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게임을 포함한 각종 영상 매체를 즐길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성우들의 음성이다. 그저 입만 움직일 뿐인 수많은 캐릭터들은 성우들의 음성이 가미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캐릭터로서 완성된다. 캐릭터와 성우의 음색이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팬들은 '초월더빙'이라고 칭찬하며 그 캐릭터에 더더욱 빠져들고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18년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이장원 성우 역시 지금까지 수많은 캐릭터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아즈모단(디아블로3), 그라가스(LoL), 만노로스(WOW) 등 한 덩치 하는 캐릭터는 물론이고 올라프(겨울왕국), 킬러 비(나루토), 여관주인(하스스톤)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까지 모두 그를 거쳐 완성되었다. 성우들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을 즐기지 않는 독자들은 '성우가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매체를 즐기는 독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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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도 될 줄 몰랐던 성우의 길, 모토는 틀려도 당당하게!


이장원 성우를 만나러 간 곳은 도곡동의 한 녹음실이었다. 그는 이 날도 연기에 몰두하며 또다른 캐릭터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녹음에 집중한 이장원 성우의 모습은 그야말로 '프로'의 모습이었다.


녹음을 마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장원 성우에게서는 베테랑 성우의 여유로움이, 목소리에서는 호탕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자신이 맡아 온 대부분의 캐릭터 만큼이나 한 덩치 하는 그의 외관 때문이었을지도. 하스스톤이 큰 인기를 얻은 덕분에 스스로 조금 더 '핫'해졌다고 자신을 소개한 이장원 성우와의 인터뷰는 녹음실 근처의 카페에서 시작됐다.


노래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시던데, 성우가 되시기 전엔 음악 쪽을 전공하셨나요? 성우 이전엔 어떤 걸 준비하셨나요?

"음악 전공은 아니고요, 제가 중앙대 연극영화과 연극 학과 출신이었어요. 어쩌다 보니까 성우를 하게 됐죠. 따로 준비한 건 없고 학교 수업을 하다 보면 항상 연기 시험을 보거든요. 보통은 연기 학원에서 배우면서 경험을 쌓는데 우리는 전공이니까 따로 연기를 배울 필요가 없었죠."


처음부터 성우를 준비하셨던 게 아니군요? 그럼 어떻게 해서 성우가 되신 건가요?

원래는 성우를 잘 몰랐어요. 제가 성우가 될 줄도 몰랐고요. 언젠가 kbs 성우분들과 함께 교육 연극을 하게 된 적이 있어요. 같이 일을 하다보니 성우분들과 친해졌죠. 그러다가 성우 시험이 있다고 해서 연극하던 사람들끼리 우루루 몰려가서 공채를 봤어요. 성우도 다른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연기력이 중요하거든요. 결국에 그 때는 떨어졌죠.

별다른 생각 없이 두 번째로 성우 지원 원서를 넣었었는데 아버지께서 제가 숨겨둔 성우 지원 원서를 보시고 말았어요. 제가 그냥 연기 쪽으로 계속 가겠다고, 성우 안 한다고 하는데도 아버지가 저를 시험장으로 끌고 가셨어요. 거기서 성우 공채 합격을 했죠. 그 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나름 영화도 많이 찍고 콜도 왔는데, 성우가 되면 전속 계약이라 다른 활동을 전혀 할 수가 없었거든요. 영화냐 성우냐에서 고민을 많이 했죠.

결국 마음을 정리하고 영화 쪽에 꿈을 접고 성우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정말 성우가 어렵더라고요. 목소리로만 하는 일이라 쉬울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모든 감정을 소리로만 표현해야 하니까 정말 힘들어요.


사실 미형의 목소리는 아니신데, 미형인 목소리를 지닌 다른 선배, 동기 성우 분들이 부럽진 않았나요?

