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이다. 1996년 12월 31일. 수십 년에 걸쳐 전설로 남을 하나의 게임이 세상에 선을 보였다. '핵앤슬래시' 게임의 시초격이자, RPG라는 장르에 잊지 못할 파문을 던진 작품. 바로 '디아블로'다.

'GDC2016'의 마지막 날. 샌프란시스코 모스콘 센터는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보통 행사의 마지막 날이면 조금 여유로울 만도 하건만, 이날은 3일간 이어진 'GDC EXPO'가 폐장하는 날이었기에 여유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신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다.

엑스포가 열리는 '사우스 홀'과 '노스 홀' 사이. 전설적인 개발자이자 '디아블로'를 구상한 인물인 '데이비드 브레빅'의 강연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 두 홀 사이 지하 강연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한편으론 시끄럽기 그지없는 이 상황에 강연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의 강연은 시작 전부터 GDC의 모든 강연 중 최고의 인기를 보여주었다. 강연장에 들어가기 위해 서 있는 줄은 너무나도 길었고, 직선으로 세우면 500미터를 가뿐히 넘어갈 정도로 보였다. 노스 홀과 사우스 홀을 잇는 긴 지하도를 세 겹으로 채운 줄이었으니 말이다.

가까스로 강연장에 들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머리는 이미 흰색이 반 이상을 덮었고, 수염은 미국의 여타 개발자들과 마찬가지로 탐스럽게 길었다. 평소에 글로만 접하던 '데이비드 브레빅'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빌 로퍼'에게 가려져 빛이 바랜 감이 있지만, 명실상부 PC 게임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전설 중 한 명이다.

대학교수라 해도 믿을만한 인물이었지만, 의외의 위트도 갖고 있었다. 연단에 선 그는 서서 강연을 듣는 사람으로 벽을 볼 수 없을 만큼 가득 찬 강연장을 보며 한번 놀란 후 말문을 열었다. 음…. 디아블로가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네요. 그리고 전 이 자리에 그 과정을 말하기 위해 나왔고요. 솔직히 말하면 하도 오래전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여러분을 보니 어떻게든 기억해야 할 것 같아요. 뭐…. 한번 해 봅시다.

▲ 그레이비어드 게임즈, '데이비드 브레빅'

데이비드 브레빅은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블리자드'의 대표이자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그는 개발과 디자인에도 깊게 관여했었고, 디아블로 시리즈의 오리지널 컨셉을 만든 인물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강연은 그의 고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디아블로에 대한 생각은 고등학교 때 했어요. 천사와 악마의 이야기, 그 사이에서 싸우는 인물…. 뭐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릿속에서 섞이고 그랬죠. 제 아버지는 저에게 컴퓨터를 한 대 사주셨었는데, 그 시대 개발자들이 다 그렇듯 저 역시 그 컴퓨터 하나로 엄청나게 많은 시도를 했어요. 게임도 많이 했었죠. 마이트앤 매직, 위저드리…. 전 '로그'를 좋아했고, '로그 라이크'게임들을 사랑하는 청년이었어요. 아! '디아블로'라는 이름은 제가 살던 곳 뒤에 있는 산의 이름에서 따왔어요. 언젠가 꼭 저 이름을 쓰겠다고 벼르고 있었거든요."

이후 학창시절을 마친 브레빅은 '막스, 에릭 셰퍼'형제와 함께 '콘도르'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콘도르는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사였는데, 그들은 보통 스포츠 게임(NFL을 주 소재로 삼았다.)이나 액션 게임을 만들곤 했다. 브레빅은 콘도르에서 게임을 만들면서 과거에 생각했던 '디아블로'의 컨셉을 계속해서 되새기곤 했다.

▲ '디아블로'는 사실 뒷산 이름이다...

그가 생각한 '디아블로'는 'MS DOS'를 기반으로 하는 턴 방식의 전략 RPG였다. 현재의 디아블로가 빠른 속도로 매우 많은 몬스터와 대치하는 게임임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동시에 콘도르가 만들어내는 게임들 또한 개발했다. '디아블로'는 그가 혼자 생각하고 있는 프로젝트였으며, 개발에 필요한 자금도 충분치 않았다. 안정적인 자금줄인 스포츠 게임과 액션 게임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즈음, 데이비드 브레빅과 콘도르는 '블리자드'와 관계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만남은 정말로 우연히 일어나게 되었는데, 당시 데이비드 브레빅과 콘도르는 'DC 유니버스'를 소재로 한 대전 액션 게임인 '저스티스 리그 태스크 포스'를 콘솔 버전으로 이식하고 있었다.

