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도트 그래픽을 좋아합니다. 근육질 남자 주인공의 팔뚝 사이로 흐르는 땀방울, 움찔거리는 눈썹 하나하나까지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2D 도트 특유의 '감성'을 좋아합니다.

아마 2000년대 이후 게임에 입문한 분이라면 이런 감성이 잘 와닿지 않을 겁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폴리곤과 도트의 격차는 급속도로 벌어졌고, 게임 개발자들 역시 3D 게임을 만드는 게 시간으로 보나 결과물로 보나 더 효과적이란 걸 깨달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접할 기회가 점차 줄어든거고, 3D 그래픽이 현실 못지 않게 발전한 지금에 와서 도트 그래픽을 돌아보면 다소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트 그래픽은 3D와는 또 다른 감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그게 좋아요. 그래픽이 현실적이지 않다 보니, 오히려 유저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도트 그래픽 게임이 '레트로'라는 이름 아래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D 도트 게임 개발자들은 자신만의 영역 안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3D로는 표현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를 더 강조하는 데 힘을 쏟았어요. 제가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게임은 총 5가지인데요. 바로 그 점에서 강점을 발휘하는 작품들입니다.






1. EITR - '디아블로 + 다크소울', 도트로 완성된 묵직한 분위기

[▲ EITR 최신 게임플레이 트레일러]

올해 E3 2015 현장 취재도 했고 공개된 트레일러도 대부분 봤는데, 이 게임은 특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2인의 개발자로 구성된 'Eneme 엔터테인먼트'에서 약 8개월 째 개발 중인 'EITR'인데요. 단순한 도트 그래픽이라도 섬세한 사운드와 연출이 곁들여진다면 극한의 분위기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임플레이 시점, 그리고 대량으로 몬스터가 쏟아지는 점은 '디아블로'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공격 하나하나에 신중함을 요구한다는 점, 또 게임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크소울'에 더 가까운 느낌이에요. 도트 그래픽이지만 다크판타지 특유의 무게감을 잘 살려냈는데 참, 개발자의 센스가 엿보이는 점이랄까요.

또한, EITR의 전반적인 음향 역시 주목할 부분입니다. 이런 레트로 그래픽을 채용한 게임에서 음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집니다. 옛날 패미콤 시절의 미디음 쓰던지, 아니면 최신 게임 못지 않은 고음질의 효과음을 넣는 거죠. EITR은 후자를 택했는데, 게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촉매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그르렁 그르렁 어둠을 찢고 들려오는 몬스터의 육성, 대쉬 후 숨을 헐떡이는 주인공, 그리고 칼이 부딪힐 때 들리는 찰진 쇳소리 등은 게임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 일조합니다. 덤으로 타격감도 함께 잡았고요.

쩍쩍 붙는 손맛과 묵직한 분위기가 일품인 'EITR'. 2016년, PC와 PS4로 출시됩니다. 다크 판타지, 하드코어 액션 RPG를 좋아하는 게이머라면 체크해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2. 크로마 스쿼드 - 오마주에서 느껴지는 양덕의 클래스

[▲ 크로마 스쿼드 게임플레이 트레일러]

브라질의 인디 개발팀 '비홀드 스튜디오(Behold Studio)'에서 개발한 작품입니다. 위 영상을 조금만 봐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개발진들이 꽤나 숙성된 양덕이라는 사실을.

'크로마 스쿼드'는 전대물을 모티브로 한 작품입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중후반의 나이대를 바라보는 유저들에게 친숙한 소재란 말이죠. 전대물은 '플래시맨', '바이오맨', 아니면 '파워레인저' 같은 작품들을 일컫습니다. 개발진 역시 이러한 작품들을 보고 자란 듯 해요. 뜨끈뜨끈한 애정과 세심한 관찰력이 없다면 구현하기 어려울 법한 연출이 여기저기에 녹아 있거든요.