부럽다기보다는 '내가 저 목소리의 1/3 정도만 좋았어도 돈을 더 벌었을텐데...' 하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거기까지 말한 이장원 성우는 크게 한 번 웃었다. 웃음소리 또한 호탕함 그 자체였다. 만일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웃는 사람이 있다면 옆에 CG로 '호탕'이라는 자막이 붙을 것만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사실 부럽단 생각은 안 해요. 왜냐하면 제가 평범한 역할을 맡은 적이 없거든요. 그게 재밌더라고요. 정말 목소리가 부러웠던 성우분은 이정구 선배님이었어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와 하면서 저 분은 진짜 성우다 싶었죠. 더빙도 기가 막히게 잘 하시고요.

문득 이장원 성우는 자신이 처음 맡았던 배역을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대답은 '노'였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우, 배우 등의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첫 작품을 반드시 기억할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기자의 선입견이 깨진 순간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처음 녹음을 했을 때의 심정을 대신 물었다.

데뷔를 KBS 미디어 영화에서 했는데 전속 때는 라디오밖에 못 해요. 프리로 풀려야 TV에도 나올 수가 있죠.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으니 저 같은 초짜 성우가 라디오 녹음 현장에 가서 얼마나 떨었겠어요. 많이 긴장했죠.

하지만 저의 경우엔 배짱이 있어서 떨리는 데도 안 떨리는 척 했죠. 이 쪽 계통은 드라마를 찍든 뭘 하든 NG가 났을 때 '아, 어쩌지'같은 태도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등 풀죽은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좋게 보지 않아요. NG를 내도 "아이구, 죄송합니다! 이번엔 잘 할게요!" 처럼 능청스럽게 넘기면서 재차 연기를 준비하면 좋게 보죠. 담력 큰 사람이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후배들한테도 담력을 키우라고 항상 말하곤 합니다. 틀려도 자신있게 틀리라고요.


그럼 일을 시작하신 후로 가장 어려웠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반대로 가장 잘 맞았던 역할도 듣고 싶네요.

'세월따라 노래따라'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MC를 16년을 했어요. 그 때가 제일 힘들었죠. 연기가 문제가 아니라 진행이 어려웠어요. MC라는 건 전화 인터뷰도 하고, 초대 손님 인터뷰도 해야하는데, 그게 그냥 되는 게 아니에요. 다 연습을 하고 멘트도 준비해야 하죠. 그런데 프로그램이 절대 대본대로만 가지 않거든요. 원로 가수분들을 초대했을 때 그분들께서 대답을 단답형으로 하실 경우엔 식은땀이 절로 나요. 멘트를 이어가는 건 제 몫이니까요.

이장원 성우는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의 기억도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일까. 성우로서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냐고 묻자 그는 3D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의 펭귄을 아느냐고 물었다.


마다가스카의 펭귄 더빙에서 줄리언 대왕 캐릭터를 맡았어요. 녹음을 할 때 PD님이 그냥 '특이하게' 해달라고 주문을 하셨어요. 제가 맡은 캐릭터가 혀 짧은 인도식 영어를 쓰는 캐릭터였는데, 캐릭터 구상이 정말 힘들었죠.

음, 잘 맞았던 역할은... 없는 것 같네요(웃음). 한 번도 녹음을 편하게 한 적은 없어요. 나루토 더빙을 할 때 킬러비라는 캐릭터를 맡은 적도 있었어요. '킬러비'라는 이름이 뭔가 멋있어서 바로 수락했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캐릭터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말도 안되는 랩을 하질 않나... 진땀 뺐죠.



■ 이장원은 여관주인? 하스스톤이란 이름의 날개를 달다!


이장원 성우는 경력이 오래된 만큼 수많은 더빙 작업을 맡아왔다. 그런 그가 일반 대중에게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된 것은 하스스톤의 여관주인을 맡으면서부터였다. 하스스톤을 플레이하면서 가장 자주 들을 수 있는 목소리는 바로 여관주인이다. 하스스톤에서 가장 중요하고 살 떨리는 순간인 카드팩을 개봉할 때, 모험모드를 진행할 때, 대전 상대를 찾을 때도 언제나 여관주인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듣게된다.

