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

프로게이머에게 있어 가장 필수적이지만 생각보다 갖추기란 쉽지 않은 요소다. 아무리 잘 나가던 선수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 흔들리기 시작하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팀이 무너진 상황이라면 선수 영입을 통해 전력을 보강하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지만 개인이 무너지면 복구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개인의 역량을 끌어올릴 방법은 오로지 본인 스스로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명훈(데드픽셀즈)은 다른 프로게이머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는 선수다. 전 소속 팀 SKT를 떠난다는 결정을 내릴 때만 해도 정명훈의 밝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정명훈은 팀을 떠나 홀로서기를 한 이후에도 꾸준한 성적을 기록했다. 브루드워에서 정점을 찍었던 선수들 중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스타2 개인 리그에 꼬박꼬박 출석하고 있는 정명훈. 인터뷰를 하는 동안 정명훈에게서는 9년 차 프로게이머의 여유와 관록이 느껴졌다.



■ SKT를 떠난 것,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내린 과감한 결단



Q. 안녕하세요, 정명훈 선수!인벤 독자 여러분께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인벤 인터뷰는 처음인 것 같아요. 9년 차 프로게이머 데드픽셀즈 소속 테란 플레이어 정명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Q. 정말 오래 몸담았던 소속 팀 SKT를 떠난다는 결정을 내렸었죠. 팀을 나갈 때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저에게도 굉장히 큰 모험수였어요. 일단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계기가 있는데, 팀을 떠나기 전 1년간 경기도 많이 못하고 자괴감에 빠졌어요.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가서도 잘 할 수 있다는, 스스로한테 믿음을 가지고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됐어요. 현재는 팀을 나온 것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Q. 그럼 팀을 나온 후에는 어떻게 지냈나요?

짐 싸서 부산으로 내려오고 한동안 쉬었어요. 그동안 가지기 힘들었던 휴식도 취했고요. 사실 팀을 나왔단 기사가 나간 후 가장 먼저 연락을 한 팀이 데드픽셀즈였어요. 그 당시만 해도 그 팀이 어떤 팀인지 몰랐고 신생 팀이라서 신뢰도 잘 가지 않았죠. 그래서 처음엔 다른 팀을 더 알아보겠다고 얘기를 했는데 생각보다 해외 팀 사정이 좋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마침 다시 연락이 왔어요. 제가 (방)태수랑 되게 친한데 태수가 이 팀 좋다고 추천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데드픽셀즈에 가게 됐죠. 해외 팀 중에서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이렇게 잘 챙겨줄 수가 없을 정도로 잘 챙겨주고 팀 사람들이 다들 게임을 정말 좋아해서 마음도 잘 맞아요. 팀을 정말 잘 고른 것 같아요.


Q. 해외 팀 소속이지만 생활은 집에서 계속하셨는데, 혼자 연습하느라 어려움이 있진 않았나요?

최근 들어 가장 힘들다고 느낀 게 연습 상대가 별로 없어요. 팀에 있을 때는 연습생들이 있으니 원할 때 하고 싶은 만큼 게임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기가 많이 힘들다. 지난 GSL도 그렇고 대회 준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특히 인맥이 많이 겹치는 선수와 대결할 때 정말 힘들어요. 안 그래도 연습할 사람이 적은데 더 적어지거든요. 그게 가장 큰 단점이죠.


Q. 그럼 연습 상대를 자주 해 주는 선수는 누가 있죠?

같은 팀 멤버인 조지현, 방태수와 가장 많이 연습해요. 그리고 예전 팀 동료들인 (김)민철이, (정)윤종이, (원)이삭이, (서)태희, (이)예훈이랑도 많이 연습하죠. 그런데 이런저런 대회에서 우리끼리 맞붙을 때가 많더라고요. 그런 경우엔 친분이 있는 전 SKT 선수들과도 연습해요.



■ 돈보다는 명예, 마지막 순간까지도 최선을 다하다 떠날 것



Q. 국내, 해외 팀은 어떤 면에서 서로 다른가요? 한국 팀으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나요?

국내 팀의 경우 스스로 자기 관리를 조금 못하더라도 실력 유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요. 연봉도 안정적이고요. 대신 그만큼 묶여있기 때문에 자유 시간이나 쉬는 날이 별로 없죠.

해외 팀은 많은 해외 대회를 나가면서 관광도 하고 외국 선수들과 친해지는 등 한국에서는 쌓을 수 없는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어요. 분위기도 자유로운 편이죠. 대신 연습 상대가 별로 없고, 연봉이 적은 편이에요.

아직까지는 지금 생활에 정말 만족하고 있어서 당장 한국 팀에 올 생각은 없어요. 한 번씩 대회 끝나고 시간이 남아서 쇼핑하러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정말 행복했거든요.


Q. 혼자 있어서 느슨해지기 쉬운 환경인데도 꾸준히 성적을 내고 있는데, 자기만의 관리법이라도 있나요?

정해놓고 하는 관리법은 없어요. 대신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하죠. 누가 옆에서 케어해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 게 싫어서 대회가 있으면 정말 열심히 연습해요. 연습시간이 많지 않더라도 대충대충 하지 않고 할 때는 최대한 열심히 하죠.