못된 짓을 일삼고 있는 악당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온갖 폼을 잡은 뒤 변신하는 것, 오토바이로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뒤, 그 안에서 날아차기를 하는 모습 등... 이미 그들은 효율 따위 잊은지 오래입니다. 어린이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그리고 어른들에겐 추억의 한켠으로 비춰지는 제스처가 가득합니다. 전대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연출로 꽉꽉 채워진 작품이예요.

단순히 추억만 건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구성도 제법 충실합니다. SRPG의 기본적인 뼈대 위에 스킬, 장비, 능력치 시스템을 얹었고, 히어로들 역시 색 별로 능력치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다소 평범할 수 있지만, 독특한 소재와 그래픽이 이러한 단점들을 메꿔주고 있죠.

여담으로, 이 게임은 실제 상황이 아닙니다. 게임 자체가 '전대물 촬영'을 콘셉트로 했어요. 실내 배경도 진짜가 아니라 실내처럼 꾸민 '세트장'이며, 야외 전투 역시 다 촬영의 일부라는 거죠. 한마디로 주인공들의 직업은 도시의 수호자가 아니라 '배우'입니다. 머리가 쑥쑥 커버린 우리 '어른이'에게 정말 딱 맞는 설정 아닌가요?

킥스타터로 개발비를 모은 '크로마 스쿼드'는 2015년 4월 30일 정식 출시되었고, 현재 공식 홈페이지에서 15달러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GOG에서는 구매 가능하지만, 스팀은 지역제한에 걸려 정상적으로 노출되지 않으므로 참고 바랍니다.






3. 타이탄 소울즈 - '인생, 그 까짓 거 한 방이지!'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을 위한 게임입니다.

[▲ 타이탄 소울즈 게임플레이 영상]

말 그대로 한 방!! 정말이지 남자를 위한 게임입니다. '완다와 거상'의 그 무지막지했던 녀석들도 한두번의 실수는 만회할 기회를 줬는데, '타이탄 소울즈'의 보스들은 자비란 게 없어요. 플레이어는 말 그대로 '한 대'만 맞으면 바로 눕습니다. 게다가 녀석들 잡으라고 제공되는 무기는 활과 화살 뿐... 설상가상으로 화살은 딱 한 발만 갖고 있어요.

영상에서 볼 수 있듯 '타이탄 소울즈'는 전형적인 보스러쉬 게임입니다. 거추장스런 일반 몬스터 따위 싹 치우고, 남자 대 남자로서 보스와 시원하게 한 번 놀아보는 작품이란 거죠. 각 보스는 별도의 패턴을 지녔어요. 플레이어는 몇 번이고 싸우고, 또 죽어가며 이를 학습해야 합니다.

아까 제가 화살 딱 하나만 갖고 있다고 알려드렸죠? 이 화살이 빗나가면 다시 회수를 해야 합니다. 별도의 회수키가 있는데, 화살을 회수하는 동안은 움직일 수가 없어요. 뭐, 이쯤 되면 개발자 마인드가 어땠는지 알 수 있죠. '어디 한 번 깨 봐' 이런 겁니다. '다크 소울'이나 '데몬즈 소울'처럼.

무슨 이런 게임이 다 있냐고 손사래를 칠 수도 있겠는데요. 다행히 자비심 없는 게 플레이어한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타이탄 소울즈'에 등장하는 보스 역시 특정한 약점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 화살이 한 방이라도 꽂히면 즉시 파괴됩니다. 말 그대로 영혼의 데스매치. (물론, 보호막으로 약점을 감춘 보스도 있습니다.)

순수 도트 그래픽이라기보다는 도트'풍' 그래픽이며, 화려하면서도 속도감 넘치는 연출이 가득해 시각적인 즐거움까지 잡았습니다. '타이탄 소울즈'는 스팀에서 구매 가능하며 가격은 14.99달러입니다.






