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엔 축구와 농구도 자주 했지만, 게임만큼 나에게 흥미를 일으키진 못했다. 학원을 가기 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친구들과 PC방에서 카오스 한두 판을 하는 건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이제는 이십대 후반에 가까운 나이가 됐음에도 나는 여전히 게임이 좋다. 필연적으로 e스포츠도 좋아하게 됐다. 야구, 농구, 축구는 보지 않아도 e스포츠만은 틈틈이 챙겨 보던 것이 이제는 내 업이 됐다. e스포츠에는 희로애락이 모두 존재했고, 브라운관 너머 선수들이 승패에 일희일비할 때 나도 같이 기뻐했고, 슬퍼했다.

하지만 나에게 e스포츠가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공통으로 즐기는 메이저 문화냐고 묻는다면, "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쉬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과거 게임을 즐기던 10대들이 30대가 됐고, 내 또래의 게이머들이 정말 많지만, 기성세대의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편견은 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편견을 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e스포츠는 메이저 문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스포츠는 주류 문화가 될 수 있을까?

그 때문인지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시즌6 결승전을 취재하기 위해 LA에 왔음에도 나는 즐거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스테이플스 센터가 어떤 곳인가.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LA 레이커스, 클리퍼스의 홈구장이 아닌가.

13년도 롤드컵이 뜨거운 호응을 끌어냈다지만, 이번 시즌은 한국과 한국이 맞붙는 경기였다. 한국과 미국의 거리는 3만 리를 뛰어넘는다. 결승전 준비된 좌석은 15,000개. 이미 북미팀이 모두 탈락한 상황에서 현지 팬들이 과연, 직접 관람을 하러 올 것인가 걱정됐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스테이플스 센터 주위는 관람하러 온 팬들로 가득 찼다. 주변 음식점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빼곡했다. 스테이플스 센터의 모든 티켓이 45분 만에 매진됐고,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경기장 밖 야외무대 스크린을 통해 결승전을 관람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팀의 경기가 아닌데도, 그저 높은 수준의 경기력과 응원을 하기 위해 팬들은 스테이플스 센터로 모였다.

15,000명의 관중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목놓아 소리쳤다. 온몸에 전율이 돋는 장관이었다. 미국 내에서의 e스포츠의 위상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었다. NBA와 시장 규모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나지만, 관중 수와 열정 면에서는 조금의 차이도 보이지 않았다. 스테이플스 센터를 가득 메운 관중은 TSM, C9, CLG만의 팬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미국에서 e스포츠는 주류 문화로 발돋움하고 있다.



■ 종목의 유통기한은 존재 그러나...

e스포츠의 한계이자 근본적인 문제로 꼽히는 '종목의 유통기한'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미는 법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게임의 유통기한이라는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스타크래프트 시절부터 삼성을 응원해온 중년 여성은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도 여전히 삼성의 팬이었다. 또, 어린 딸과 아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중년의 미국 아저씨는 스타크래프트와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팬이었으며, 리그 오브 레전드의 팬이다. 이 사람들은 특정 종목의 팬이 아니라, e스포츠 그 자체의 팬이다.


나부터 그렇다. 나는 스타크래프트를 하지 않았음에도 스타 리그에 열광했다. 롤이 나온 뒤에는 자연스럽게 롤챔스의 팬이 됐다. 주로 즐겨서 보는 것은 롤챔스지만, 오버워치-하스스톤 리그도 중요 대회가 있을 때면 보는 편이다. 한국 서비스를 종료한 도타2의 세계 대회인 TI(The International) 기간에는 도타2를 하지 않음에도 밤을 새워가며 시청한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이유가 필요한가? 그저 축구를 보듯, 야구를 보듯 e스포츠를 보는 것이다.

우리 생활 깊숙이 게임이 파고든 것처럼 e스포츠도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물론, 현재까지는 소수일 수 있다. 그러나 문화는 원래 소수로부터 파생되는 법이다. 야구도 아마 초창기에는 특정인들만 즐기는 비주류 문화였을 거다. 그런 면에서 e스포츠의 경쟁력은 뛰어나다. 집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언제든지 플레이할 수 있고, 친구들과 소통 창구이자, 공감대 형성의 장이 되어준다. 지금도 앞의 예시처럼 10대, 20대, 30대가 게임을 즐기고 있다.

기존의 프로 스포츠보다 e스포츠가 더 친근한 스포츠가 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20년 뒤에 우리가 기성세대가 됐을 때, 가장 흔한 스포츠는 야구도, 축구도 아닌 e스포츠가 될 거다. 망상으로 치부하기엔 현재 10대 문화에서 게임은 이미 주류 문화다. 많은 아이가 인터넷 방송을 본다. 인터넷 방송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게임 방송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부모님을 따라 축구와 야구 응원을 즐기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젠 그런 케이스가 소수가 되는 추세다.

피파 온라인3, 카트라이더, 서든어택, 던전 앤 파이터 등 넥슨 아레나에서 열리는 게임들의 주 방문 관객의 2할 정도는 미성년자들이다. 롤챔스도 마찬가지다. 현재 10대는 자신의 취미 생활인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e스포츠 관람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대도서관'이라는 닉네임으로 더욱 잘 알려진 콘텐츠 창작자 나동현이 모 TV쇼에 나와 "40대가 넘어서도 이 일을 할 수 있겠나?"라는 물음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하며, 근거로 내세웠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여러분이 나이가 들어서 양로원에서 장기를 두겠나, 에어로빅을 하겠나. 아마 인터넷을 할 거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내가 십 년이 지난다고 해서, 갑자기 바둑에 취미를 붙일까? 아니다. 이미 인터넷과 게임은 우리 생활에 스며들었고, 게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e스포츠 또한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 지금도 e스포츠의 메이저 행은 알게 모르게 진행 중이다.



