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날, 저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두통은 어렵게 구한 약의 힘을 빌어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두통을 몰아내기 바쁘게 저는 새벽같이 일어나 경기장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죠.

이번 PGL 2016 섬머는 우한 옵틱스 밸리 스타디움에서 진행될 것이란 말은 들었는데, 막상 경기장에 직접 가 본 것은 CS:GO 대회를 하던 당일이 처음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진행되는 대회인 만큼 대륙의 기상을 받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기장을 상상하고 버스에서 내렸지만 제 생각처럼 그렇게 엄청난 크기는 아니더군요.

경기장 바깥에는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CS:GO, 도타2, 워크래프트3 선수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지는 워크래프트3의 장재호 선수의 사진이 걸려 있었죠. 도타2 MVP 피닉스 팀의 '큐오' 김선엽 선수의 사진도 장재호 선수와 나란히 걸려 있었습니다.

경기장 지하로 가는 입구에는 장재호 선수가 출연한 마우스 광고도 걸려 있었죠. 장재호 선수가 중국에서 가지는 위상이 얼마나 큰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일요일에 진행되는 워크래프트3 대회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요?

▲ 중국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장재호 선수와 같은 선상에 놓인 '큐오' 선수의 사진! 오오...

경기장 바깥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중국 공안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경기장 내부에서 대기하던 인원까지 합치면 아무리 못해도 70명은 훌쩍 넘을 규모였죠. 중국 공안 무섭다는 얘기를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은 탓인지 죄를 지은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눈을 피하게 되더군요.

저희는 공안들을 지나쳐 첫 날 선수들이 연습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침 8시라는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 일정, 그리고 체감 온도 40도를 훌쩍 넘는 폭염에 벌써부터 지친 선수들은 연습실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부터 틀고 몸을 식히기 바빴습니다. 가장 먼저 연습실에 도착한 MVP 피닉스 선수들은 자신들의 게이밍 기어를 꺼내 세팅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손을 풀기 시작했죠.

제일 먼저 세팅을 끝낸 건 '두부' 김두영 선수였습니다. 연습용 방을 하나 파서 스킬 쿨타임을 전부 0으로 설정한 뒤 원소술사를 골라 스킬을 난사하면서 손을 풀기 시작했죠. 그런데 김두영 선수의 원소술사를 가만 살펴보니 그 비싸다는 불멸2 상자 '극도로 희귀' 등급인 '인조커' 스킨을 끼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어떻게 이 스킨을 얻었냐고 물어봤더니 옆에 있던 'MP' 표노아 선수가 답하길, 김두영 선수의 여자친구가 선물하기로 보내줬다고 하더군요. 저는 잠시 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야 했습니다.


▲ 사진을 찍느라 손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CS:GO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저는 연습실을 나와 기자실에서 일을 해야 했죠. 하지만 경기 사이에 쉬는 시간이 30분이 넘어갈 정도로 대회 진행이 느리다보니 자연스레 심심함을 느낀 저는 다시 선수들의 연습실로 들어가 게임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수들은 TI에 초청을 받은 중국 팀인 LGD와 스크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닐라 메이저 당시 MVP 피닉스가 LGD에게만 두 번 져서 탈락했기 때문에 이번 스크림 결과를 꼭 보고 싶었죠. 세 번의 스크림이 진행되는 동안 MVP 피닉스는 두 번은 TI6에서 사용할 조합을, 한 번은 그냥 실험용 조합을 꺼내들었고 2승 1패를 했습니다. 특히 2승 모두 TI6용 조합을 써서 거둔 승리였기에 저는 이번 TI6에서 MVP 피닉스에 거는 기대치가 조금 더 높아졌습니다. 물론 절대 방심할 수는 없겠지만요.

옆 자리에서는 미네스키 팀 선수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MVP 피닉스가 스크림을 끝내고 중국 랭크 게임을 돌리자 서로 팀이 섞여서 아군, 적군으로 매치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양 팀 선수들은 서로 꽤 친한 듯 상대를 죽일 때마다 스스럼 없이 상대편을 쳐다보면서 마음껏 비웃음을 날려주고 소리를 지르면서 게임을 했습니다. 꼭 동네 PC방에 온 기분이더군요.

문제는 MVP 피닉스 선수들이 스크림을 끝낸 뒤 돌린 랭크 게임에서 전부 패배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큐오' 김선엽 선수와 '페비' 김용민 선수가 게임을 쉬지 않고 했는데, 거의 모든 경기에서 패배를 했고 마지막엔 멘탈이 완전히 박살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었죠. 표노아 선수는 이런저런 대회 리플레이를 보느라 게임을 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포렙' 이상돈 선수만 승리를 거둘 뿐이었습니다.


2일 차가 되고 마침내 MVP 피닉스가 경기를 치를 때가 되었습니다. MVP 피닉스는 8개 팀 중 유일하게 TI 진출 팀이란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2승을 내리 따냈고, 3경기도 그대로 승리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CDEC.A를 상대로 2만 5천 골드 앞서던 게임에서 대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죠.

