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지휘관?

독일의 장군이었던 남작 쿠르트 폰 함머슈타인-에쿠오르트 상급대장은 자신이 발간한 1933년 판 지휘 교범에 이렇게 썼다.

▣ 장교들의 네 부류

나는 내 장교들을 영리하고, 게으르고, 근면하고, 멍청한 네 부류로 나눈다.

대부분은 이 중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영리하고 근면한 자들은 고급 참모 역할에 적합하다. 멍청하고 게으른 놈들은 전 세계 군대의 90%를 차지하는데, 이런 놈들은 정해진 일이나 시키면 된다. 영리하고 게으른 녀석들은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으므로 최고 지휘관으로 좋다. 하지만 멍청하고 부지런한 놈들은 위험하므로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영리하면서 근면한 자들이 최고라고 생각을 하지만, 이 독일의 장군은 영리하고 게으른 사람이 최고 지휘관으로 알맞다고 말하고 있다. 게으르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게으르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을 부릴 줄 알고, 또 잘 부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세상을 둘로 나눠보는 것도 가능하다. 사람을 부리는 사람, 명령에 따르는 사람.

좋은 지휘관 밑에 있으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널리 알려진 예로 세종대왕이 그렇다. 세종대왕은 여러 업적을 달성한 현왕이었지만, 그 신하들은 그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갖은 업무에 시달린 탓에 건강이 악화된 신하의 사표를 세종대왕이 반려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현왕이었지만, 신하들에게 있어서는 서운한 왕이기도 했다.

내가 로스트아크 CBT를 체험하면서 겪었던 것을 근거로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게으른 사제 아만이다.

아만의 지휘 능력은 지휘 교범을 직접 발간한 독일군 장교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아만이 영리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사람을 잘 부리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아만의 단점은 다른 사람에겐 관대하지만, 자기 사람에게는 엄격하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 그랬듯이 말이다.

아만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자면, 게으르면서 굉장히 자비롭고 동시에 플레이어에게는 한없이 자비 없는 캐릭터이다. 따지자면 좋은 지휘관이다.

아만은 좋은 사제... 분명 좋긴 한데

▲ 그 유명한 아만의 등장


'오늘 우리 마을에 유명한 사제님이 오신다며?' '아, 나도 들었어. 명성이 자자하던데.'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했어.' '각 지역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치유한다지.'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유명한 사제, 아만의 등장에 술렁이는 루나 패스의 모습이다. 아만은 이렇게 병을 고치며 각 지역을 여행하는 정말 좋은 사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만은 레온하트로 가기 위해 루나 패스를 통과하던 중이었고, 그 소식을 들은 여러 사람이 아만을 마중하기 위해 나타났다. 아만의 명성은 너무나 자자해서 레온하트의 외곽에 위치한 촌구석 루나 패스의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다. 심지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암살대가 조직되어 그의 암살을 기도한다. 이렇게 아만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

암살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아만은 내가 걱정된 모양인지 다친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무척 바빴던 모양인지 대답도 듣지 않고, 자신을 찾아달라는 말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푸느라 바빴을 것이다.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이후 아만은 성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 떨어지려는 아만을 구출해낸다. 이렇게 우리 관계는...



성당을 떠나서, 로그 힐에서 아만은 중간계에 몰려드는 어둠을 막기 위해 아크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내게 아크 전설을 믿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 힘이 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홀로 길을 나섰다. '뭔가 찾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이 말은 같이 찾아보자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찾아오라는 이야기일까.

석판의 조각을 찾기 위한 단서가 가리킨 곳에서 코일즈 숲의 도적단들과 마주했고, 전투를 치러야 했다. 마침내 도굴단 대장이 쓰러뜨렸을 때 누군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아만이었다. 내가 뭔가 찾았다고 말하기 전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찾으러 온 것을 보면 머리가 좋은 게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미 내가 상황을 정리한 뒤였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빨리 나타나면 정말 좋겠는데.

게으른 사제, 이유가 있을거야

여정은 계속되었다. 나는 독발톱 도굴단의 동굴에서 악마와 모종의 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이는 도굴단 두목을 발견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두목이 쓰러지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만이 나타났다. 항상 촌각을 다투는 것처럼 바쁘게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정말로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안 보이다가 뜬금없이 나타난 아만이 얄밉기만 하다. 이 인간 일부러 이러는 것일까. 원래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 있어서 그런 걸까. 아만은 두목의 말을 듣고 레온하트가 위험하다는 말과 함께 곧장 레온하트를 향해 달려갔다. 이렇게 착한 사제님께서 늦으신데는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한 번만 더 믿어보자.

