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박종천 엔지니어


NDC 2015의 마지막 날,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박종천 엔지니어가 강단에 올랐다. 주제는 '하스스톤, 게임 디자인의 지혜 11조각'으로, 하스스톤이 어떤 비전 아래 개발되었는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주제는 다소 평범했지만, 이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 속에는 블리자드 특유의 유쾌함이 녹아들어 있었다. 자부심 강한 블리자드의 다른 개발팀과 비교해도 유독 열정적이었던 하스스톤 개발팀. 그들의 이야기를 지금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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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빠른 반복(Iterate Fast)



하스스톤은 개발 초기, 게임 디렉터와 시니어 디자이너가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틀을 만들었다. 카드 게임이다 보니 타 장르에 비해 프로토타입 만드는 게 간편했고, 덕분에 개발자 간 커뮤니케이션도 빠르게 진행됐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충분한 생각을 한 뒤 이루어진 대화였기에 개발 속도를 대폭 단축시킬 수 있었다.

어느 정도 틀이 잡힌 뒤 플래시를 이용해 컴퓨터용 프로토타입을 제작했다. 초안이기는 하나, 현재 하스스톤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기능이 이미 적용된 상태였고, 덕분에 엔지니어들의 작업에도 속도가 붙었다. 이후 작업은 그래픽 개선 및 버그 수정 정도였다는 게 박종천 엔지니어의 설명이다.

"작업을 반복해서 빠르게, 계속 시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실제 개발 과정에서 속도가 붙어야 해요. 동기 부여가 끊이지 않고, 결과적으로 게임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2. 단순성(Simplity)



박종천 엔지니어는 게임에 필요 없는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여 작업을 단순화하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예를 든 게임은 '매직 더 게더링'이었다. 전 세계에 수많은 마니아를 보유한 TCG.

"매직 더 게더링은 진입 장벽이 꽤 높은 게임입니다.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죠. 블리자드는 게임을 개발할 때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마스터하기는 어려운 게임'을 모토로 합니다. 카드 게임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죠."

카드 게임을 개발할 때는 콘셉트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개발 리소스를 가늠할 수 있고, 덱 구성도 이루어진다. 쉽고 간편하면서도 깊이 있는 카드 게임. 이것을 개발 과제로 삼은 제작진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매직 더 게더링'은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하는 카드 게임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게임을 하다 보니 상호 작용이 필수적으로 발생한다. 표정 변화나 대화 등으로 심리전을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디지털 게임은 온라인을 기본이기에 인터렉션을 온전히 구현하기 어렵다. 디자인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만 했다.

인터렉션을 단순화하고, 게임 내 진입 장벽이 될 만한 요소들은 대부분 간결하게 수정했다. 유닛들의 공격 방식은 심플하게, 그리고 특수 능력도 한 번 보면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도발이 자동으로 나가는 것은 원래 버그였어요. 그런데 막상 적용하고 보니 재미있다고 생각되어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또, 하수인을 내보내자마자 바로 공격할 수 있게 한 뒤 테스트를 해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넣고, 조금이라도 재미없다 싶으면 바로 빼는 게 심플한 게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게임을 단순화하여 만드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게임이 복잡하고 가득 차 있으면, 추후 콘텐츠를 업데이트할 때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초창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 주다가 업데이트가 누적되며 망가지는 게임들이 많은데, 대부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3. 깊이를 유지할 것(Keep it Deep)



복잡한 요소를 없애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깊이를 해쳐서는 안 된다. 하스스톤의 영웅 능력이 대표적인 예시다. 한정된 마나로 영웅 능력을 사용할지, 카드를 꺼낼지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플레이어의 몫이다. 크게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작은 행동들이 모여 자신만의 플레이 스타일을 완성한다.

카드 내 텍스트는 보자마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안 되는 카드는 바로 제거했다. 카드 한 장, 한 장은 단순하되 이를 모두 합쳐서 생각해보면 깊이 있는 전략이 나오도록 유도했다고 박종천 엔지니어는 설명했다.