혹 선수들이 멘탈이 상하진 않았을까 걱정되어 선수 휴게실에 들렀는데, 선수들은 여유롭게 게임 내용 복기를 하면서 피자를 뜯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멘탈 문제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네요. 게임 내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연꽃 구슬의 지속시간이 몇 초냐'에 대해 김용민 선수와 김선엽 선수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김선엽 선수는 6초, 김용민 선수는 5초라고 말하면서 내기를 하자고 했죠. 김용민 선수는 "네 말이 맞으면 방금 게임에서 네가 BKB(칠흑왕의 지팡이) 안 사서 진 거 다 잊어줄게. 대신 내 말이 맞으면 계속 BKB라고 옆에서 말하고 다닐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김선엽 선수는 6초가 확실하다면서 핸드폰으로 리퀴드피디아에 접속해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고, 김선엽 선수의 말이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김용민 선수는 그것을 보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BKB라고 외쳤죠.

MVP 피닉스가 그룹 스테이지 경기를 모두 끝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의 운명은 2패를 기록해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태인 통푸의 손에 달렸습니다. 통푸가 CDEC.A를 꺾으면 두 팀이 동반 탈락, 만일 CDEC.A가 승리한다면 CDEC와 CDEC.A, MVP 피닉스가 2승 1패로 3자 동률이 돼서 재경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죠.


MVP 피닉스의 선수들은 휴게실에 모여 앉아 "통푸 짜요"라고 외치며 통푸를 응원했습니다. 이상돈 선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김두영 선수에게 "나 공놀이 게임 한 판만 하고 싶어"라면서 핸드폰을 빌려달라고 말했고, 공 튕기기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김두영 선수가 세운 기록은 116단이었는데, 자칭 당구 고수라고 말한 이상돈 선수는 첫 시도에서 기록 경신에 실패하고 "진짜 막판 한 번만 더 하자"라면서 재도전에 나섰습니다. 2차 시도에서 김두영 선수의 기록을 깨뜨린 이상돈 선수는 기분이 좋아진 듯 온갖 전문 당구 용어를 설명하면서 신기록을 이어갔으나, 160단에서 각도 계산 실수를 하는 바람에 게임이 끝나버렸죠. 멘탈이 조각난 이상돈 선수는 "나 기분 굉장히 안 좋아졌어. 4강 경기할 때 던질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MVP 피닉스의 기도가 닿은 건지 통푸는 CDEC.A에게 서서히 넘어가던 분위기를 뒤집고 승리를 거뒀습니다. MVP 피닉스는 승자승 원칙에 따라 조 1위로 4강에 진출했죠. 그리고 MVP 피닉스는 이번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중국 팀 중 하나로 꼽히던 iG.V를 2:1로 꺾고 결승까지 올라갔습니다. 당구 게임에서 죽어서 4강에서 던질 것 같다던 이상돈 선수는 던지기는커녕 태산같이 버티면서 팀 승리에 엄청난 공을 세웠고요.


iG.V와의 4강전 3세트에서 허스카를 꺼내든 표노아 선수는 그야말로 상대 팀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경기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특히 로샨을 잡다가 iG.V에게 기습을 당하면서 김두영 선수의 대즐이 순식간에 죽고, 표노아 선수 또한 위기에 빠졌죠. 그러나 표노아 선수는 여유만만하게 살아서 빠져나왔고, 허스카 특유의 무지막지한 공격 속도로 상대 팀을 쓸어버렸습니다. 이 로샨 한타에서 상대를 전멸시킨 MVP 피닉스는 그 기세를 몰아 이내 경기를 끝내버렸죠.

경기를 마친 뒤 숙소에 복귀하기 전, 잠시 연습실에 돌아온 선수들은 경기 내용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컴퓨터를 켰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들이 펼쳤던 3세트 경기 리플레이를 켜고 로샨 한타 장면을 다시 보면서 '크'하며 스스로에 취하는 시간을 만끽했죠. 선수들 말로는 그 로샨 구덩이에서 기습을 당했을 때 경기를 졌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구덩이에서 살아나온 표노아 선수조차도요. 도대체 어떻게 살아서 나올 수 있었는지 느린 속도로 리플레이를 돌려봤더니, 표노아 선수가 탈출하는 동안 이상돈 선수의 도끼전사가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도발을 걸어주는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선수들은 "역시 숨은 MVP"라며 이상돈 선수를 떠받들었죠.

선수들은 "(표)노아가 저렇게 말 많이 하는 건 처음 봤다", "목소리도 여태까지 게임한 것 중에 제일 컸다"는 말을 했고, 표노아 선수는 멋쩍게 웃으면서 "이렇게 지기 싫은 게임은 처음이었다"고 답했습니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목소리도 크지 않은 표노아 선수였지만 할 때는 하는 모양입니다. 아니면 2세트에서 자기들의 간판 카드인 이오-가시멧돼지에 역으로 당한 것 때문에 열이 받았거나요.

TI6를 앞두고 벌인 마지막 점검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있는 MVP 피닉스, 그들은 과연 내일 있을 결승전에서 우승을 하고 기분 좋게 시애틀로 떠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