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이었나.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돌아다니는 풍문에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다. 영등포에 VR 체험존인 'VR 파크'가 생겼다는 것. 언젠가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면서 또 잊어버리고 하다가 마침내 기회가 닿았다.

취재 허락을 받고 아침 일찍 나선 길. 가서 취재 차 왔다고 말할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오늘의 탐방 목적은 과연 "돈 내고 할만한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기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철저히 손님 입장에서 가기로 결정. 수수료 천 원을 내야 사용 가능한 ATM 앞에서 현금을 인출했다. 갔다가 카드 결제 안 되면 난감해지니까.

▲ 두둥... 타임스퀘어에 도-착

마침내 도착한 영등포 CGV. 'VR 파크'로 들어가려면 7층까지 올라가야 한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얼마 없지만, 이 시간에도 커플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어디까지나 일이기 때문에 부끄러움 같은 건 없다 믿었지만, 쌍쌍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계속 보다 보니 내심 뜨끔했다. 분명 직장인은 아닐 테고 목요일을 공강으로 비워둔 주 4파 대학생 커플들일 거다. 이런 부러운 친구들 같으니. 나중에 돈이나 많이 벌어라!

매표소에 도착해 요금을 결제하고, 너무 길어서 끝까지 읽어보지 않은 동의서(?) 비슷한 서류에 사인했다. 동의서에는 기본적인 설문 조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이를 적는 칸을 보고 한참 고민했다. 서른 된 지 이제 한 달 됐는데... 그냥 20대에 체크했다. 결제가 끝나니 돈 냈다는 것을 인증하는 고무 팔찌와 눈 부분만 파여 있는 안대를 준다. 불편하긴 한데 위생은 지켜야 하니 어쩔 수 없다.

▲ 매표소를 지나면 보이는 'VR 파크'의 전경


1번 코스 - 빌리언 박사의 초대


'VR 파크'는 로비와 1~4번 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순서대로 체험하는 되는 구조인 것 같았다. 첫 번째 순서는 '빌리언 박사의 초대'라는 이름의 1번 어트랙션.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혼자 온 것이 뭔가 부끄러워 사진 좀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면서 어설픈 블로거 흉내를 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말하지 말 걸 그랬다.

▲ 저 4인용 의자에 혼자 앉았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인데 굉장히 민망했다.

어트랙션은 4인승 4DX 의자에 탑승한 채, 안전벨트와 '기어VR'을 착용한 후 체험하는 구조다. 내용은 흔히 보이는 롤러코스터형 탑승 체험인데, 가끔가다 날 초대했다는 '빌리언 박사'가 말을 건다.

"오홍홍! 정말 대단하군!", "아주 잘했네! 정말 최고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사실 내가 한 일이야 그냥 앉아 있던 것밖에 없는데 뭘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고 치기로 했다. 어트랙션 자체는 무난했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기기 성능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재생되는 영상의 초당 프레임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보니, 화면이 무자비하게 끊긴다. 그리고 당연히 어지럼증이 따라온다. VR 인생 3년 만에 처음으로 극심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2번 코스 - 더 빌리언 후드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고 두 번째 코스로 향했다. 이번 프로그램의 이름은 '더 빌리언 후드' 처음 들어도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2번 코스부터는 HMD가 'HTC 바이브'로 마련되어 있고, 의자 없이 서서 체험하는 구조다. 흔들릴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막상 기계 앞에 서자 뭔가 막막했다.

▲ 내 착용 사진이 없는 이유는 알다시피 혼자 왔기 때문이다..

'어쩌지...' 하다가 앞선 코스를 끝내고 나올 때 스텝 분이 "다음 코스 가셔서 쓰여있는 대로 하시면 돼요"라고 말해서 혼자 체험을 시도했다. 생각보다 혼자 VR 장비를 착용하는 건 쉽지 않았다. 위생 안대가 자꾸 미끄러져 내려와 앞이 보이질 않았고, 가까스로 머리에 착용하고 초점을 맞추고 나니 컨트롤러를 못 찾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앞을 살짝 들어 컨트롤러를 겨우 찾았는데, 다시 내려쓰니 또 안대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맙소사. 혼자 5분 정도 낑낑거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스텝이 한 명 와서 머리에 도움을 주었다. 감사합니다.

프로그램은 이번에도 복잡하지 않았다. 왼손으로 활을 잡아 조준하고,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겨 활을 쏘는 게임이었는데, 멍청하게도 오른손으로 활을 잡아 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쥐었던 것을 놓는 기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컨트롤러를 바꿔 잡았다. 게임을 시작하면 난이도와 플레이어 수를 정하고, 몰려오는 동물들에게 활을 쏘면 된다. 설명은 적이라고 되어 있지만, 면면을 살펴보면 소, 돼지, 닭 등등 흔히 보는 가축류기 때문에 딱히 긴장감은 없다.

▲ 무자비하게 다 쏴죽이고 나와서 한장 찰칵


3번 코스 - 슈팅 팝


세 번째 코스는 '슈팅 팝'이라는 이름의 슈팅 게임. 이번에는 미리 컨트롤러를 팔목에 걸어두고 시작했기 때문에 무리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구성은 매우 단순한 편으로, 양손에 권총을 든 채 풍선을 타고 내려오는 동물들을 빠짐없이 격추하면 된다. 총의 외관이 마치 현대식 총보다는 기병용 플린트락 권총처럼 생겨 괴리감이 들었지만, 큰 상관은 없다. 양손에 쥐고 쏘니 마치 첩혈쌍웅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역시 아킴보는 쿨하다.

