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모바일 게임에게 '빠름'을 요구한다.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 빠른 업데이트 주기, 기존 PC나 콘솔과는 다른 유저층 등은 어느새 모바일 게임이 갖는 특징처럼 취급되고 있다. 빠르지만 주기적인 업데이트, 짧게 진행되는 플레이 타임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적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The Trail'이 갖는 특징들은 빛을 발한다. 단적으로 말해 '느리기 짝이 없는 템포', '행동력 제한이 없는 플레이'는 요즈음 모바일 게임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궤를 달리한다.


■ "이게 그 대단한 개발자가 만든 게임이라며?" - 피터 몰리뉴라는 부담감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개발을 주도한 인물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The Trail'은 '던전키퍼', '블랙 앤 화이트' 등 게임사에 남을 만한 작품들을 만들어온 '피터 몰리뉴'의 신작이다. 개발자 자신에 대한 평가가 갈리기는 하지만 '참신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게임들을 만들어 온 인물이었기에, 이번 게임의 독특한 특징이 묻어 나온 것이로 생각해볼 수 있다.

▲ 2014년 GDC 강단에 섰던 피터 몰리뉴.

허나, 개발자의 유명세와는 별개로 게임 출시 시점에서 개발자의 이름을 내세운 홍보나 설명 같은 것들은 찾기가 어렵다. '피터 몰리뉴가 개발한~' 이라는 접두사를 내세우지 않고, 게임의 특징과 콘텐츠를 담담하게 설명할 뿐이다. 심지어 9월 초 일부 국가에 선 출시를 한 뒤, 11월 초 국내 런칭되기까지 대규모 마케팅이나 리뷰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소리소문없이 출시되어, 조용히 이슈가 된 게임. 그것이 'The Trail'의 첫인상이었다.

전작인 'Godus'가 혹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The Trail'의 조용한 출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아니, 어쩌면 유명 개발자의 게임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평가를 받으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게임은 더 많은 국가에 출시되었고, 이제 글로벌 유저들에게 평가받는 시간이 왔다. 느리지만 차근차근 걷는, 게임 캐릭터의 모습처럼 말이다.

▲ 피터 몰리뉴의 느낌은 나되, 만들어온 게임과는 다른 모습.


■ "걷는다. 만든다. 만난다." - 이것이 여행이 주는 즐거움인가!

사실 게임 내에서는 튜토리얼이라고 할 것도 없다. 게임을 시작하면 내 분신이 될 캐릭터의 이름을 정하고, 첫 목적지를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나갈 뿐이며, 이것이 플레이의 대부분을 이룬다. 게임 내에서 제시되는 궁극적인 도착지는 어딘지도 모를 '에덴 폭포'라는 곳. 산 넘고 물 건너, 다른 이들과 만나며 걷는 길 전부가 게임의 무대가 된다.

▲ 너덜셋으로 게임을 시작한다.

단순히 걷기만 하는 것이라면 게임으로서의 정체성을 의심해 볼 만한 상황에서, 피터 몰리뉴는 플레이어의 여행 과정에 할 거리들과 상호작용 오브젝트들을 끊임없이 배치해뒀다. 그리고 길을 걷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캐릭터들이 AI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부터, 게임의 인상은 180도 뒤집히기 시작한다.

'The Trail' 의 세계는 목가적인 분위기와 달리, 하드코어하고 가차 없는 세계다. 길을 걷다가 쓰러졌을 때, 모아놓은 재료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은 일상 다반사. 획득 또는 제작하여 사용하는 의류와 장비들 모두 수명이 정해져 있고, 재료들을 담는 가방에도 물리적인 제한이 있다. 제작법도 차근차근 배워나가야 하니,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여행을 지속하는 것은 가시밭을 걷는 것과 같다.

▲ 정신줄 놓고 걷다 보면 시체가 되기 십상이다. 정말로.

피터 몰리뉴는 게임의 하드코어 함을 '유저와의 협력'으로 해결하라고 제시한다. 현실에서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 있는 것에 안심을 주는 것'처럼, 타인과 교류하며 여정을 즐기라는 안배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나름의 경쟁심을 갖도록 절묘하게 녹여냈다.

게임의 핵심이 되는 '교환'과 중후반 마을에 도착하면 이용할 수 있는 '마을 단위 콘텐츠'가 그 예다. 제작 또는 수집한 재료와 장비들은 여정길 도중 들리는 휴게소에서 판매 또는 교환을 하게 된다. 시간을 정해두고 가장 많은 금액을 판매한 유저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교환 방식은 유저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물건을 내놓도록 만든다. 타인이 내놓은 물건들은 다른 누군가에겐 소중한 재료나 장비로 사용되니, 서로 win-win을 하는 셈이다.

▲ 눈치 싸움이 진행되는 교환. 하지만 패자는 없다.

여정의 중간 즈음 이르러 마을에 도착하게 되면, 마을을 발전시키고 다른 마을과 경쟁하는 콘텐츠가 자연스레 연결된다. 목적도 다른 마을보다 더 많이 필요한 재료들을 모으는 것이 주를 이룬다. 설령 다른 마을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모아놓은 재료는 마을의 발전과 공동의 이익으로 남는다. 승자는 있되, 패자는 없는 구조다.

부담 없는 경쟁요소, 고즈넉하고 목가적인 풍경들. 그리고 이를 함께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플레이어가 게임에 집중할 수 있는 요소로 작동한다. 이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희미한 목표를 위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만나고 교류하며 여행하는 과정이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된다.

▲ 으응... 반가워... 잉글랜드 사람이구나 너희들은...


■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이다." - 괴테

여행에 대한 많은 격언과 명언 중에서 괴테의 말이 'Trail'이라는 게임을 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신대륙에서의 여행이라는 소재를 표현한 'Trail'의 여행은 괴테의 말마따나, '도착이 아니라 여행하기 위한 여행'에 가깝다.

어디인지도 모를 에덴 폭포라는 목적지는 길고 긴 여행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다음 기점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들, 새로운 의류와 제작법들을 배우는 것, 새로운 경험을 얻는 것에 더 비중을 둔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가치 있다는 개발자의 관점을 게임에 자연스레 녹여냈다 하겠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답답할 정도로 느린 게임의 흐름이라도 충분한 감동과 의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본다.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이어지는 만남과 성장. 그 모든 것이 '여행', 'Trail'이라는 게임의 정체성이자 독특한 재미로 이어지는 길이 될 것이다.

▲ 느리게 걷는 것에도 의미는 충분히 담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