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수들의 뛰어난 피지컬과 화려한 스킬 연계로 이뤄지는 한타 싸움이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잘하느냐 못하냐에 따라서 피지컬 차이와 글로벌 골드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밴픽 전략과 운영 방법이다.

핑크와드 코너는 치열함이 느껴지는 명승부 혹은 밴픽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주는 경기를 선정해 보이진 않지만, 게임 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밴픽 전략, 전술과 운영에 대해서 다룬다.

SKT T1은 작년부터 LoL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지켜왔다. 오랫동안 세계 최강자의 자리를 유지해온 만큼 과연 어떤 팀이 SKT T1의 독주를 끊어낼 것인지도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락스 타이거즈를 비롯한 세계 강호들이 도전장을 내밀어도 한, 두 세트 정도 가져갈 뿐이었다. 어차피 우승은 항상 SKT T1의 몫이었으니까. 롤챔스 섬머 시즌 2라운드에서도 상위권 팀들을 모두 완파하고 5전 전승으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스프링 1라운드부터 SKT T1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팀이 등장했다. 하위권에 있을 당시에도 SKT T1만 만나면 예상을 뛰어넘는 경기력으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주인공인 아프리카 프릭스는 이번 시즌 SKT T1을 상대로 세트 스코어 4:0으로 확실히 압도하고 있다. 이제 아프리카 프릭스의 승리가 단순한 이변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까지 와버린 것이다. 운이 아닌 실력을 입증해나가고 있는 아프리카 프릭스가 어떤 밴픽과 전략으로 무결점의 SKT T1을 무너뜨렸는지 살펴보자.



■ 자존심 걸린 '열심 매치'는 미끼일 뿐? 라인 주도권 내려놓은 아프리카의 속내


'페이커' 이상혁과 '미키' 손영민은 오랫동안 인터뷰를 통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계속 해왔다. 뛰어난 피지컬과 라인전은 누구에게도 밀리고 싶어하지 않는 두 라이너의 성격이 인터뷰를 통해 그대로 드러날 정도였다. 운영의 핵심인 미드 라인전 주도권까지 달려있기에 두 선수의 대결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아프리카 프릭스는 섬머 시즌 1라운드부터 미드 라인에서 몰래 힘을 빼기 시작했다. 많은 팀들이 SKT T1의 중심인 이상혁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기위해 노력할 때, 아프리카 프릭스는 한 수 더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1라운드에서 아프리카 프릭스가 '페이커'의 블라디미르를 상대로 꺼낸 카드는 카사딘이었다. '순간이동'을 활용해 초반부터 다른 라인에 힘을 보태는 데 집중했다. 다른 팀원들이 말리고 있는 동안 '유체화'를 든 블라디미르는 무력해졌다. 카사딘의 빠른 합류 속도는 블라디미르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라운드 첫 세트 대결에서 바루스를 가져간 것 역시 주요 목적은 라인전이 아니었다. 이상혁의 애니비아와 미드 라인에서 치열한 대결 구도가 펼쳐졌지만, 실상은 한타에서 '상윤' 권상윤의 코그모와 함께 긴 사거리로 상대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시즌 5전 전승으로 안정적인 승리의 상징이었던 이상혁의 애니비아였지만, 대치 상황에서 들어오는 무차별 포킹에 물러서야만 했다. 애니비아-시비르 등 상대적으로 사거리가 짧은 SKT T1의 조합은 코그모와 바루스의 카이팅에 서서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어진 2세트에서 '미키' 손영민은 아지르가 있음에도 블라디미르를 가져가는 모험 수를 뒀다. 이전 세트에서 코그모의 사거리 압박을 느낀 SKT T1은 긴 사거리를 자랑하는 아지르를 가져왔다. 이상혁은 아프리카 프릭스와 대결하기 전까지 섬머 시즌에서 아지르로 7승 1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기에 자신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라인전 역시 예상대로 이상혁의 아지르가 쉴 새 없이 블라디미르를 찔러 주도권을 꽉 잡은 상황이었다. 그동안 SKT T1이 드래곤을 손쉽게 챙길 수 있을 정도로 라인전 격차가 심하게 벌어진 상태였다.


위기의 아프리카 프릭스가 블라디미르로 노린 것은 단 하나였다. 좁은 지역 전투에서 화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 20분이 지나고 아프리카 프릭스는 집요하게 바론을 치기 시작했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SKT T1에게 바론을 가져갈 거라고 경고했다. 그럴 때마다 SKT T1은 사냥을 저지하기 위해 좁은 지형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블라디미르가 다수의 상대에게 피를 뒤집어씌우기에 완벽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눈꽃' 노회종의 트런들이 좁은 지형에 벽을 세워 시비르와 같은 '뚜벅이'의 퇴로를 차단했고, '익수' 전익수의 쉔의 그림자 돌진까지 더 해져 SKT T1은 말리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프릭스에게 수많은 패배를 안겨줬던 바론 지역이 어느새 상대 팀이 들어오면 나올 수 없는 '늪지대'가 돼버린 것이다.