악마의 습격을 받은 레온하트는 이미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아만은 어디 있는 거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겁먹은 마을주민'들을 내버려 두고 어디에 갔느냐는 말이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을주민들을 화마에서 구출하고, 악마들과 맞서 싸웠다.

겨우 한숨 돌리고 석판이 있을 성당에 들어서니, 성당은 이미 악마에게 점거당한 뒤였다. 내가 나서려는 참에 아만이 숨 가쁘게 달려왔다. 분명히 먼저 레온하트로 떠났을 텐데 왜 이제야 왔을까. 하지만 아만이 지금에라도 달려왔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한다. 그래, 이번에도 무슨 일이 있었겠지.

갑작스레 등장한 아만은 악마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본 모습을 드러냈다. 아만은 바로 데런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악마의 혼혈 데런. 아만의 숨겨진 다른 얼굴이다. 바루투 사제는 악마를 물리친 아만에게 계속해서 힘을 사용하면 먹혀버릴 것이라고 충고했다. 왠지 이 여행의 끝에서 아만이 악마로 변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도 지금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자.

▲ 드디어 두 번째 얼굴을 드러낸 아만, 어쩐지 의심스러웠다



두 얼굴의 사제, 두 번째 얼굴은 지휘관?

이후 아만은 안게모스 산기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안게모스 산기슭은 역병에 의해 산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데런임을 들켜서 그런지 그곳에서 만난 아만은 조금 퉁명스러워져 있었다. 아예 나를 작정하고 부릴 심산처럼 보였다.

아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바로 옆에 서서, 나에게 산짐승의 사체를 불태우고, 신성한 샘물을 오염된 샘에 뿌릴 것을 지시했다. 나는 사제도 간병인도 더욱이 군인도 아닌 일개 모험가에 지나지 않는다. 아만은 그런 나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수행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왜 나한테만 이런 귀찮은 일을 시키는가. 매번 이런 불만이 생기지만, 아만이 하는 일이 역경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일이라 귀찮다고 놔둘 수도 없다.

고생했다고 말 한마디라도 하면 좋을텐데. 정말 섭섭한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 일해라, 플레이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아만을 돕고 나면, 아예 초소를 지킬 병력이 부족하니 대신 군인으로서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역병에 오염된 괴물들을 막아달라던 아만의 말은 더 가관이다. 오염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오염되지 않도록 나를 가만히 놔두면 안 될까. 불만은 가득하지만,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내가 나서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도 고생하는 듯 보이는 사제를 위해 역병을 옮기는 괴물들을 막아줬더니, 이번에는 아예 볼트들이 공격하고 있는 초소로 나를 파견 보낸다. 어느 생명하나 쉽게 버릴 수 없다는 아만의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내 생각도 좀 해주면 좋겠는데.

아만에게는 역시 사제보다도 지휘관이라는 신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폐쇄된 국경 초소에 파견 나가 있던 동안, 병사들을 치료한다던 아만은 독자적으로 정찰조를 조직해 아길로스의 머리로 들어갔다. 어쩐 일로 아만이 나를 시키지 않고 정찰을 한 걸까, 싶었더니 위험에 처하고 말았다.

사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점이 있다. 아만은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한다. 능력 있는 지휘관이라도 써먹을 만한 병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부재로 인해 곤경에 처한 아만을 구하기 위해 나도 아길로스의 머리로 달려가야만 했다. 이번에는 내 수고를 알아주지 않을까.

아길로스의 머리에서 쓰러진 병사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아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없어도 잘 살아남을 캐릭터가 바로 아만이었다.

어렵사리 던전 내부의 악마들을 물리치고 나자, 이번에도 아만이 나타나 뒷북을 치기 시작했다. 아만이 정말 얄미운 건 혼자서 힘든 척은 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악마를 찾은 것도, 역병을 봉인한 것도 모두 아만이 해냈지만, 나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 역병을 봉인하느라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는 아만, 하지만 악마는 내가 모두 처리했다



너도 고생하지만, 점점 섭섭하다.

꼬리 던전에 이르러서는, 내가 구한 보옥에 의해 정신을 차린 레위스 원장이 아만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아만은 레위스 원장에게 보옥에 관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공로를 가로채며, 단순히 나를 '동료'라고 표현한다.

'부하'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일까.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만에게 더는 모험가가 아닌 동료로 인식되고 있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앞으로 이 주종관계가 계속될 것 같다.