4. 즉각적인 재미전달(Immediate Fun)



플레이어가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재미를 느끼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튜토리얼이 중요하다. 하스스톤 개발팀도 이를 잘 알고 있었고, 튜토리얼에 특히 많은 신경을 썼다. 박종천 엔지니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튜토리얼' 구현이었다.

"공격 가능한 하수인의 테두리를 초록색으로 한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어요. 설명 텍스트를 최대한 배제했습니다. 플레이어를 교육시키는 것은 좋지 않아요. 설명을 읽는 순간 플레이어는 자존심이 상합니다. 처음부터 잘하게 만들면 스스로 뿌듯해하죠. 그게 게임의 지속력을 결정합니다."

스스로 게임 방식을 발견한 플레이어가 갖는 만족감은 상당히 큰 요소로 작용한다. 게임을 풀어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다고 느끼면, 이후 플레이에도 자신감을 얻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5. 폭넓게 포용하라(Embrace the Medium)



디지털 카드 게임의 환경적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했다. 가령, 비밀 카드를 꺼낼 때 나오는 극적인 화면 연출은 디지털 플랫폼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또, 게임 자체의 플레이 타임을 깎는 노즈도르무 카드는 오프라인에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요소다.

하스스톤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는 황당함에서 시작한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 했던, 디지털에 최적화된 아이디어들이 잔뜩 있고 블리자드는 이들의 창의력을 존중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종천 엔지니어는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카드들이 앞으로 꾸준히 추가될 예정이니 기대해도 좋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6. 너무 많이 바꾸지 말 것(Don't Change Too Much)



여러 가지 창의적인 시도를 하는 것은 좋지만, 카드 게임의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웅과 하수인 개념, 그리고 영웅의 생명력이 제로가 되면 패배한다는 공식은 하스스톤의 큰 맥이라 말할 수 있다.

"저희도 이를 바꿔 보려는 시도는 해 봤습니다. 공격력과 생명력을 마음과 평화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꿔서 넣어봤는데, 직관성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가 꼽은 예시 중 하나로 '화염구(파이어 볼)' 주문 카드가 있다. 화염구는 판타지를 좋아하는 유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마법으로, 대략적인 이미지가 정해져 있다. 개발진도 이러한 이미지를 감안하여 적당히 높은 마나에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화염구 카드를 제작했다.

7. 플레이어 자신의 이야기(Support Player Stories)



'사용자가 느끼는 스토리'는 블리자드가 하스스톤을 개발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 하나다. 공식 스토리가 아닌, 게임 상황에 따라 플레이어가 느끼는 '서사'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박종천 엔지니어는 하스스톤 내 황당한 카드가 유독 많은 것도 이러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0 마나 카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추가되면서 다양한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줄기가 모두 사용자만의 스토리로 완성되지요."

투기장 역시 사용자만의 스토리 생성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콘텐츠다. 투기장은 입장할 때마다 랜덤으로 덱을 구성하게 되며, 덕분에 플레이어가 평소 생각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전술이 등장할 수 있었다. 박종천 엔지니어는 투기장에서 돌진 하수인 카드 7개를 넣어 덱을 구성했고, 예상외로 많은 승수를 챙겼다고 말했다. 상대가 예상하지 못해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가 생각한 이유다.

"바이브라는 말이 있어요. 분위기 뭐 그런 뜻인데, 하스스톤은 스토리가 아니라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한 판 한 판이 재미있는 파티가 되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스토리를 만들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냥 스토리 몰라도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고 싶었어요."


8. 감정을 고려한 설계(Emotional Design Matters)



승패 여부와는 관계 없이 플레이어가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종천 엔지니어는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패배하더라도 결코 감정이 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게임 안팎을 꼼꼼하게 살폈고, 작은 것부터 수정해나가기 시작했다.

