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트 시절부터 이어져 온 겨울. 프로게이머로 벌써 여섯 번째 겨울을 맞이한 '샤이' 박상면에게 이 계절은 어느덧 익숙해졌다. 때로는 혹독한 추위에 지쳤지만, 끝까지 남아 지키고 싶은 것이 있기에 다시 한번 그 자리에 남곤 했다.

많은 게 변한 지금. 겨울을 맞이하는 박상면 역시 달라져야 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 속에서 새로운 계절이 도래하길 바라는 마음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자책하던 괴로운 겨울을 다시 맞이하지 않기 위해.

많은 1세대 LoL 프로게이머들이 은퇴와 새로운 길을 고민하는 시기. '샤이'의 마음 속에는 프로게이머 이외에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더 물러설 수 없었고, 프로로서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떳떳하고 싶었기 때문에.

'샤이'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부끄러웠다는 말을 했다. 좌절하던 순간부터 다시 일어서기까지. '샤이'가 느껴왔던 ‘부끄러움’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저는 내성적이고 소심해서인지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샤이’라는 단어가 어감도 괜찮고 제 성격이랑 잘 맞는 것 같아서 아이디로 쓰게 됐어요." 외향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당당히 여기는 사람은 많다. 승리와 강인함을 요구하는 프로 무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샤이’는 아이디를 통해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자신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을.

처음 만나는 사람을 어색해한다기에 휴식 기간에 관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시즌 동안 해보지 못한 휴식이나 새로운 활동에 대한 답변. 프로게이머로 활동하지 않아도 되는 비시즌 기간에 박상면 역시 조금이나마 부담감을 내려놓겠지.

"저에게 비시즌은 승강전 떨어진 후 거든요. 당시 강등이라는 결과가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와서 LoL이란 게임 자체를 거들떠보기도 싫은 상태였어요. 한동안 정말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아요. 충격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들었습니다. 성적이 아무리 안 나와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잖아요. 결승전-4강에서 패배의 아쉬움은 느껴봤지만, 강등이라는 쓴맛을 본 적은 처음이었죠. 정상에서 떨어져보니 정말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그에게 이번 비시즌 기간은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고 한다. 프로게이머들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기간임에도 강등이라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새로운 팀에서 오는 제의가 왔기에 강등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상면을 더욱 힘들게 한 건 끝까지 남고 싶었던 ‘CJ의 강등’이었다.

"CJ를 나오게 되면서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들더라고요. 저는 스스로 팀에 대한 애정이 있는 프로게이머라고 생각했어요. CJ에서 은퇴하길 바랐고 팀에서 나오더라도 좋은 분위기에서 나오고 싶었죠. 막상 팀을 나오게 되니 ‘이렇게 떠나도 되는 건가’라는 고민을 하고, 이제 떠난다는 것에 대해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박상면의 프로 생활에 대한 고민은 2015년부터 이어져 왔다. 2015 롤챔스 스프링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SKT T1과 한 합 승부로 많은 팬들의 기억에 남는 명경기를 펼쳤고, 섬머 시즌 준플레이오프, 2015 LoL KeSPA 컵 결승 진출까지. 중-상위권을 기록한 프로가 은퇴를 고민한다는 사실은 쉽게 믿기지 않았다.

"2015 KeSPA 컵에서 결승전 이전까지 제가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팀원들과 비교해도 제 활약이 컸다고 느꼈죠. 나름 자신감도 있었어요. 그런데 결승전에서 상대의 카운터 픽에 무기력하게 무너졌죠. 게임 내용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어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니까 더 미련이 남더라고요. 저 때문에 패배했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외부에서 저를 탓하는 반응이 있었는데, 팀 내부에서도 제가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CJ 측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상면이가 알아서 잘 극복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을 아끼는 게 눈에 보였어요. 내심 따끔하게 말 한마디 하고 위로해주길 바랐는데, 제가 혹시나 큰 충격을 받을까 봐 조심스러워 하더라고요. 그때 벼랑 끝에 몰린 느낌이어서 정말 은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시 프로로서 경기하는 게 부끄러웠어요."


‘샤이’는 자신의 경기력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따가운 주변 반응 속에서 자신을 위로할 만한 방법도 없었다. 결국, 프로 무대에서 내려오는 결정을 하게 됐다. 2015년과 2016년 말. 박상면은 두 번이나 프로 생활을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은퇴는 ‘샤이’가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마음에서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저는 CJ에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못하는 모습으로 프로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당시 스스로에게 대회에 나가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던 상황이었고, 실력보다 자신감이 결여된 상태였죠. 그래서 팀에 프로 경기에 나갈 실력을 되찾을 때까지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코치나 해설, BJ 등 다른 길을 가볼까도 고민했지만, 프로게이머로서 아직 미련이 남았더라고요. 이런 마음을 해소하지 못하면 다른 일에 대한 간절함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어요.”

