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게임 개발자들은 게이머들의 욕을 귀에 달고 살아간다. 게임이 모든 게이머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간혹 모두의 찬양을 받는 소위 '갓 게임'의 개발자들은 욕 대신 칭찬을 벗 삼아 살아가곤 하지만, 사실상 거의 모든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게이머들의 욕을 먹는 편이고, 그들 또한 이 과정에 익숙해져 있곤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욕을 듣는 직군을 꼽자면 '밸런스 팀'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결정 한번에 많은 게이머가 불만을 표하고, 또 그만큼의 게이머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게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실시간으로 바꿔나가는 일이다 보니 그만큼 게이머의 반응도 뜨거울 수밖에 없다.

'스타크래프트2'의 리드 멀티플레이어 디자이너인 '데이비드 킴' 또한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스타크래프트2 발매 이후, 그는 수없이 많은 스타크래프트 팬덤의 도마에 올라왔고, 비판과 칭찬의 홍수 속에서 꿋꿋이 스타크래프트2의 밸런스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 스타크래프트2 리드 멀티플레이어 디자이너, 데이비드 킴

NDC2016의 2일 차. 데이비드 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강연 주제는 복잡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순한 편이었다. 제목은 '스타크래프트2 멀티플레이어 밸런스 디자인'. 복잡한 수치나 상세한 설명이 아닌, 밸런스 디자인의 기초적인 부분을 다루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의미는 남달랐다. 일반 게이머에게 큰 영향을 주지만, 심도 있게 생각하기는 어려운 스타크래프트2의 밸런싱 철학. 과연 어떤 모습일까?

데이비드 킴은 먼저 스타크래프트2 개발팀이 갖고 있는 밸런스의 3대 요소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하나의 완성된 게임을 밸런싱하는데 중요한 것은 '공평성'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공평성'에 두 가지 요소를 추가했는데, 하나는 '재미',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양성'이었다.

▲ 재미, 공평, 그리고 다양성

모든 게임은 재미를 추구한다. 게임에서 승리하는 건 물론 즐겁지만, 그 과정에서도 충분한 재미를 느껴야 한다. 데이비드 킴은 재미를 놓친 밸런싱의 사례를 하나 들었다. 과거 자유의 날개 시절, 저그의 최종 테크는 무리 군주와 감염충, 그리고 타락귀를 베이스로 가시 촉수를 곁들인 조합이었다. 이른바 '무감타'라고 불리는 이 조합은 전통의 '저그'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상대적으로 정적인 조합이었다.

이에 맞춰 상대의 전략도 항상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자잘한 견제가 아닌 큰 교전은 꺼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200의 인구수를 꽉 채운 후 단 한 번의 대결로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데이비드 킴은 이때의 사례를 말하며 "수치상의 승률은 비슷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심각하게 재미가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 공평함이 '재미'를 죽여서는 안 된다.

'다양성' 또한 굉장히 중요한 코드이다. 여러 번의 게임이 전부 같은 구도로 진행되어 버린다면, 게임을 하는 이들이 재미를 느낄 리 만무하다. 나아가 공평성을 해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 때문에 모든 게임이 여러 단계의 전략적 분기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양성'의 핵심이다. 다양한 맵의 추가는 이런 '다양성'을 더욱 살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어 데이비드 킴은 실질적으로 스타크래프트2가 어떻게 디자인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는 스타크래프트2가 어떤 게임인지 알리는 정체성임과 동시에, 이어질 수정과 보완 작업에서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되어주는 개념들이다.


▲ 스타크래프트2의 디자인 기조

1. 비대칭 디자인

스타크래프트2의 각 종족은 나름의 특징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테란'의 경우 다른 종족에는 없는 메카닉의 형태 변환이라는 코드가 있다. 공성전차가 공성 모드를 취한다거나, 화염차가 화염기갑병으로 변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저그의 '변태'시스템이나 프로토스의 '실드' 시스템 역시 이렇게 각 종족의 개성을 살리는 시스템이다.

동시에 이 비대칭 디자인은 게임의 진행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프로토스의 광전사와 테란의 해병이 싸움을 벌인다고 생각할 때, 극 초반에는 광전사가 해병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해병이 전투 자극제를 업그레이드하게 되면 오히려 광전사를 쉽게 상대할 수 있고, 광전사가 '돌진' 업그레이드를 마치면 또 역으로 해병을 상대로 높은 효율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가격만큼의 해병이 몰려 있을 경우 광전사는 해병을 상대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렇듯 단순히 두 유닛 사이에서도 상성 관계가 변화하고, 유불리가 달라진다. 이것이 스타크래프트2의 비대칭 요소다.

▲ 해병과 광전사의 유불리는 시시각각 변한다.