■ 아프리카 야생 스타일로 붙어보자! 그림 같은 한타 그려내는 'SKT 붓'을 꺾다


▲ 강력한 CC기를 보유한 챔피언 모두 밴한 아프리카(출처 : OGN 화면)


SKT T1은 운영만 잘하는 팀이 아니다. 지난 2라운드 삼성전에서 보여줬듯이 날카로운 공격으로 상대의 허점을 정확하게 찌를 줄 안다. '뱅' 배준식의 애쉬는 상대의 이동 경로까지 예측해 '마법의 수정 화살'을 적중시켰고, '울프' 이재완의 알리스타는 정교한 토스로 두 세트 연속으로 MVP를 수상한 바 있다. '블랭크' 강선구는 그라가스의 '술통 폭발'을 활용한 깔끔한 이니시에이팅으로 2라운드부터 다시 기세를 한 층 끌어올리고 있었다. 스킬이 하나라도 적중하면 칼 같은 CC 연계로 킬을 기록하는 게 SKT T1 공격 주도권의 비결이었다. 완벽한 설계로 자신들만 킬을 기록하고 유유히 빠져나오는 그림을 그려왔다.

삼성 경기를 본 아프리카 프릭스는 작정하고 CC 조합을 밴해버렸다. 1세트에서 그라가스를 먼저 가져오고 애쉬-말자하-알리스타를 제거했고, 2세트에서는 상대가 애쉬를 밴하자 알리스타-그라가스-말자하를 밴했다. 다른 팀들이 '딜 전교 1, 2등'으로 불리는 '페이커-뱅'의 딜러 라인에 밴 카드를 모두 소진했지만, 아프리카 프릭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SKT T1이 어떤 딜러를 가져가더라도 교전 주도권만 잡으면 우리가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프릭스의 생각은 첫 세트부터 맞아 떨어졌다. 상대에게 이니시에이팅 수단은 변신 직전의 나르 뿐이었다. 그리고 '메가나르 변신'이라는 조건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해버렸다. '듀크' 이호성의 나르가 분노를 관리하며 탑 라인에서 '순간 이동'을 기다리는 사이에 SKT T1은 드래곤 사냥에 성공했다. 빠져나오기만 하면 탑 라인과 드래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챙길 수 있는 상황. 아프리카 프릭스는 나르의 변신이 풀릴 타이밍에 SKT T1을 덮쳤다. 성급하게 순간 이동으로 합류한 미니 나르에게 돌아오는 건 죽음뿐이었다. 이후 전투에서는 코그모와 바루스의 긴 사거리를 활용해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포킹을 넣었고, 변신 타이밍이 되면 자연스럽게 후퇴해버렸다. 마지막 교전에서 나르가 가까스로 이니시에이팅에 성공했지만, 이미 코그모에게 순식간에 녹아버릴 만큼 격차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어진 2세트에서는 아프리카 프릭스 역시 이니시에이팅을 할 만한 픽이 쉔 밖에 없었다. SKT T1은 강선구가 세주아니를 선택해 이니시에이팅과 교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프릭스는 이니시에이팅 수단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상대에게 끈질기게 달라붙을 자신들의 몸과 '점멸'이었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아나키 시절부터 갈고 닦아온 난전 능력은 자신 있었기에 교전이 열리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상대도 CC 연계를 활용한 정교한 일점사가 불가능하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전투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난전에서 빛나는 것은 이상혁의 아지르가 아닌 손영민의 블라디미르였다. 손영민은 라인전에서 목숨을 잃더라도 점멸을 아껴서 이니시에이팅에만 활용했다. 순간적으로 SKT T1의 중심부로 파고들어 광역 딜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혁의 아지르가 원거리에서 어마어마한 딜을 넣었지만, 난전에서 깊게 파고든 블라디미르와 쉔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아지르가 황제의 진영으로 상대를 밀쳐내도 점멸과 이동기를 모두 사용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야생의 한타'로 멋진 승리를 거뒀다.


만약 이상혁이 2세트에서 애니비아를 다시 선택했다면, 난전 속에서 아지르보다 더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SKT T1은 2세트에 다시 등장한 코그모를 보고 사거리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생각부터 했기에 아지르를 가져왔다. 1세트에 등장한 아프리카 프릭스의 미드 선픽 바루스와 코그모가 SKT T1에게 아지르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화려한 슈퍼 플레이에 감춰졌던 SKT T1의 본질을 꿰뚫어봤다. 다른 팀들이 화끈한 '뱅-페이커'의 화력에 감탄할 때, 어떻게 두 선수가 프리딜을 넣을 수 있었는지 파악했다. 자신들의 장점인 교전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까지 고민한 흔적이 밴픽에 드러났다. 최강 SKT T1을 꺾었기에 다른 어떤 상대들도 이제 아프리카 프릭스를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교전만 잘하던 아프리카 프릭스가 어느새 자신들만의 전략과 운영법을 더 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프릭스는 2016 롤챔스 스프링 시즌부터 SKT T1 전을 승리하고 나서 분위기를 타기 시작했다. 세계 최강으로 불리는 팀을 꺾은 만큼 실력에 더 큰 자신감이 붙었을 것이다. 최강을 넘어본 아프리카 프릭스가 2라운드 후반부까지 기세를 이어갈 수 있을지 지켜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