■ 핵심 스타플레이어가 없다면, e스포츠도 무너진다? No!


종목의 한계와 함께 또 다른 문제점으로 지목됐던 '스타플레이어' 의존도가 크다는 점은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다. 전설적인 게이머이자 e스포츠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Boxer' 임요환. 그의 전성기 시절 많은 팬이 그의 은퇴와 함께 e스포츠가 쇠락할 거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어 많은 스타플레이어가 탄생했다. 임요환이 잘 닦아 놓은 '스타플레이어'라는 왕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위에 앉은 선수들만 바뀌었을 뿐이다.

롤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였다.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1세대 프로게이머들의 뒤를 이어 스타플레이어들이 매 시즌 등장했다. 미드 절대자 'Ambiton' 강찬용을 무너뜨리며, 세계 최고의 미드 라이너가 된 'Faker' 이상혁. 그 뒤를 이어 'Pawn' 허원석, 'Rookie' 송의진과 같은 스타플레이어가 등장했다. 유럽에서 탄생해 미국에서 절대적인 인지도를 쌓고 있는 'Bjergsen'도 마찬가지다.

지금 롤 씬은 'Faker' 이상혁이라는 최고의 선수를 위시해 수많은 이야기가 탄생하고 있다. 현재까지 그 중심은 이상혁이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선수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이상혁을 쓰러트린 선수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할 것이다. 이상혁이 쓰러진다고 해서 그가 이룬 업적과 영향력이 물거품이 되느냐? 임요환을 봐라. 살아 있는 역사가 될 뿐이다.

스포트라이트의 중심은 항상 '선수'지만 팀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들도 탄생하고 있다. MIG 프로스트와 블레이즈의 시대를 지나, SKT T1 K와 KT 롤스터 불릿츠가 만들어 낸 명승부. 왕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SKT T1을 끌어내리고, 세계로 뻗어 나간 舊 삼성 형제팀. 부활한 SKT T1의 숙명의 라이벌 ROX 타이거즈. 2년의 침체기 후 다시 롤드컵 정상의 무대에 올라온 新 삼성. 소속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팀 전체의 스토리 또한 쓰이고 있다. 팬들의 손에서 직접 탄생한 별명, 라이벌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흥행 요소다.



■ 20년 후에도 e스포츠가 비주류 종목일까?

▲ 출처 : DEADSPIN

미국 취재 중 만난 인벤 글로벌의 조력자인 도널드 마리넬리 교수와 나눈 짧은 대화 속에서 뇌리 깊숙이 박힌 이야기가 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바로 NFL(National Football League)-NBA의 헤드 코치다"라 말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포츠의 중심이자 꽃은 선수가 아닌가? 그러나 LCK에서 보여준 코치진들의 역량을 생각하자 납득이 됐다.

이번 시즌 삼성 갤럭시가 써내려간 드라마는 최우범 감독의 맨파워에서 시작됐다. 그가 'Ambition' 강찬용을 영입했고, 'Ruler' 박재혁을 발굴했다. 'CoreJJ' 조용인의 포지션 변경도 그의 권유였다. 이번 시즌 삼성에서 다시 한 번 엑소더스가 발생하더라도 탄탄한 구조를 갖춘 그들은 넘어지더라도 금세 일어설 것이다. 그 중요함을 알기에 NFL과 NBA는 헤드 코치의 맨파워에 막대한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다. 핵심은 선수지만 그 선수를 어떻게 키워내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최상품이 될 수도 있고, 가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한국의 맨파워는 세계 최고다. 종주국답게 e스포츠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남다르다. 많이들 알다시피 한국 선수, 코치들이 해외로 진출하지만, 그들뿐만 아니다. 대표적으로 사례로는 중국에 진출한 위영광-원석중 PD다. 방송 연출도 e스포츠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걸 인정받은 것이다. 또 지역마다 리그의 발전을 위해, LCK 운영에 이바지 해왔던 이들을 영입하거나, 파견 받고 있다.

e스포츠는 현재 비주류와 주류의 과도기에 있는 상태다. 개인의 판단이 단체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시기다. 과거부터 노하우를 쌓아 온 한국의 e스포츠는 양질의 토양을 보유했다. 최고의 경험을 가진 방송 스태프와 중계진. 오랜 e스포츠의 역사를 가진 만큼, 우수한 코치진들도 많다. 프로게이머 출신으로 CJ 엔투스 프론트에서 매니저로 활동한 퍼펙트 테란 서지훈은 아마 선수들의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매니저였을 것이다. 그들이 떠난다고 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메뉴얼과 영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프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분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인프라가 갖춰지는 것이다. 한국 e스포츠의 인프라는 빠른 속도로 만들어지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e스포츠 학과가 생기고 있고, 대학교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취미 생활에서 이제는 직업으로까지 바운더리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못지않게 한국 e스포츠의 미래도 밝다.

초창기 e스포츠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위치를 봐라. 황형준 본부장이 스스로 세트를 만들고, 소품을 구하러 다니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다. 게임 방송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시기가 16년 전이다. e스포츠는 현재 10대 주류 문화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이 16년 만에 이뤄졌다는 게 믿어지는가? e스포츠는 팬들의 사랑이라는 양질의 거름과 관계자들의 노력을 통해 빠른 속도로 비주류 문화에서 주류 문화로 거듭나고 있다.

과연 10년 후, 20년 후에도 e스포츠가 비주류 문화일까? 어쩌면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모두 관통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주류 문화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