게임 개발 중, 브레빅과 콘도르는 '저스티스 리그 태스크 포스'를 게임쇼에 선보였고, 그곳에서 마치 도장으로 찍어낸 듯 똑같은 '저스티스 리그 태스크 포스'를 보게 된다. 똑같은 삽화와 똑같은 게임 내용. 스쳐 나가듯 보면 아예 같은 게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 'CES'에서 같은 게임을 내놓은 콘도르와 실리콘&시냅스

알고 보니 두 회사는 같은 게임의 콘솔 이식을 맡고 있던 것이었고, 두 게임은 애초에 하나였다. 그렇게 두 개발사는 서로 안면을 트게 되며, 이때 콘도르가 만난 개발사가 바로 '실리콘&시냅스'. 얼마 후면 '블리자드'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개발사였다.

한편, 브레빅의 '디아블로'는 개발에 난항을 겪게 되었다. 그 당시 미국 게임 시장은 RPG보다는 스포츠와 액션 게임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고, 브레빅은 디아블로의 개발비를 투자받기 위해 스물 다섯 곳 이상의 투자처를 찾아다녔지만 단 한 곳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RPG의 시대는 끝났어요."

그때, '블리자드'가 브레빅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콘도르의 재정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고, 그들이 디아블로에 투자할 수 있는 개발비는 한계가 있었다. 블리자드 또한 재정이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워크래프트2'를 성공적으로 런칭했기 때문에 콘도르와 디아블로에 관심을 둘 정도는 가능했다.

그렇게 블리자드와 콘도르는 '디아블로'라는 공통적인 프로젝트를 두고 협업에 들어갔다. 여기서 디아블로 시리즈의 정체성을 가른, 어마어마한 결정이 이뤄진다. 콘도르와 브레빅은 '디아블로'의 정체성을 '로그 라이크'게임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과거의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턴제' 게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 '턴'이냐 '실시간'이냐

하지만 블리자드는 '실시간'이 더 어울릴 거라 주장했고, 브레빅은 이 의견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브레빅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당시 블리자드에서 지원을 온 개발팀은 게임을 '실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어요. 하지만 저는 그전까지 단 한 번도 디아블로를 '실시간'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죠. 그들의 말은 저에게 완전히 헛소리였어요. 콘도르에서 함께 해온 개발자들은 고심 끝에 실시간이 더 어울릴 거라는데 동의했죠.

지금까지 개발해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거죠. 그 당시에 전 엄청나게 좌절했고, 거의 2주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좌절은 최선이 아니었어요. 스스로 '실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이 사안을 투표에 맡기자고 말했고, 투표에서 저 혼자만 턴제 게임으로 만들자고 주장했어요. 이쯤 되니 어쩔 수 없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개발비나 왕창 달라고 하고 일단 좀 놀았어요(웃음)."


이렇게 브레빅의 의견과 관계없이 개발의 방향은 '실시간'으로 고정되었고, 다시 의욕을 찾은 브레빅은 다시 코딩을 시작해 '실시간 디아블로'의 첫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게임을 처음 켜 보았을 때, 그는 완벽하게 새로운 이 게임에 빠져들었다.

"코딩을 마치고 게임을 켰어요. 턴제로 움직여야 할 캐릭터가 내 마우스 클릭에 따라 움직이더군요. 생소한 경험이었어요. 캐릭터를 이동시켜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다가 첫 해골을 만났어요. 그리고 클릭하니 칼을 휘둘러 해골을 때리는데…. 하나님 맙소사! 게임이 이렇게 멋질 수 있다는걸 그때 처음 느꼈어요. 한참 소리를 지르다 밖을 딱! 보는데 막 햇살이 나만 비추는 것 같고…. 뒤에 아기 천사가 날아다니는 것 같고. 하여간 이 게임은 너무나 멋졌어요."

