.

원래 서촌에는 청운중, 경복고, 경기상고, 대신중, 매동초, 청운초 등 학교가 밀집해 있던 까닭에 오락실이 매우 많았다. 나 역시 굉장한 개구쟁이라 오락실을 자주 찾았고 엄마한테 귀 잡혀 집으로 끌려오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오락실이 사양산업이 돼버리자 하나만 남게 됐고 오락실을 운영하던 할머니가 그만둔다는 소리를 듣고 인수했다. 오락실을 이어서 하고 싶었는데 건물주가 반대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서촌을 연구하고 알리는 사무실(서촌 연구소)로 쓰고 있었는데 동네가 뜨면서 1층 상권에 대한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다. 미용실, 세탁소, 전파사, 철물점 등이 있던 1층에는 카페나 음식점 같은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업종들이 들어왔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소품을 판매하는 상점을 운영해야만 했다.

동네가 떠오름에 따라 소품을 팔아서는 자리를 보존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관두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문득 '내가 나가면 카페가 들어오겠지? 그럴 바엔 원래 하고 싶었던 오락실을 되살려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청소년들의 유년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을 되살리고 싶었다. 옥인길의 개성을 만들고 주민들과 청소년들의 놀이터였던 곳을 되살리고 싶었다. 카페와 레스토랑만 가득한 서촌이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와 주민들의 사랑방이 될 곳을 만들고 싶었다. 단순 장소 복원이 아닌 감성을 되살리고 싶었다."

▲ 과거 용오락실/ 사진 제공: 설재우

▲현재는 '용오락실' 자리에 서촌 연구소 겸 옥인상점이 있다.



■ 쉽게 봤던 오락실 - "바다 이야기 아니라고요. "

"그래서 테스트를 한 번 해봤다. 일단 가게에 기계 5대를 들여놨다. 기계를 가져다 놓으니까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아빠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아들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추억을 공유하기도 했다. 마치 없어지는 타자기를 보는 듯한 감정을 곡선 브라운관을 보며 느꼈던 것 같다. 아이들과 세대 간 격차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아빠를 보고 의미가 있을 거라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신고당했다. 그때는 게임 기계를 들여놓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허가를 받지 않은 업장에서는 최대 2대까지의 기계만을 설치할 수 있기 때문에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3개를 치우라고 그랬다.

그래서 '복합 게임 유통업' 허가를 받기 위해 구청을 찾았는데 할머니가 워낙 오래 오락실을 운영하셔서 그런지 건물에 기준 설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거였다. 전기는 승압이 안 돼 있고, 접지 공사도 되어 있지 않았다. 원래 오락실을 했던 자리라 쉽게 허가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 요즘 학생들은 모를지도 모르는 '노래하는 두더지' /사진 출처: 영등포 유통 상가

그래서 방향을 약간 바꿔 경품 인형 뽑기와 두더지 게임기를 설치했다. 생각보다 잘 나오는 매출도 매출이었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즐거웠다. 오락의 근본은 즐거움이다. 재미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왜 못 가게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웃음)

마음이 굳어지자 영등포 유통 전자 상가(영등포에 위치한 아케이드 게임기를 전문으로 유통하는 대규모 상가)에 전화를 걸어 '크라운 203'기계를 10대 섭외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크라운 203'은 단종이 되어 새 제품을 구할 수 없었다. 대신 LCD패널을 가진 기기도 스케일라인을 구현해 브라운관 느낌을 낼 수 있으니 그걸 사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게 싫었다. 색이 바래고 흐려도 좋으니까 옛날 '크라운 203'이어야만 했다. 그 시절 그 느낌. 향수가 중요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중고나라도 뒤져보고, 지방에서 폐업하는 오락실 찾아 기기를 공수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국내에 남아있는 '크라운 203'은 성인 게임을 넣어서 개발도상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 힘들게 모은 크라운 203

사실 상점을 하면서도 오락실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다. 건물주가 워낙 완강하게 반대했던 상황이라 동네 다른 건물에서 오락실을 열기 위해 이곳저곳 자리를 보러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건물주가 오락실을 반대했다. 일단 대부분 성인 게임장과 청소년 게임장을 구분하지 못했다. 게임장이라니까 이야기 들어볼 생각도 안하고 거부했다. 설득의 설자도 꺼낼 수 없었다.

'바다 이야기 같은 게 아니고요, 동네 주민, 청소년, 아이들이 모여 게임을 하는 곳이에요.'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에게 게임장은 사행성 성인 오락실이라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침 뱉고 돈 뺏고 '딱딱이' 튕기는 곳이라는 이미지만 남아있었다. 또 게임장이라고 하니 어두침침한 분위기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지막 방법으로 반대했던 지금 건물의 건물주에게 부탁했다. 원래 오락실이 있던 건물이니까 이해해주겠지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정말 사정 사정을 해서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이게 불과 2주 전 이야기다.

보통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 보증금, 권리금을 합쳐 시작하기 마련인데 나는 같은 자리에서 하는 거라 밑천이 없었다. 그때 크라우드 펀딩을 떠올랐다. 개인 사업을 펀딩하는 것이 이치에 안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락실에 대한 추억이 나만의 추억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공공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게 됐다.

또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가스파드의 '전자오락수호대'라는 웹툰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로 판단했다.

지금 즐기고 있는 게임의 전신이 아케이드 오락인데 누군가는 관심을 두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실 펀딩 성공 여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요새같이 어려울 때 쉽지 않은 이야기이지 않나.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30만 원이 들어와 있었다. 동네 주민이 펀딩한 돈이었다. 동네 주민 중에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 동전교환기도 일부러 중고의 느낌이 많이 나는 것을 선택했다고...