▲ 가장 괜찮았던 '슈팅 팝'

이 게임에서 마음에 드는 점은 클리커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피버 타임'. 간혹 하늘을 날아다니는 분홍색 돼지가 있는데, 이 돼지를 쏘면 화면 가득 반짝반짝 별이 빛나며 피버 타임이 시작된다. 이때는 적들이 마치 한겨울 눈발 날리듯 쏟아져 내리는데, 이에 맞춰 총도 후줄근한 권총에서 탄약이 무제한으로 나가는 샷건으로 바뀐다. 그냥 우다다 쏴주면 화면에 온통 점수가 가득하다.

게임은 1분 30초 동안 계속되고, 끝나고 나면 마치 오락실 게임기처럼 이니셜을 랭크에 올릴 수 있다. 참 괜찮은 방식이다. 어쨌거나, VR 파크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해 본 게임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쉬운 건, 전부터 그렇지만 적들이 너무 순하게 생겼다. 뭐 개인적인 아쉬움이니 별로 문제는 아니지만...

▲ 1~3번 코스의 콘텐츠들. 이런 느낌이다.


4번 코스 - 이름 모를 슈팅 게임


이어 들어간 마지막 코스. 제목은 '인투더 리듬'이다. 겉보기에는 마치 리듬 게임처럼 보인다. '썸퍼'가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내심 기대하면서 들어갔는데... 이럴 수가 다른 게임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때문에 인투더 리듬이 아닌 이름을 알 수 없는 게임을 하게 되었다.

▲ 리듬 게임 못하지만 하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게임 자체는 세 번째 코스에서 했던 슈팅 게임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양 손에 똑같은 총을 드는 것이 아닌, 한 손에는 '버블 건', 다른 손에는 '니들 건'을 든 채, 적을 방울로 가두고, 바늘로 터뜨리면 된다. 누가 봐도 둘이 같이하라고 노골적으로 만들어둔 디자인이라 살짝 슬펐지만, 게임 안에서는 나 혼자 2인분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게임에 임했다.

게임 시간은 역시 1분 30초. HMD 내부 자이로센서가 고장 났는지 중간중간 시점이 빙글빙글 돌아서 어지러웠지만, 어찌어찌 끝까지 끝냈다. 역시 이번에도 기록에는 들지 못했다.


종합 - 기대와 아쉬움



그렇게 모든 코스가 끝났다. '루키 존'이라는 이름의 오픈 코스도 있었는데, 이쪽은 말 그대로 VR을 완전히 처음 해보는 사람들을 위한 간단한 어플리케이션이 마련되어 있었다. 따로 체험은 안 해도 될듯싶었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으나, 완전히 만족하지도 못한 체험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가격. 시간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한 번 입장할 때만 결제하면 되는 거지만, VR 파크 내에 모든 어플리케이션을 전부 한다 해도 체험 시간은 총 30분을 못 넘긴다. 게임을 두 번, 세 번 해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 정도로 너무 재미있는 콘텐츠인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게임'보다는 '체험'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결국, 30분에 15,000원이 되는 격이다.

▲ 약간 쓸쓸해 보이던 '루키 존'

문제는 저 가격이 딱히 'VR 파크'가 고수익을 얻고 싶어 높여 책정한 가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혼자 VR 장비를 차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공공 기기용 위생 안대가 없다면 모를까, 말려 올라가는 안대를 신경 쓰려다 보니 도움이 필수다. 결국, 기기 하나하나 스텝이 붙을 수밖에 없고, 그만큼 인건비도 올라간다. 15,000원이 비싸 보이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가격조차 손해를 보면서 운영하는 가격이라는 걸 생각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 할인된 가격에 할 수 있지만, 나처럼 영화를 볼 일이 없는 외톨이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어트랙션이나 어플리케이션 대부분이 VR을 접하지 못한 어린 연령층의 이용자를 타깃으로 잡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컴퓨터 게임보다 VR이 나은 점은 '몰입'이다. 하지만 소. 돼지. 양이 뛰어다니고, 이걸 장난감 총으로 쏘는 어플리케이션만 준비되어 있으니 성인 입장에서는 꽤나 심심한 경험이었다.

▲ HMD 몇 대가 더 진열되어 있어 간단한 체험도 가능하다.

반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는 꽤 인기 있는 공간이 될 것 같았다. 눈높이도 딱 그 정도인데다, 신기하기까지 하니 싫어할리가 있나. 내가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있게 그렇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그럴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실험'이라고 볼 수 있다. 'VR 체험존'이라는 방식이 상업적으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지 확인하는 실험. 독립 공간으로 만들지 않고 유동 인구가 많은 영화관에 마련한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콘텐츠가 아쉽다. 'VR 파크'에 준비된 콘텐츠가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VR 업계 자체의 전체적인 퀄리티가 아직 상업적 목적으로 쓰이기엔 약하다.

VR 체험존의 개장과 운영은 응원한다. 진심으로. 결과가 어떻게 되든, 앞으로 더 나아질 거란 생각만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