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경기를 뒤집거나, 다전제 최후의 세트에서 극단적인 올인 전략으로 승리를 따내는 등 명경기를 만드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양 선수의 실력이 높은 수준에서 대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이 너무 강하면 일방적인 경기가 펼쳐지고, 양 쪽의 실력이 낮은 수준에서 대등하면 팬들은 보통 그것을 명경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준 높은 선수가 만날 경우, 명경기를 만들어내는 모든 요소가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2015년 5월 21일, 스베누 스타크래프트2 스타리그 2015 시즌2 8강 2경기 마지막 5세트에서 조중혁(SKT)은 이승현(KT)과 피튀기는 혈투 끝에 승리를 따내고 4강에 진출했다. 양 선수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싸우면서 교전 컨트롤의 극을 보여줬다.

■ 진검승부를 예고하는 트리플

▲ 시작부터 혼을 실은 3사신 견제를 펼치는 조중혁

직전 세트까지 초반 전략을 주고받은 양 선수는 마지막 5세트에서는 서로 배를 불리는 출발을 했다. 조중혁은 트리플을 가져가기 위해 3사신을 생산했고, 시작부터 매섭게 이승현을 견제했다. 이승현은 상대의 3사신을 보자마자 트리플임을 직감하고 본인도 재빨리 제 2멀티에 부화장을 펼치면서 배를 불리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세트에서는 중장기전 운영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최후의 경기에서는 서로의 모든 것을 건 진검승부가 펼쳐질 것이 예고됐다.


■ 조중혁의 위기, 풍전등화 제 2멀티

▲ 이승현의 정면 공격에 조중혁은 큰 위기를 맞았다

중반이 되면서 상황은 조중혁에게 좋지 않게 흘러갔다. 이승현의 5시 멀티를 노리고 들어간 병력은 엄청난 수의 저글링에 막혀 부화장을 건드려보지도 못했고, 맵 중앙에서 일부 병력을 흘리기까지 했다. 당시 조중혁의 멀티는 2개, 이승현의 멀티는 3개였던 상황. 자원력에서 밀리는 조중혁으로선 이승현의 5시 멀티 견제가 필수적이었다. 조중혁은 4기의 땅거미 지뢰를 의료선에 태워 이승현의 멀티로 보냈으나, 이승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면 공격을 퍼부었다.

이승현의 병력이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쓰나미처럼 밀려온 이승현의 병력이 조중혁의 병력을 덮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순간 이승현의 승리를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현은 여기서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테란의 잔여 병력들과 싸우는 사이 뮤탈리스크 컨트롤을 전혀 하지 않는 바람에 뮤탈리스크가 전멸하고 만 것. 조중혁은 멀티도 지키고 뮤탈리스크까지 전멸시키면서 위기 속에서 기회를 잡았다.


■ 쉽게 3/3업을 하는 테란, 2/2업에서 멈춰야만 했던 저그

▲ 조중혁은 수 차례에 걸쳐 5시 멀티를 공격했고, 이승현도 엄청난 수비력을 선보였다

뮤탈리스크가 전멸한 저그는 이후 펼쳐지는 힘싸움에서 테란을 이기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뮤탈리스크 없이는 게임 운영을 할 수 없으니 뮤탈리스크를 충원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론 테란의 지상군을 이기지 못한다. 이승현은 뮤탈리스크를 새로 생산하면서 동시에 저글링과 맹독충까지 다수를 갖춰야 하는 상황. 그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조중혁은 이승현의 대공세를 한 번 막아낸 시점에서 이미 3/3업을 누른 상태였다. 멀티를 지켰으니 값싼 해병과 땅거미 지뢰만 생산하면서 주기적으로 토르를 보내기만 하면 되는, 상대적으로 마음 편한 입장이었다. 정면 힘싸움에서 질 리가 없다고 판단한 조중혁은 이승현의 5시 멀티를 몰아쳤다.

하지만 이승현 역시 괴물같은 수비력을 선보였다. 업그레이드가 밀리고 점막도 많이 펼쳐지지 못한데다 다수의 맹독충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조중혁의 수 차례에 걸친 공격을 계속 막아내고 또 막아냈다. 이승현은 상대의 공격이 자신의 부화장에 닿지 않게 하는 선에서 계속해서 신들린 수비를 선보였다. 조중혁의 제 2멀티 자원은 이미 말랐고, 남은 자원줄은 12시 멀티 하나 뿐. 반면 이승현은 5시 멀티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고 8시 지역에도 부화장을 펼치면서 인구수에서 크게 앞서고 다시 역전하는 듯했다.

하지만 테란은 무기고만 지어도 3/3업까지 진행이 가능한 반면 저그는 감염 구덩이를 짓고 군락까지 건설해야 3/3업 진행이 가능하다. 이런 숨가쁜 상황에서 저그는 당장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군락을 올릴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다. 당장의 상황은 이승현도 나쁠 것이 없어보이지만 업그레이드에 있어서 저그가 가지는 구조적인 페널티 때문에 이승현은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불리해지고 있었다. 조중혁이 여유롭게 3/3업까지 올릴 수 있었던 반면 이승현은 끝까지 군락을 올리기 위한 테크 건물인 감염 구덩이조차 지을 수 없었다.

■ 승리를 부르는 황금 멀티

▲ 이승현은 계속해서 조중혁의 멀티를 공격했지만, 끝내 파괴하진 못했다

자원 고갈 직전까지 간 조중혁은 최후의 수단으로 궤도사령부를 띄워 맵 중앙의 풍부한 광물 지대에 배치시켰다. 그와 동시에 한숨 돌린 이승현이 딴 맘 먹지 못하게 병력을 끌어모아 8시 멀티를 쳤다. 이승현이 그간 신들린 수비를 보여줬다고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점막 위에서 펼쳐진 전투에서의 결과였을 뿐이었다. 이승현은 점막이 없던 8시 지역에서는 감히 테란의 병력에 덤비지도 못하고 부화장을 내줘야 했다.

정면 교전에서 테란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현의 선택은 '황금 멀티 테러'였다. 이승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저글링이나 뮤탈리스크를 보내 조중혁의 멀티를 마비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파괴하진 못했다. 업그레이드에서 앞서는 조중혁은 소수의 해병을 멀티에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공격에 대해 상당한 억지력을 가질 수 있었다.

▲ 가자, 승리를 향해!

이승현도 자신의 풍부한 광물 지대에 부화장을 펼쳤으나 언덕 아래에서 조중혁의 해병이 사격을 가한 탓에 제대로 된 자원 채취를 할 수 없었다. 이승현은 자신의 멀티를 버리고 다시 한 번 조중혁의 멀티를 노렸지만 이제는 조중혁의 멀티를 파괴하더라도 본인이 가난해서 병력을 더 생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중혁은 힘이 빠진 이승현의 기지로 내려와 대접전의 승자가 됐다.

GG가 나오기 전까지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는, 피튀기는 혈투였다. 만일 이승현의 상대가 조중혁이 아니었다면, 중반 몰아치기 한 방에 경기가 끝났을 수도 있다. 만일 조중혁의 상대가 이승현이 아니었다면, 5시 멀티에 가해지는 공격을 그렇게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수준 높고 뛰어난 경기를 펼쳤기에 승자도, 패자도 아름다운 경기였다. 벌써 다전제에서만 세 번째 만난 조중혁과 이승현. 또다른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냄으로써 스타크래프트2의 흥행 보증수표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