하스스톤이 모바일로 이식되고 유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북미 여관주인 목소리와 국내 여관주인 성우를 비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이장원 성우의 여관주인을 찬양하는 목소리는 늘어만 갔다. '희귀 카드!'나 '그 상대는~'으로 시작하는 여관주인 특유의 목소리는 유행처럼 번졌고 마침내 온게임넷에서 진행하는 하스스톤 토너먼트 결승전 무대 소개 멘트 역시 여관주인이 맡게 됐다.


▲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이장원 성우의 여관주인!

이장원 성우님 하면 이젠 하스스톤 여관주인이 빠질 수가 없죠? '갓장원'이란 별명까지 얻으셨는데, 여관주인 캐릭터를 보고 '이건 내 거다'란 느낌이 왔나요?

사실 제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을 처음 했을 때 드워프 남캐를 했어요. 그걸 블리자드에서 알았는지 절 섭외하더라고요. 영어 성우도 딱 드워프같은 목소리인데 저는 조금 더 한국적인 드워프 소리를 내보고 싶었어요.

대본을 받아본 후에는 분량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어요. 여관주인이란 사람이 여관은 안하고 뭘 계속 소개하더라고요(웃음). 거기다 처음에 톤도 높게 잡는 바람에 하루종일 그 높아진 톤으로 '그 상대는~'을 외치니까 죽을 맛이었죠. 나중에 시네마틱 영상 더빙을 하면서 노래도 하다보니까 인지도가 오른 것 같아요.


하스스톤 CM송을 여관주인 톤으로 직접 부르셨는데 노래가 정말 일품이었어요. 목소리를 여관주인 톤으로 바꾸고 노래까지 하려면 많이 힘들지 않나요?

아이고, 엄청나게 힘들었죠(웃음). 그런 녹음이 또 한 번만에 OK가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부르고 또 불렀는데 심지어 노래에 1안, 2안까지 있었으니 이것저것 다 하다보면 얼마나 오랫동안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도 못할 정도였어요.

광고가 방송을 탄 후로도 시간이 한참 지나서 지인이 반응을 알려줬어요. 제가 원래 그런 걸 일일히 안 챙겨보기 때문에 몰랐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는 걸 그 때 알게 됐죠. 그 덕분인지 나중에 온게임넷에서도 연락이 와서 대회 결승에 맞춰서 소개 멘트도 말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아주 뿌듯했습니다(웃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장원 성우는 본인이 더빙하는 게임들을 플레이 해볼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많이 했다는 말에 왠지 이장원 성우라면 게임을 해 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하스스톤을 즐겨 하시나요? 그 외에도 본인이 더빙한 게임들을 해 보는 편이신가요?

그럼요. 저는 제가 녹음한 게임은 웬만하면 다 해봅니다. 하스스톤도 물론 해 봤고요. 하지만 실력이 좋진 않아서 했다하면 거의 져요(웃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나 디아블로3 등등 다른 게임을 더빙한 후에도 그 게임을 했어요.

만약 제가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PD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기 방향 하나하나를 다 잡아줘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에요. 하지만 제가 게임을 한다면 이 캐릭터가 어떤 역할이며, 성격이 어떤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어요. 그럼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아도 어떤 방향으로 연기를 할지 제가 알 수 있죠. 남은 건 제가 연기만 잘하면 되니까 얼마나 편해요?

이장원 성우가 더빙한 게임 내 유명 캐릭터들을 모아보면 만노로스, 아즈모단, 그라가스, 여관주인 등 하나같이 한 덩치하는데다 미형과는 담을 쌓은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다. 그도 잘생긴 주인공 역할을 맡아보고 싶은 욕심이 있진 않았을까? 다른 유형의 캐릭터 더빙에 대한 욕심은 없었느냐고 묻자 이장원 성우는 손사레를 쳤다.

