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로 가는 비행기를 타 본 것이 무려 13년 만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은 내내 비행기 좌석에 처음 앉아본 사람처럼, 마치 한 마리 미어캣이 된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그룹 스테이지 2일 차가 진행될 때부터 한숨도 잠을 자지 않은 상황이라 비행기 안에서라도 잠을 자야 했으나, 자리가 불편해 그마저도 못하고 내내 영화만 봤다.


10시간의 비행 끝에 드디어 미국 땅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로 미국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 실실 웃기 시작했다. 비행기 창문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살면서 미국 상공에서 이 천혜의 자연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앞으로 몇 번이나 있을까? 내 머리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고, 바깥 경치를 감상할 것을 열심히 명령하고 있었다.

비행기 바깥으로 나서면서 간직했던 심장이 터질듯한 두근거림과 떨림, 기쁨은 입국 심사대에서 30분을 넘게 기다리느라 상당히 많이 희석됐지만 여전히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공항을 나서 택시를 타고 30분을 달린 끝에 키 아레나 바로 옆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오후 1시에 도착한 숙소 바로 앞에는 시애틀의 랜드마크 스페이스 니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키 아레나에 볼 일이 없다. 숙소에 짐을 푼 뒤 그룹 스테이지가 펼쳐지고 있는 웨스틴 시애틀 호텔로 이동해야 한다. 날씨는 상당히 더웠지만 전혀 습하지 않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습도 없는 날씨,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빛... 한국의 가을 날씨를 보는 것 같았다. 문득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껏 관광을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쳤지만 생계를 걱정하는 이성이 여행 본능을 말렸다.

호텔 데스크에서 웨스틴 시애틀 호텔로 가는 방법을 묻자 모노레일이 있다는 답변을 해 줬다. 모노레일? 테마파크에서 말고는 본 적이 없는 이동 수단인 모노레일이 여기서는 대중교통으로써 이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모노레일 탑승장을 향해 키 아레나 공원에 들어섰다. 피크닉 가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 때문일까?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키 아레나 공원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따금씩 웃통을 벗은 채 잔디밭에 자리를 펴고 누워 일광욕을 하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 잔디밭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까지!

아름다운 광경에 정신을 못 차리고 방황을 하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모노레일 탑승장을 향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께 모노레일 탑승장 방향을 묻자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시더니 도타를 보러 가는 거냐고 물어보셨다.(거짓말이 아니다!) 이렇게 나이 드신 분이 그걸 어떻게 알지 싶어서 여쭤보자 나와 같은 이유로 길을 묻는 사람이 많았다나.


2.25달러짜리 티켓을 사고 모노레일에 탑승했다. 모노레일이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자 건물 안에 위치한 사무실 내부가 훤히 보였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지하철 터널 안만 보면서 다니던 내게 모노레일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도시 외곽에서 중심지까지 한 번에 연결해주는 편의성에 뛰어난 바깥 경치까지 감안하면 2.25달러라는 티켓값은 충분히 지불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어서 30분은 걸린다는 거리를 모노레일을 타고 2분 만에 도착했다. 1층으로 내려오자 바로 앞에 웨스틴 시애틀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내가 바로 그 TI 현장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항상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던 TI 현장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2층에서 프레스 티켓을 발급받고 4층에 있는 프레스 룸으로 들어섰다. 프레스 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넓었으며, 취재 기자들 역시 많았다. 프레스 룸 한편에는 밸브에서 기자들을 위해 마련한 음식과 음료, 디저트가 즐비했다. 미칠듯한 허기를 느끼던 차였기에 나는 만사 제쳐두고 일단 접시에 음식부터 담아서 우걱우걱 흡입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은 취재하러 온 기자 신분이 아니라 미국 뷔페에 밥 먹으러 온 관광객 A가 되기로 했다.

밸브가 제공하는 음식은 자사 플랫폼 스팀의 할인폭만큼이나 자비심이 없는 칼로리를 자랑했다. 다행히 나는 어릴 적부터 주식이 양식이었기에 음식도 입에 잘 맞았고 체질 덕분에 살찔 걱정 없이 고칼로리 식품들을 즐길 수 있었다. 살아서 언제 또 이런 고급진 음식들을 돈 안 내고 마음껏 먹는 호사를 누려보겠는가.


잠을 전혀 자지 못한지 30시간이 넘었지만 아직 내게 수면은 허락되지 않았다. 기자실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큐오' 김선엽의 불꽃령이 iG와의 대결에서 신의 양날검을 구매하는 장면이었다. 경기 시간과 킬 스코어 상태를 보니 누가 초반에 유리했는지는 몰라도 끝내야 할 때 끝을 못 내고 경기가 진흙탕 속으로 빠진 것이 분명했다.