▲ 아니, 내가 보옥을 가져왔다니까요?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만은 나에게 먼저 유디아로가서 모아라 유적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대놓고 주문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불만을 제기할 여력도 남지 않았다.

아크에 대한 단서를 찾기 바쁜 내게, 아만은 모라이로 향하는 유적지에 멈춰 서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함께' 돕자고 한다. 하지만 돕는 사람은 아만이 아니다. 나 혼자일 뿐이다. 아만은 곤경에 처한 유랑민들 사이에서 착한척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속은 쓰리지만 아만의 말대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어떻게 보면 아만을 미워할 수는 없다. 아만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유랑민들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오셨군요.' 유랑민을 돕고 나서 다음 경유지에 가보면, '함께' 유랑민들을 돕자던 아만은 '먼저' 와서 둘러보고 있다고 말한다. 동료라던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모험가'라는 호칭을 붙여 거리를 두는 것이 아만이라는 캐릭터였다. 거리를 넓히고 좁힐 줄 아는 영리한 지휘관이다.

▲ 함께... 할거지?


▲ 응, 아니야. 나는 바빴어


아만은 유랑민들을 도왔기 때문에 내가 더 할 말이 많을 거라며, 아예 나에게 단서를 찾아내라고 대놓고 말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단서를 찾아 떠났다. 수소문 끝에 단서를 찾아내자, 아만은 한 번 살펴보라고 지시한다. 자신은 남아서 다른 정보를 알아보겠다고 한다.

결국, 멀리까지 비석을 살펴보고 온 나에게 꺼낸다는 말이 '별다른 정보는 없었습니다.' 였다. 이미 모라이 유적지에 대한 정보가 나온 마당에 아만은 다른 비석에 매달렸다. 아만은 필요도 없는 다른 비석을 찾아볼 테니, 천둥이라는 주술사를 찾아오라고 주문했다. 아만이 사제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데런으로 보인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천둥'을 찾아냈다. 천둥과 나는 화합의 장에서 모라이 유적을 찾기 위해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때 적들이 화합의 장으로 들이닥쳤다. 모든 유랑민이 칼을 꺼내 들고 적과 싸웠지만, 아만은 보이지 않았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을게, 그저 막타 한 대 만...

이번에는 다른 조사를 하겠다고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놓고 싸움이 끝날 때쯤 찾아오겠다는 심산이다. 역시 영리한 지휘관이다. 일단 보이지 않는 아만은 잊어버리고, 강력한 스킬로 공격하는 자이언트 웜을 상대했다. 날카로운 가시를 쏘아 보내는 공격은 피하기도 쉽지 않고, 많은 생명력을 빼앗기 때문에 물약을 여러 번 마셔야 했다.

마침내 자이언트 웜의 생명력이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 곧 쓰러지려는 찰나였다. 또 어디선가 아만이 나타났다. 자이언트 웜은 더 이상은 공격하기를 멈춘 상태였다.

아만은 처음 보는 자이언트 웜을 신기해하며, 지금까지 잘 상대해온 나에게 위험하다며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럴 때는 솔선수범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막 타를 가져가 버렸다. 그래서인지 자이언트 웜은 아이템을 주지 않고 소멸해버렸다. 내 아이템은? 내 골드는? 아만은 그런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자이언트 웜을 처음 본 아만, 내 동료를 건드려?


▲ 뒤로 물러서세요, 다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위험할 수 있답니다!



여기까지 오자 나는 이제는 아만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면 미워하게 되지만, 이 아만이라는 남자를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크를 찾으러 떠나는 모험은 둘이서 하는데 왜 그런지 혼자서 두 사람 몫을 하는 기분이 든다. 아만이 너무 착한 탓이다. 보는 사람마다 도움을 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만의 수족인 내가 나서야 한다. 정말로 아만은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을까. 이전에는 누구랑 같이 여행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아무래도 당분간 아크를 찾을 때까지는 아만과 함께해야 할 것 같지만, 더는 아만과 나의 거리를 좁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린 언제까지나 사제 겸 지휘관과 모험가 겸 병사의 사이로만 남을 것이다.

▲ 내가 찾은 입구로 먼저 달려가는 아만, 솔선수범의 자세


▲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 어랏?


▲ 앞장서는 아만, 유적을 찾기 위해 유적을 부순다!


▲ 곤경에 처한 플레이어를 구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방법을 쓰기로한 아만


▲ 치료할 거지? 쉬는거 아니지?


▲ 제가 보호막을 생성할테니 어서 밖에서 싸워주세요!


▲ 다음에는 나도 감싸주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