"큐를 돌리면 로딩 바가 돌아가는데 초기 버전에서는 '완벽한 상대'로 잡혔어요. 그런데 게임에서 지면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그래서 '적절한 상대'로 바꿨습니다. 이겨도 적절한 기분, 져도 적절한 기분 느낄 수 있도록 말이죠. 이게 어떻게 보면 참 사소한 건데, 게임의 분위기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오프라인 카드 게임을 보면, 상대방의 카드를 강제로 없애는 기술도 많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하스스톤 개발팀은 이러한 요소는 최대한 넣지 않기로 입을 모았다. 상대방 카드를 없애는 대신, 해당 카드를 복사해 자신도 가질 수 있도록 수정했다.

예외로 상대방의 카드를 빼았는 '정신 지배(마인드 컨트롤)' 카드가 있지만, 감정이 상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나를 10으로 설정했다. 쉽게 꺼낼 수 없는 카드, 일종의 최종병기 느낌을 덧대어 플레이어도 납득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게임과 플레이어가 모두 만족하는 요소가 있다면 개발력을 쏟아부었다. 유니크 하수인을 소환할 때 나오는 강렬한 연출은 플레이어에게 큰 만족감을 주며, 이러한 블리자드의 개발 의도가 녹아든 부분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9. 소소한 승리(Little Victories)



"하스스톤은 카드 게임이지만, 퍼즐 게임으로 볼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하수인을 없애는 카드라던지, 체력을 1로 바꾸는 카드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하스스톤은 퍼즐 게임에서 영감을 얻은 극적인 카드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카드들은 모두 '작은 승리'에 기인한다. 승패와 관계없이 순간의 승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플레이어는 여기에서 승리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게 포인트.

"작은 승리감을 꾸준히 제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설령 게임에서 지더라도 '한 방 먹였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크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턴 킬이 나오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려고 합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야 돼요. 별로 해 본 것도 없이 패배하게 된다면 그보다 허탈한 게 없으니까요."


10. 그 찰진 손맛(Get Physical)



디지털 게임이지만 진짜 사물을 갖고 노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특히 노력했다. 이른바 '손맛'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카드 묶음이나 열쇠 등도 블리자드 디자인을 기본으로 하되, 현실적인 질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가상 세계이기는 하나, 실제로 상대방과 마주 앉아 게임을 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시점으로 게임판을 디자인한 것도 이 때문.

"이렇게 만들고 나니 아이패드 버전을 만들 때 예상외의 반응을 얻었어요. 하스스톤이 터치 UI를 만나니 현실감이 극대화된 거죠. 진짜 카드 게임하는 것처럼요. 이것까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아이패드 버전 하스스톤을 좋아해 줬고, 저희도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11. 미래 비전의 공유(Share The Vision)



"가장 중요한 겁니다. 게임을 만들 때는 철학이 있어야 해요. 저희는 6가지 철학을 만들었고, 팀원들 모두 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처음 하는 사람들이 바로 재미를 느껴야 한다', '매번 즐거워야 하며 깜짝 놀랄 재미를 안겨줘야 한다'였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큰 재미를 주는 게임. 그게 저희 철학이었습니다."

게임 개발 비전을 모든 팀원들이 공유하는 것은, 철학이 담긴 게임을 만드는 기본 중 하나다. 하스스톤뿐 만 아니라 다른 명작 게임 역시 이러한 개발 과정을 겪는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철학 아래서 만드는 게임은 개발 속도가 빠르며, 완성하는 그날까지 팀원들의 사기가 높게 유지된다.

하스스톤 개발 팀원을 뽑을 때도 이러한 요소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그는 말했다. 정말 하스스톤을 사랑하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는 것. 박종천 엔지니어는 현재 자신이 랭크5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사내 토너먼트를 하면 3전 전패 성적표를 받을 정도로 팀원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모든 개발진이 진심으로 하스스톤을 좋아하며, 또 그만큼 열심히 즐긴다는 의미다.

"팀의 모든 사람들이 디자이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팀원이 피드백을 받고, 적극적인 태도로 업무에 임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토론할 수 있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 갖춰져야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하스스톤 스마트폰 버전 출시 기념사진. 모든 직원들이 게임을 하고 있다는 설정으로 촬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