다른 유형 캐릭터는 저한테 맞질 않아요. 그래서 욕심도 안 나요. 잘 생기고 멋있는 캐릭터? 저한테 줘 봤자 목소리와 매치가 안돼서 안 어울려요. 저는 저한테 맞는 것만 열심히 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 이장원 성우가 맡은 캐릭터들. 다들 한 덩치 한다. (왼쪽부터 아즈모단, 만노로스, 그라가스)

'괴물 목소리 전문'으로 통하는 다른 동료 성우분들과 함께 파이브 몬스터즈란 그룹도 만드신 적이 있죠. 이 그룹은 어떻게 해서 결성하신 건가요?

(웃음)누가 만들자고 해서 만든 건 아니에요. 여자 성우들은 쥬얼리니 뭐니 해서 이런저런 모임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걸 보고 우리도 '괴물 전문' 모아보자고 해서 만들어진 게 파이브 몬스터즈에요. 서로 시간대가 안 맞아서 특별한 활동은 하지 못하고 지금은 해체는 했는데 서로 단체 채팅방에서 아직도 얘기는 나누고 있죠. 우리같은 '썩은 목소리'들은 흔치 않거든요(웃음).

그렇다고 이장원 성우가 스스로 말한대로 '썩은 목소리'의 캐릭터만 맡은 것은 아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가장 유명한 캐릭터가 바로 겨울왕국의 올라프. 우락부락하고 악역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간의 캐릭터들과는 달리 덩치도 작고 귀여움, 순수함이 부각된 캐릭터다. 어린아이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캐릭터임은 물론이다. 천만 관객을 끌어모은 흥행작의 등장 인물을 맡은 소감은 어떨까?

▲ 아이들이 워낙 좋아하는 캐릭터인 탓에 겪는 애환도 있다고...

겨울왕국에선 귀여운 캐릭터인 올라프를 맡기도 했었죠. 평소 맡는 캐릭터완 거리가 먼 인상의 캐릭터이기도 하고 영화도 대박을 쳐서 애착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올라프는 성우인 저조차도 그 캐릭터를 맡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어요. 제가 평소에 하던 캐릭터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요(웃음). 물론 당연히 애착이 가죠. 제가 맡은 캐릭터들 중 정말 몇 안 되는 정상적인 캐릭터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전화와서 뜬금없이 저보고 "야, 너 올라프라며? 우리 애한테 올라프 좀 해 줘" 하면서 자기 아이들한테 전화 바꿔주면 난감하죠(웃음). 그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그럼 자녀분들도 아버지가 올라프인 걸 알고 있나요? 자녀분들께 본인의 작품을 보여주기도 하나요?

알고는 있어요. 그런데 제가 결혼을 늦게 해서 아이들이 나이가 정말 어려요. 그래서 그냥 자기 아빠가 올라프라는 건 아는데 워낙 어리니까 그런 얘기는 친구들끼리 서로 안 하는 것 같아요. 아마 애들이 8~9살 정도 됐다면 자기 아빠가 올라프라고 자랑을 하면서 친구들 데려와서 저한테 올라프를 해 달라고 시켰겠죠?(웃음)

아이들 때문에 집에 TV를 없애서 그런 걸 보여줄 땐 컴퓨터로 보여줘요. 애들이 TV가 없으니까 책을 보더라고요(웃음).


수많은 게임, 애니메이션, 외화 더빙 작업에 참여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나 애착이 가는 역할이 있나요?

지나가는 행인1, 2에는 당연히 애착이 안 가고요(웃음). 음, 제가 아니면 하기 힘들었다고 느낀 캐릭터가 마다가스카의 펭귄의 줄리언 대왕이었어요. 정말 공들여서 더빙한 캐릭터 중 하나였거든요.

▲ 줄리언 대왕은 이장원 성우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끼는 캐릭터라고 한다.