▲ 브레빅은 처음 실시간 버전을 돌리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액션 RPG의 탄생 순간을 직접 겪었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당시 '콘도르'의 여유 예산은 30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는 디아블로를 그대로 진행하기에는 부족한 액수였다. 이때 '3DO'가 새로운 풋볼 게임을 만들 거라며 100만 달러를 제시했고, 콘도르에게 이 100만 달러는 가뭄의 비가 될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그전까지 협업하던 블리자드는 '디아블로'와 콘도르를 진짜 가지고 싶어했고, 200만 달러를 제시한 3DO를 제치고 콘도르를 인수, 콘도르는 '블리자드 노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물론 그전에도 브레빅과 그의 팀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으며, 그 기회 중 몇 가지만 성사시켰다면 그들은 더 많은 개발비로 더 멋진 게임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브레빅의 사업적 안목은 형편없었고, 그는 그 당시의 결정들을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었다.

▲ 그렇게 '콘도르'는 '블리자드 노스'로 다시 태어난다.

"어느 날, 어떤 남자(사비르 바티아: Sabeer Bhatia)가 찾아와서 함께 일하자고 했어요. 사무실 일부를 빌려주면 나중에 수익의 10%를 나눠주겠다고 말했죠. 자기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서요. 그는 자신이 새로운 플랫폼의 e메일을 만들 생각이며 이게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제가 볼 땐 영 아니었어요. 그래서 거절하고 게임 개발로 돌아갔죠.

근데 그 남자가 1년 후 '핫메일'을 만들어버렸어요. 1년에 4억 달러를 벌어들였죠. 10%였으면…. 1년에만 4천만 달러(현재 가치 약 2억 8천만 달러)가 그냥 우리 손에 들어올 거였어요. 다시 생각해도 아쉽네요."


▲ 브레빅은 말했다. "내 사업가로서의 자질은 정말 엉망이었어요."

디아블로는 점점 구체적인 게임이 되어갔고, 우리가 아는 지금의 모습이 되어갔다. 그중에서도 멋진 것은 '배틀넷'과 '디아블로'의 시너지였다. 당시 블리자드는 더욱 편하게 게이머와 게이머를 이어주는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 전자 소프트웨어 유통망)를 구상하고 있었고, 디아블로에 이 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하고자 마음먹었다.

이 시스템의 이름이 바로 '배틀넷'. 대한민국 인터넷 보급의 일등공신인 그 배틀넷이다. 당시 브레빅은 게임 코딩과 디자인에는 정통해 있지만, 네트워크 관련 기술은 아는 바가 없었다. 지금에야 온라인 관련 지식 역시 쌓아둔 상태이지만, 브레빅은 당시 네트워크 기술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거라곤 '게이머끼리 전화선을 꼽으면 그 사이에서 뭔가 마법 같은 게 벌어지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훗날 디아블로와 배틀넷은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키게 된다.(이 때 브레빅은 네트워크에 무지했기에 디아블로의 캐릭터 정보를 로컬 컴퓨터에 저장하게 만들었고, 이는 배틀넷에 각종 에디터가 판치는 원인이 되었다.)

▲ '배틀넷'은 '디아블로'와 환상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또한, 처음 브레빅이 구상했던 운영 체제인 'DOS'는 이제 끝을 보고 있었다. 게임을 하나 하려면 복잡무쌍한 코드와 실행 파일들을 직접 찾아내야 했고, 찾아낸다 해도 게임을 돌리기까지 무던한 문제점이 따라왔다. 그래서 DOS 기반으로 더 개발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한 브레빅은 도스를 버리고 개발 환경을 윈도우로 갈아엎어 버렸다.

이후 블리자드 노스는 '다이렉트X'를 적용해 매우 많은 문제점을 해결한 데모 버전을 만들었고, 이 버전은 브레빅과 그의 팀원들이 엄청나게 많은 피드백을 수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모든 피드백이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중에는 미처 그의 팀들이 생각지 못한 금과옥조 같은 피드백들도 들어 있었다.