”유명한 프로게이머 출신의 코치님이나 해설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프로게이머 시절에 모두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자신의 분야에서는 확실히 인정받고 있죠.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어떤 분야를 가더라도 성공할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요즘에는 ‘트레이스’ 여창동 코치님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았습니다. 저도 여창동 코치님만큼 프로게이머로 활동해보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대회에서 적으로밖에 안 만나봤지만, 그분을 보면서 마지막 남은 프로 생활을 잘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죠."


은퇴에 대한 고민은 접어뒀지만, 휴식을 선언한 상황에서 언제, 또 어떻게 다시 프로 무대에 설지는 막막했다. 그런 박상면에게 다시 본격적으로 프로로서 활동하도록 도움을 준 분이 있다. 그가 CJ를 소중히 했던 만큼 박상면을 생각해주는 감독이 있었던 것.

▲ 225일 만에 복귀한 박상면의 눈 빛은 달랐다.

"박정석 감독님에게 감사해요. 그때가 2016 롤챔스 섬머 시즌 kt 롤스터전 승부를 가릴 3세트였거든요. 당시 솔직히 나갈 마음이 없었는데, 감독님이 한 번 나가보라고 말하더라고요. 준비가 안 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출전 선수 명단에 제 이름을 넣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과는 패배였지만, 제 경기력이 아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때는 나가야겠다는 확실한 의지가 없었는데, 박정석 감독님이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죠. 그 날 이후로 다시 열심히 하면서 경기에 나가게 됐습니다.".

복귀의 기쁨도 잠시. 강등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왔다. 최정상의 자리에 있어 봤지만, 어느새 가장 아래로 떨어졌다는 믿기 힘든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2017 시즌이라는 거대한 산을 앞에 두고 프로 생활에 대한 마음은 더욱 꽁꽁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샤이'의 마음을 녹여준 분이 있었다.

"평소에도 강현종 감독님과 연락하며 좋은 사이를 이어왔어요. 가끔 만나서 밥도 먹고 고민도 이야기했죠. 팀을 나가고 나서 감독님과 만났는데, 저에 대해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이대로 해외로 떠나게 된다면, 불명예스러운 ‘도망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을 거라는 말을 해줬어요.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대화 중에 갑자기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거기서 감독님이 저를 애틋하게 생각해주는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감독님 밑에 있으면 다른 생각 안 하고 다시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박상면은 락스 타이거즈에서 새롭게 출발하게 됐다. 프로게이머로서 데뷔부터 최고의 순간까지 함께 했던 강현종 감독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처음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에 자신의 ‘초심’에 대해 말을 꺼냈다.

“제가 생각했던 초심은 머릿속에 게임, LoL만 있었던 것 같아요. 승리와 게임 자체에 열심히 매달렸죠. 그런데 2년 전을 돌아보면, 그런 마음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어요. 게임 외적인 일들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예전 마음가짐을 완벽히 찾기는 힘들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경기에만 몰입하고 싶어요."

박상면에게 이번 2017 롤챔스는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탑 라이너 간 대결한 펼쳐질 것이다. 최근 롤드컵 4강 이상 경험이 있는 최고의 탑 라이너들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롤챔스를 앞두고 그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을까.

“2017년에는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려고요. 새롭게 출발하는 마음으로 비판과 비난까지 모두 수용할 거예요. 탑 라인전 같은 경우 예전에는 ‘내가 이 선수는 당연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그리고 수준 높은 선수와 대결을 위주로 준비했죠. 그런데 2017년에는 쉽게 볼 만한 선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매 경기 각오를 단단히 해야죠."

“팀 내에서 제 역할은 게임 내적인 것도 있지만, 게임 외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강현종 감독님과 대표님께서 저와 플레잉 코치로 계약하길 원하시더라고요. 저도 그 부분에 동의해서 락스 타이거즈와 계약을 하게 됐어요. 게임도 소홀히 하지 않고 맏형 역할도 잘 해내서 잘 단합된 팀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2017 롤챔스 시즌은 저한테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한 번 제대로 부딪혀 보려고요. 은퇴나 전향은 프로 생활이 끝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LoL e스포츠가 걸어온 역사가 있을 거예요. 마지막까지 팬분들 기억에 남는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습니다"

‘샤이’는 자신의 경기력이 부끄러운 적이 있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 감정을 해소할 방법은 결국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뿐. 부끄러웠기에 다시 도전했고 프로게이머로 남았다. 언젠가 찾아올 프로로서 마지막 시기가 부끄럽지 않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앞둔 ‘샤이’의 2017년. '초심'을 찾고자 하는 그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