생존 본능을 발휘해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사이 MVP 피닉스가 iG를 꺾고 1:0으로 앞섰다. 일은 해야 하기에 2세트 밴픽이 시작되기 전에 식사를 마치고 노트북을 펼쳤다. MVP 피닉스는 웃고 MVP 핫식스는 우는 경기가 펼쳐졌다. 모든 일정이 끝난 후 시간을 확인해보니 밤 9시가 넘었다.


짐을 챙겨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으로 내려갔다. 3층에는 선수들의 휴식을 위한 탁구대와 테이블축구판이 놓여 있었다. 하루 일정을 마친 선수들 중 일부는 이곳으로 올라와 탁구를 치거나 옹기종기 모여 테이블 축구를 하며 놀기도 했다. 테이블축구판에서는 '페비' 김용민과 '넛츠', 'kpii'와 엠파이어의 '레졸루션'이 어울려 공을 굴리고 있었고 탁구대에는 나비와 엠파이어의 선수들이 모여 탁구를 치고 있었다.


'덴디'는 탁구 치는 걸 좋아하는지 공을 주고받는 내내 우크라이나어로 신나게 떠들면서 특유의 리액션을 선보였다. 여담으로 '덴디'는 탁구를 진짜 못 한다! 한껏 멋을 낸 스매쉬는 '알로하댄스'의 테이블에 닿지도 않고 땅바닥을 향해 힘차게 내리꽂혔다. '알로하댄스'와의 탁구 대결을 지켜봤으나 3합이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이 '알로하댄스'의 완승이었다. '덴디'는 그럼에도 탁구채 욕심은 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탁구채를 넘겨주지 않았다.

시간이 9시 30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밖은 아직 해가 다 떨어지지 않았다. 해가 이렇게 오래가는 동네인 줄은 전혀 몰랐다. 굉장히 추웠던 프레스 룸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자 적당히 선선한 날씨가 나를 반겨줬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겨우 9시 30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바깥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다. 가게들도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시애틀 중심가가 9시 반부터 이렇게 인적이 뜸해질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 했다.


문을 연 가게에서 먹을 것을 이것저것 사고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니 날이 완전히 어두컴컴해졌다. 서둘러 모노레일을 타고 키 아레나로 돌아오자 스페이스 니들이 등대처럼 빛을 번쩍이며 서 있었다. 나는 문득 시애틀의 야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방을 멘 채 곧바로 스페이스 니들 티켓을 구매했다. 그리고 나는 곧 이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좋은 풍경을 찍어보고 싶다는 욕심에 20달러가 넘는 거금(?)을 주고 티켓을 구매한 것 까지는 좋았다. 10시 30분에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15분간 기다리는 동안 내 바로 앞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의 얼굴과 몸매가 매우 착했단 사실은 더 좋았다. 심지어 내 바로 뒤에 역시 착한 몸매의 여성 2명이 줄을 섰을 때는 하루의 마무리가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잊고 있던 중대한 사실을 떠올렸으니, 바로 내가 극심한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은 불과 1분 남짓이었으나, 그동안 투명 유리 바깥으로 보이는 광경 때문에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팔다리를 덜덜 떨면서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Observation Deck'에 도착하자 나는 쫓겨나듯 뛰쳐나와 마음을 진정시켰다.

제대로 된 풍경 사진을 찍으려면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 말은 나를 지켜주는 이 아늑한 실내를 벗어나 또다시 고소공포증과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티켓값도 지불한 마당에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법.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 이 광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부들부들...

바깥에는 시애틀의 야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때로는 연인들이 모여서 저마다 시애틀을 내려다보며 담소를 나눴다. 개중에는 혼자 있는 내게 자신들의 사진을 찍어달라며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사람들을 붙잡고 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막상 사진을 보고 나니 무서운 상황에서 억지로 웃느라 내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 얼굴을 제외한 사진은 꽤 만족스러웠다.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은 못하지만 시애틀의 야경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이 사진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야 했다는 과정은 둘째치고 말이다.

주변이 너무 어두운데다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는 탓에 근처에서 길을 잃고 키 아레나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고 나서야 간신히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 위에 앉아 그날의 마무리 기사를 쓰고 시계를 보니 이미 12시 반이 넘었다.

평소 잠을 자려고 누우면 잠들기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편이지만 왠지 오늘은 눕자마자 잠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8시간 가까운 무수면 강행군 끝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과 함께 시애틀에서의 첫날밤이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