■ 단순 복원? - "지역 주민이 모일 수 있는 광장 "

"난 오락실이 단순히 오락하는 공간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버스를 기다리며 오락실에서 구경하다 버스를 타기도 했고, 만남의 장소로도 이용하곤 했다. 만남의 장소이면서도 돈 한 푼 안 쓰면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오락실밖에 없다.

그뿐인가. 처음 보는 사람과 어깨를 마주 대고 할 수 있기도 하다. 친해질 수도 있다. 이런 장소가 오락실 말고 어디 또 있단 말인가.

이런적도 있다. '킹오브파이터즈95'가 새로 나왔을 때 '랄프'로 손을 연타하면 '와다다다다다다'하면서 때리는 기술이 있었다. 이 기술이 소위 말하는 밸런스 붕괴 기술이었는데 이 기술을 많이 쓰다가 옆자리에서 게임을 하던 형한테 강냉이를 털리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웃음)

▲ 얘가 랄프다.

요즘은 어딜 가든 돈을 내야만 한다. 하지만 오락실은 돈 없어도 뒤에서 구경할 수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친해지면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된다. 광장 같은 존재이다. 자생적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지역활동을 하게 되고 애정을 가지게 하는 밑바탕이자 원동력이 된다.

일본 같은 경우 상가 차원에서 이런 노력을 많이 한다. 하지만 한국은 임대료, 권리금 문제 때문에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가게를 운영하기 힘들다 보니 커뮤니티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 그 결과 지역 주민들이 모일 만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게 됐다.

이런 문제 해결에 오락실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단순한 오락만 하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그 이상의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었으면 한다. 젊은 층, 노년층, 아이들 가릴 것 없이 공통으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오락실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에 만족하지 않고 좀 더 파티 같은 느낌, 좀 더 즐거움이란 단어에 충실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싶다. 더불어 아이스크림, 솜사탕, 팝콘 등 즐거움을 상징하는 콘텐츠를 모아놓는 장소가 되고 싶은 거다. 단순 오락실 복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고 있다."



■ 현실적 고민. 수익 - "할머니를 생각해 "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테스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수익이 괜찮았다. 영화관 근처의 게임센터들이 수천만 원짜리 기계를 설치하고도 유지가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웃음)

개인적으로 돈 되는 게임은 '펀치'라고 생각한다. 회전율도 빠르고 남자들이 정말 좋아한다. 게다가 커플이라면? 무조건 치고 본다. (웃음)

중요한 것은 이 장소에 얼마나 오랜 시간 사람을 붙잡아 놓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쉬운 건 절대 아니더라. 뭔가 매력적인 모습이 없다면 사람들은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떠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기에 적어놓는다거나 한 달에 한번 게임대회도 개최할 생각이다. 예전 미니카 대회를 생각해보면 내가 반드시 참가하지 않아도 남이 경주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그런 느낌, 그런 감성을 다시 되살리는 거다.

사실 아직 수익에 대한 부분은 많이 걱정하지 않는다. 잘되면 좋겠지만... (웃음) 사실 내가 이 장소에 애정을 가지게 된 건 단순히 게임 콘텐츠 뿐은 아니다.

영등포에서 직접 기판을 받아 갈아 끼우던 '용오락실' 할머니를 생각해보면 돈을 벌자고 장사했던 건 아니었다. 할머니는 오락실을 찾아오는 사람이 좋았던 것 같다. 돈을 벌고자 했으면 이미 사행성 성인 오락실을 했을 거다. 실제로 근처 오락실이 빠찡코 기계로 하루에 돈을 몇백만 원씩 벌기 시작했을 때도 학생들에게 그런 것 시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오락실을 지켰다.

할머니 손자가 나랑 나이가 비슷한데 오락실에 찾아오는 학생들이 모두 자기 손자 손녀 같았을 거다. 그래서 다른 데 있던 선정적인 게임도 없었다. 할머니는 학생들이 그런 거에 노출되는 게 싫었던 거다. 재미있게 놀다 가길 바랬던 것 같다. 그만큼 우리를 아끼고 예뻐하셨다. 우리도 느낄 수 있었고.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학생들이 할머니께 세배를 드리러 오락실을 가기도 했다. 그럼 할머니는 공부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100원씩 세뱃돈을 주시곤 했다. 물론 그대로 다시 오락실 기계로 들어가긴 했지만... (웃음)

좋은 기계가 없었음에도 할머니가 좋아서 오락실을 가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용오락실'이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나 역시 할머니처럼 오락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를 만들고 싶다."



■ 용오락실의 귀환을 꿈꾸며 - "아날로그 정신 계승 "

새로 복원되는 '용오락실'에는 '킹오브파이터즈95', '스트리트파이터2 터보', '보글보글', '심슨무비', '테트리스', '숨은그림찾기', '1941', '퍼즐보글', '파이널파이트' 등 총 10개의 게임이 설치될 예정이다.

오락실이 전성기를 누렸던 20세기 끝자락, 방과 후 사교육은 관심도 없었던 아이들의 열기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있던 오락실. 엄마들과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잡으러 오락실을 뒤지던 그 시절. 돈이 없더라도 옆에 앉아 구경만 해도 좋았던, 그저 100원 하나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시절.

그 시절의 추억과 향수를 담은 '용오락실'은 지역 주민의 만남의 장으로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용오락실'이 단순한 장소의 복원이 아닌 서촌의 풍취를 담은 아날로그 정신을 계승하길 기대해 본다.

▲ 그의 펀딩은 일주일을 남긴 현재 목표 금액의 79%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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