2. 깔끔한 디자인

'깔끔함'은 유닛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설정을 부과하지 않고, 유닛이 각자의 구실을 하도록 만드는 개념이다. 스타크래프트2의 유닛들은 서로 역할이 겹치지 않는 선에서 분배되어 있다. 예를 들어 과거 테란의 유닛으로 물망에 올랐던 '투견'은 결국 삭제되어 본 게임에 나오지 못했다. 이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가겠지만, 투견이 사라진 결정적인 이유는 기존의 테란 유닛인 '불곰'과 역할이 겹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각각의 유닛은 그 해당 역할 외에 다른 코드를 덕지덕지 달고 나오지도 않는다. 블리자드의 다른 게임인 '워크래프트3'의 언데드 진영에는 '디스트로이어'라는 유닛이 있다. 이 '디스트로이어'를 설명하려면 매우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유닛이 만약 스타크래프트2로 오게 된다면, 아마 '디스펠' 정도의 기능을 제외하고는 몽땅 삭제당할 것이다. 그만큼 스타크래프트2의 각 유닛은 '심플함'을 기본으로 한다.

▲ 복잡한 유닛 '디스트로이어'


3. 보수적 디자인

많은 게임이 새롭게 추가되는 콘텐츠와 변화를 통해 게임을 만들어내지만, 스타크래프트2는 아니다. 스타크래프트2의 재미 요소는 오랜 시간을 들여 게임을 마스터해나가며 얻는 보람이다. 그 때문에 디자인 측면에서 다른 게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면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밸런싱 과정에서도 가장 '작은' 부분을 먼저 건드리게 된다. 예를 들어 '군단의 심장' 당시 저그의 동족전은 뮤탈리스크의 힘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명백히 문제였지만, 다른 유닛의 활용을 촉진하기 위해 뮤탈리스크의 성능을 건드리게 되면 저프전이나 저테전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았다. 때문에 밸런스팀은 뮤탈리스크가 아닌 포자 군체에 생체 추가 대미지를 부여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 문제가 되었던 뮤탈리스크 이슈

그 때문에 이슈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 또한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너무 큰 문제라면 빠르게 해결하는 게 옳지만, 어지간한 이슈라면 차분히 관찰하며 수정 여부를 결정하고, 때로는 이 문제를 유저들이 스스로 해결하게끔 하는 것이 바람직할 때도 있다. 모든 이슈에 대응해 빠르게 패치를 하다가는 오랫동안 연습해온 게이머의 노력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데이비드 킴은 실제로 피드백에 대응하는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첫 단계는 이슈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게임의 수정은 명백한 수치가 있다 해도 쉽게 거론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때문에 밸런스팀은 해당 이슈에 대해 여러 가지 데이터를 놓고 교차 검증해 문제의 유무를 가늠한다. 커뮤니티의 피드백과 프로 게이머들의 의견, 실질적인 승률의 데이터 등등 말이다.

▲ 분석해야 할 데이터는 하나가 아니다.

이어 이 이슈가 실질적으로 게임에 해악을 주는 문제인지, 혹은 유저들의 생각이 빚어낸 문제인지, 아니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이슈인지를 판별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유닛만 생산해도 승리할 수 있는 만능 메타가 있다면, 이는 빠르게 수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간혹 이런 일도 있다. 데이터 상의 승률은 문제가 없으나, 게이머들은 이를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경우다.

이런 경우, 밸런스팀은 일단 해당 이슈를 시간을 두고 관찰한다. 스타크래프트2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피드백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수그러들게 된다. 게이머들이 나름대로 실험 과정을 통해 해답을 찾아 나가게 되는 것이다. 해답이 있는 문제는 더는 밸런스를 해치는 일이 되지 못한다. 이는 앞서 말한 '보수적 디자인'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이후 데이비드 킴의 강연은 짧은 질의응답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어떻게 보면 기초적인 수준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강연은 또 아니었다. 데이비드 킴은 디테일한 밸런싱 과정을 설명하기보단, 다른 측면에서 힘을 주었다. 어떤 기준으로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한 것이다.

서두에서 말했듯, 밸런스 디자이너는 수없이 욕을 먹으며 일한다. 데이비드 킴은 '렐릭' 재직 당시부터 디자이너로 일해왔으니 아마 그 기간이 더 길었을 터다. 흥미로운 건, 강연 내내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데이비드 킴을 본 건 여러 차례지만, 찡그린 얼굴을 보았던 기억이 없다. 아무래도 그는 이 일 자체를 즐기는 듯싶었다.

강연이 끝나기 전, 질의응답 중 이런 질문이 있었다. '게이머들에게 수많은 욕을 먹는데, 멘탈 관리는 어떻게 하느냐?'. 데이비드 킴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마 디자이너분들 중에서도 알려진 분들이 욕을 먹곤 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게이머들의 상황도 이해하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는 일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