4. 크롤 - 손맛, 속도감 모두 꽉 잡은 웰메이드 액션 게임

[▲ 크롤 그린라이트 트레일러]

여러 방면에서 특징이 뚜렷한 작품입니다. 다소 투박해보이는 도트 그래픽이나 필터링 없는 연출 덕분에 굉장한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고, 시스템 역시 인디게임 특유의 번뜩이는 창의력으로 무장했습니다.

'크롤(Crawl)'은 인디 액션 게임이지만, 액션성과 밸런스 측면에서 상당한 퀄리티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총 4인의 플레이어가 참가하는 구조로, 한 명은 용사를, 나머지 세 명은 용사를 저지하는 악마를 담당하게 됩니다. 용사는 최종보스를 물리치고 던전을 탈출하면 승리합니다. 당연히 악마들은 이를 저지해야 하고요.

재미있는 점은 한 악마가 용사를 죽이면, 자신이 용사가 되어 최종 보스를 죽이러 가야한다는 겁니다. 즉, 다른 플레이어의 안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진짜 용사이고, 보스 죽이는 것도 나야' 이런 마인드가 우대받는 세계입니다.

'크롤'의 매우 빠른 템포의 액션을 보여주지만, 싸울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협소한 편입니다. 즉, 숙련된 컨트롤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구조예요. 작은 전장임에도 여러가지 상황이 연출되는데, 도트 그래픽으로 나타낼 수 있는 표현력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여러 플레이어가 참여해 즐기는 구조임에도 온라인 멀티 플레이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로컬 협동... 즉 한 기기로 여러 명이 즐기는 구조로, 이로 인해 게임의 장점이 가려지지 않을까 우려되는데요. 아직 개발 중인 작품인 만큼, 이부분은 꼭 개선되기를 바라 봅니다.

'크롤'은 스팀에서 '얼리엑세스' 형태로 출시되었고, 가격은 9.99달러입니다. 개발 중에 이미 수많은 상을 쓸어담은 게임인 만큼, 액션을 좋아하는 유저에게는 멋진 선물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5. 핫라인 마이애미 - 스타일리쉬 2D 그래픽의 모범 사례.

* 잔혹한 표현이 있으니 시청에 주의 바랍니다.

[▲ 핫라인 마이애미 '마스크' 트레일러]

2012년에 출시되었고, 전체적인 완성도에서는 이미 검증을 끝낸 작품입니다. 2D, 그것도 탑뷰라는 제한적인 조건 안에서 매우 뛰어난 액션을 담아내 외국 리뷰어들의 찬사를 줄줄이 받아내기도 했지요.

게임메이커로 제작된 '핫라인 마이애미'는 클래식하면서도 사이키델릭한 그래픽과 사운드로 출시와 동시에 인디 게임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상도 꽤 많이 받았는데, 인디 게임 게임 페스티벌뿐 만 아니라 IGN 어워드, 유로게이머 어워드와 같은 메이저 행사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이 게임은 지금까지 소개한 네 작품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잔혹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리는 거예요. 3D도 아니고 사실적인 2D 그래픽이 아닌데도 다른 고어 게임 저리가라 할 만큼 표현력이 강렬합니다.

저는 오히려 2D 도트 그래픽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저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큰 만큼, 보여지는 그래픽 대비 유저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황은 훨씬 더 잔혹하다는 거죠. 대담한 색채를 사용한 것도 더 끈적한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합니다.

'핫라인 마이애미'는 그래픽과 더불어 사운드 측면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특히 BGM이 그렇습니다. 건조하면서도 흥겨운 템포를 가진 음악 자체의 완성도도 높지만, 임무를 마무리하고 시체 사이로 걸어 나오는 순간의 정적은 '무음도 연출'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입니다.

게임이 게임이니만큼 누구에게나 추천하기는 어려운 작품. 하지만, 잔혹한 표현에 거부감이 없다면 꼭 한번은 즐겨봐야 하는 게임입니다. 후속작인 '핫라인 마이애미2'가 애매한 레벨 디자인과 버그 등으로 전작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더 가치가 높지요. 스팀에서 구매 가능하며, 가격은 9.99달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