■ 성우 이장원의 바람, 스타 성우들의 탄생과 올바른 방향의 협업


일본의 경우엔 성우는 연예인과 동급이다. 수많은 스타 성우들이 음반을 발매하기도 하고, TV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유명세를 떨치기도 한다. 원래 성우랑 목소리를 활용한 직업이지만, 일본은 '성우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우' 그 자체로도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다. 반면 한국 성우 시장에서 성우들이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긴 쉽지 않다. 한국의 성우가 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떨까. 조금 무겁기도 하고 예민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한국 성우 시장이 일본에 비해서 작은 편이죠. 한국 성우로서 뭔가 아쉬운 점이 있지는 않나요?

일본은 시스템이 우리랑 달라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도 프랑스나 중국처럼 더빙을 반드시 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스타 성우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외화 편성 시간이 너무 밤늦게 되다보니 스타 성우들은 '스컬리'와 '멀더' 이후로 나타나질 않아요.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은 스타 성우가 나타나기가 힘들어요. 장광 성우님이나 김기현 성우님 같은 오래된 분들은 탤런트로서도 많이 활동했으니까 굉장히 성공한 편이죠. 하지만 그 외에 탤런트를 겸하는 성공한 성우가 얼마나 될까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드라마 촬영을 하려고 할 때, 반대로 드라마 배우가 성우 녹음을 할 때 서로가 경력을 0으로 취급해요. 편협한 시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많이 아쉽죠. 물론 요즘은 그런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서로를 위해 더 배려하는 문화가 생겼으면 해요.

▲ 더 나은 시스템이 정착해 많은 스타 성우가 탄생하기를...

그럼 성우 입장으로서 한국 더빙계에 바라는 점이 있나요?

음... 시장 전체가 제 살 깎아먹기를 많이 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 천만 원 짜리 더빙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작업이 끝나면 이런 류의 작업이 늘어나고, 조금만 참으면 다른 녹음실에서도 천만 원 짜리 더빙을 할 수가 있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걸 못 참아요. 그 잠시를 못 참아서 '같은 성우로 900만 원에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제의를 하는 경우가 정말 많아요. 물론 본인들 입장에서도 먹고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할 떄가 있어요.

어느 정도의 선이 지켜지면서 윈윈을 하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제 살 깎아먹기를 너무 많이 해요. 더빙 시장만 그런 게 아니에요. 피시방, 음식점 너나 할 것 없이 가격 경쟁을 하다가 나중엔 담합을 해서 다시 가격을 올리는 경우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서로 제대로 대접 받으면서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까 안타깝죠.

물론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고 '지금 배가 부르니까 그런 여유있는 소리를 할 수 있다'고 하실 수도 있어요. 때문에 가격 경쟁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는 가요. 하지만 장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언젠가는 이런 문화가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우로서 개인적인 욕심이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성우로서 할 건 다 했다고 생각해요. 유일하게 광고를 잘 못해봤어요. 그런데 광고에 제 목소리를 쓸 일이 사실 거의 없죠(웃음). 제 역할은 주로 애니메이션 등의 더빙이었어요. 저 같은 썩은 목소리가 별로 없거든요(웃음). 물론 다른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긴 하겠죠. 영화라던가 드라마도 시켜준다면 얼마든 할 생각이 있죠. 올 여름에 개봉할 영화에도 출연해요. 물론 분량은 별로 없지만요(웃음).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한마디 해주세요!

장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터넷 댓글 중에 이런 게 있더라고요. "여관주인의 노래를 듣고 병이 나았습니다" 같은 거요. 본인이 재밌다고 생각하고 즐거우니까 그런 댓글을 남겼겠죠? 그런 걸 생각하면 내가 아직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힘든 일도 많은 세상에서 긍정적으로 밝게 살 수 있는 힘을 잠시라도 줄 수 있다면 서로에게 감사한 일이죠. 앞으로도 사람들이 절 보면서 즐거워하고 제 더빙 작품을 듣고 재미있어 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