여기에 블리자드 본사에서 온 지원팀(브레빅은 이들을 '스트라이크 팀'이라 말했다.)의 도움도 굉장히 유용했다. 이들은 브레빅이 엄청나게 고심해 만든 인벤토리 창을 순식간에 유용하게 바꿔버렸고, 마우스로 스킬을 쓰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내 스킬을 쓸 때마다 스킬을 클릭하고 몬스터를 클릭해야 하는 상황을 없애 버렸다.

▲ 스트라이크 팀의 조언은 '디아블로'가 완성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메뉴 UI는 이러한 피드백 과정이 담긴 정수라고 할 수 있었다. 브레빅은 UI를 개발하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RPG 하면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부터 엄청나게 복잡했어요. 너의 키는 어느 정도고 몸무게는 몇이냐, 눈 색깔은 무엇이고 머리 모양은 뭐냐…. 뭐 이런 잡다한 신체 조건을 다 정하고 나면, 이제 캐릭터의 설명을 또 붙여줘야 해요. 뭐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삶을 살았고…. 그렇게 주절주절 쓰다 보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20분은 그냥 날아가 버리죠.

하지만 당시의 게임 대세는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은 빠르게 게임을 즐기길 원했고, 불필요한 설명이나 구구절절 늘어진 설정을 요구하지 않았죠. 과거의 RPG들이 사멸 중인 이유 또한 비슷한 맥락이었고요. 우리는 당시 스피디한 게임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둠'의 메뉴를 주의 깊게 보았고, 이런 식으로 메뉴를 짜면 굳이 너절한 메뉴들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 너절한 설정을 없앤 간단한 메뉴 UI

그렇게 콘도르가 블리자드 노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들어진 후 8개월의 시간이 빛살같이 흘러갔다. 이 대목에서 데이비드 브레빅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는 이 과정이 있었기에 '디아블로'가 세상에 빛을 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더 나은 인생 일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PPT에는 '잘못했던 점'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는 개발 당시의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콘도르가 블리자드 노스로 바뀐 후, 약 8개월간 저는 진짜 기계처럼 일했어요. 개발 뿐만 아니라 게임을 포장하는 등 잡다한 일까지 모두 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아침 4시면 일어나서 회사로 출근했고, 집에 오는 것은 자정이 거의 다 되거나 그보다 더 늦은 시각이었죠. 그리고 잠을 자고, 또 회사에 출근해요. 우리는 어떻게든 크리스마스 전에 디아블로를 만들어내고 싶었고, 그건 팀의 모든 인원이 마찬가지였습니다.

▲ 출시 전 블리자드 노스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당시 내 아내가 임신 중이었고, 예정된 산달이 12월이었다는 거였죠. 하지만 우리 팀은 나 못지않게 일을 열심히 하였고 우리는 디아블로라는 프로젝트에 모든 것을 건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어요. 오히려 이 때문에 팀원들에게 가족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이 신경 쓰게 되면 집중력이 흐려질까 봐 걱정되었죠. 그들은 충분히 내 처지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전 말을 하지 않았어요.

12월 10일쯤, 아내가 회사로 전화했어요. 아내는 고통에 찬 목소리로 진통이 시작된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렇게 달려온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내가 행복하려고 한 일은 맞지만, 그 때문에 가까이 있는 다른 행복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그때가 되어서 다시 가족을 생각할 수 있었고, 걱정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디아블로'는 1주일가량 밀려 31일에 출시되었죠."

아이는 1월 3일에 정상적으로 태어났고, '디아블로'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임업계의 96년을 마무리했다고 봐도 좋을 만한 빅 이벤트였다. 당시 활동하던 매체란 매체는 모두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디아블로에 보냈다. 고등학교 때부터 생각하고, 오랜 역경과 고난을 거쳐 완성해냈다.

▲ 그렇게 디아블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강연의 끝, 박수는 쏟아졌고 데이비드 브레빅은 웃었다. 디아블로는 2001년까지 총 250만 장을 판매했고, 2000년에 출시된 '디아블로2'는 액션 RPG 계에 길이 남을 전설의 히트작이 되었다. 브레빅은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1996년 처음 출시된 '디아블로'의 미개봉 초판본이 들려 있었다.

대중들은 환호했고, 그가 타이틀을 손에 들자 함성을 내질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이 갖고 있을 걸 그랬어요."

브레빅은 웃으며 강연장을 가득 채운 대중에게 말했다.

"갖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