Q. 스베누에서 많은 선수들을 영입했는데, 혹시 본인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았나요?

연락이 왔었어요. 이선종 감독님께서 직접 전화를 주셨었죠. 영입 의사를 밝히셨는데 저는 아무래도 소속된 팀이 있기도 하고 지금 생활이 정말 만족스럽기 때문에 완곡하게 거절을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했죠.


Q. 멘탈 좋고 성실하다고 알려져서 팬들의 찬양을 받고 있는데, 혹시 그런 반응을 본인도 알고 있나요?

(웃음)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뭐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사실 저 스스로도 성격이 꼼꼼한 편이라고 생각해요. 계획 세우는 것도 좋아하고 뭘 하든 허투루 하는 걸 싫어하죠. '은퇴하기 1년 전에는 그냥 놀다가 은퇴한다'고 말하는 게이머도 많은데, 개인적으론 은퇴하기 직전까지도 최대한 열심히 하다가 떠날 생각이에요.


Q. 그렇다면 프로게이머 정명훈에게 있어 최우선시 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돈보다는 명예를 많이 좇는다고 생각해요. 우승 상금 없어도 좋으니 우승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스타1 때 벌어둔 게 많으니 할 수 있는 여유 같기도 해요. 지금은 팬들에게 좋은 경기를 보여줬을 때의 기쁨, 거기서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 때문에 게이머 생활을 계속하고 있죠.



■ 어윤수와의 경기는 게이머 인생 역대 최고의 경기, 준비된 자가 우승을 차지한다는 걸 배운 IEM



Q. 좋은 경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어윤수 선수와 GSL에서 인생 경기를 치른 후 심정이 어땠나요?

그 게임이 끝나기 1초 전까지만 해도 조마조마했어요. 1초만 늦게 때렸어도 위험한 순간이라 너무 떨렸죠. 그런 게임을 이기니까 너무 기뻤어요. 이런 경기를 해 본 게 처음일 정도로 게이머 생활을 하면서 역대 최고의 게임이었어요. 아마 그 경기를 졌으면 멘탈이 완전히 무너져서 그대로 탈락했을 거예요. 스스로도 너무나 감격스러웠죠. 한편으론 속으로 '커뮤니티가 난리가 났겠구나'란 생각도 조금 들더라고요(웃음).


Q. 그런 대단한 경기를 치르고 며칠 후엔 케스파컵에서 패배하고 말았어요. 패배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원래 제가 경기전에 상대 분석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VOD를 보는데 (박)령우가 바이오닉한테 거의 지질 않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나서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전략 노선을 메카닉으로 급선회했어요. 그런데 너무 잘 막더라고요.

그래서 4세트에선 어차피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그냥 하던 대로 바이오닉을 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경기를 했는데 의외로 할 만한 거예요. 스스로를 믿었어야 했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죠. 5세트에서 올인을 당해서 지고 정말 아쉬웠어요. 저 스스로를 믿지 못한 점, 령우가 테란전을 너무 잘해서 시작부터 겁먹고 경기에 임한 게 패배 원인이라고 봐요.


Q. 지난 시즌 개인리그도 그렇고 이번에도 한참 기세를 끌어올리다가 막혔어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게이머 입장에서 많이 힘들지 않나요?

잘 나가다가 뜬금없이 지는 경우가 예전에도 많았어요. 고쳐야 할 제 단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조금씩 고쳐지더라고요. 하지만 시간 여유가 많으면 괜찮은데 사실 제게 시간 여유가 많진 않아요. 더 열심히 연습해서 그런 모습을 고칠 생각이에요. 이번 GSL에서는 그런 실수를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Q. 많은 선수들이 대회 목표를 물으면 시드를 받을 수 있는 8강이 목표라고 하는데, 정명훈 선수는 언제나 우승이라고 답하곤 해요. 답변이 대조적인 이유가 있나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도 같은 대답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최근 IEM 카토비체를 갔을 때 주성욱 선수가 16강 경기 치르기도 전부터 '나는 꼭 우승할 거다'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주성욱 선수가 우승할 것 같진 않았는데 실제로 우승을 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저렇게 마음을 가져야 우승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 이후로 언제 우승해도 이상하지 않게 항상 목표를 우승으로 잡고 있어요. 주성욱 선수를 보고 배운 게 정말 많았죠.


Q. 아무리 불리한 경기도 끝날 때까지 쉽게 포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이유가 있나요? 혹시 누굴 보고 배운 습관인가요?

(웃음)예전부터 게임 자체를 재미있어하는 편이에요. 진 게임이더라도 유닛 가지고 컨트롤하는 걸 좋아하죠. 외국 선수들은 제가 불리한 게임에서 안 나가고 버티고 있으면 '판타지 GG 타이밍'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보는 입장에선 괴로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보면 얼마 전 같은 인생 경기도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요즘은 스타1 시절에 비해 GG 타이밍이 정말 많이 빨라진 편이에요(웃음).


Q. 아쉽지만 마무리를 할 시간이네요. 마지막으로 팬 여러분께 한 마디 해 주세요!

요새도 팬분들이 경기장에서나 온라인상에서나 많이 관심을 가져주고 계신 게 느껴져서 많은 힘이 되고 있어요. 프로게이머 생활한 지 9년 차인데, 역대 최고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어요. 올해 목표는 블리즈컨 진출인데, 꼭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