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맨(Sixth Man). 농구에서 주로 쓰이는 단어로, 선발 라인업에는 속하지 않으나 경기 중간에 교체 투입돼 주전 못지 않게 경기장을 누비며 활약하는 여섯번째 선수를 가리킨다. 경기 중 식스맨이 등장하는 이유는 보통 두 가지다. 단순히 주전 멤버가 체력이 떨어졌거나 부상을 당한 상황에서 그를 대신해 뛰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고, 경기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분위기 전환을 위해 투입되는 경우가 있다. 때문에 식스맨은 주전 멤버 못지 않은 기량은 물론 플레이 메이커 기질까지 갖추고 있는 선수가 맡는 것이 보통이다.

식스맨이라는 포지션이 비슷한 의미로 LoL 판에 넘어온 것은 2013 시즌 강현종 감독이 당시 아주부 프로스트와 블레이즈 형제팀을 데리고 CJ 엔투스로 거처를 옮기면서 부터다. 강현종 감독은 소속을 바꾸며 기존 CJ 멤버 중 일부를 흡수해 LoL 판에서 최초로 전략적인 형태의 식스맨 체제를 도입했다.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같은 포지션 선수를 함께 구성해 컨셉에 맞게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내부적인 주전 경쟁을 통해 서로의 실력을 향상시키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CJ 엔투스는 물론이고 이 방식을 따라간 다른 팀들 역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새로운 체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전반적인 분위기와 경기 중 선수 교체가 불가능했던 당시의 제도 때문이었다. 식스맨이라는 새로운 도전은 부정적인 시각만을 남기고 말았다.

이후 2015년도로 넘어오면서 식스맨은 다시 한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단일팀 체제가 확립돼 대부분의 프로게임단들이 5명 이상의 선수로 한 팀을 꾸려야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제도 또한 각 세트 중간에 선수 교체가 가능해지도록 개편됐기 때문이다. 많은 팀들은 식스맨을 갖춘 엔트리를 구성해 2015 시즌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당시 막강한 전력을 뽐내며 압도적으로 왕좌를 탈환한 SKT T1을 제외한 모든 팀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식스맨을 통해 성과를 얻지 못했다. 당시 LCK 상위권에 속하던 KOO, KT, CJ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답은 단순했다. 위에 언급한 전략적 식스맨의 개념인 '주전 멤버의 기량'을 지닌 채 '플레이 스타일이 다른' 선수를 한 포지션에 여러 명 둔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팀들은 안정적인 주전 라인업으로 꾸준히 연습하며 그 멤버로만 공식 경기에 임했고 식스맨은 팀의 엔트리를 채우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오로지 SK텔레콤만이 이를 완성해냈고, 식스맨 체제를 적극 활용해 롤드컵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이후에도 SKT는 2015 시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식스맨을 통해 위기 상황을 극복하거나 팀 시너지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며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게 됐다.


◈ 하나의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 '페이커' 이상혁-'이지훈' 이지훈

▲ '페이커' 이상혁(좌), '이지훈' 이지훈(우)

2015 시즌을 함께 한 '페이커' 이상혁과 '이지훈' 이지훈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최정상급 미드 라이너였다. 두 선수 모두 대부분의 미드 챔피언을 다룰 수 있는 넓은 챔피언 폭을 자랑하지만, 주로 선호하는 챔피언과 그 운영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이 둘을 자유자재로 기용할 수 있다는 점이야 말로 SKT가 그토록 막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세계 최고의 선수로 꼽힐만큼 엄청난 피지컬을 보유하고 있었던 이상혁은 완벽히 계산된 공격적 플레이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는 명장면을 숱하게 만들곤 했다. 이상혁이 출전하는 경기에서의 SKT는 그를 중심으로 매우 공격적인 운영을 펼친다. 이상혁이 홀로 미드 라인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 사이 탑에서는 '마린' 장경환이 정글러의 보살핌을 받고 거대하게 성장해 엄청난 캐리력을 뽐낸다. 전형적인 탑-미드 캐리 운영이다.

이지훈은 지나치게 공격적인, 그래서 때때로 약점을 보일 수도 있는 SKT에 안정감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지훈이 아지르, 직스, 카서스 등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강력한 데미지를 뽐내며 라인전 또한 안정적으로 펼칠 수 있는 챔피언들을 플레이 했을 때 그의 성장을 방해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이지훈이 합류하면 SKT의 팀 색깔 역시 그에 맞게 후반 지향적인 미드-원딜 캐리 운영으로 변한다.

이상혁과 이지훈 두 개의 카드로 LCK에서 충분한 성과를 올렸던 SKT는 세계 무대인 롤드컵에서 식스맨을 활용해 우승 트로피까지 차지한 최초의 팀이 됐다. 이상혁은 조별 리그와 결승 무대서 맹활약하며 팀의 중추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이지훈 역시 조별 리그 일부 경기와 4강전에 선발 출전해 특유의 진득하고 안정적인 경기를 펼쳤고, 무려 KDA 11.25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비록 비교적 안정적으로 팀을 캐리하던 이지훈이 공격적인 움직임으로 매순간 슈퍼 플레이를 펼치는 스타 플레이어 이상혁의 빛에 가려 대부분의 시간을 그늘에 가려진 채 보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팬들은 당시 식스맨 이지훈의 존재감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2015 시즌 이지훈이 없었더라면 SKT는 감히 누구도 넘지 못할 것 같은 위압감을 주는 세계 최고의 팀으로 거듭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 함께 성장한 진정한 식스맨, '벵기' 배성웅-'블랭크' 강선구

▲ '블랭크' 강선구(좌), '벵기' 배성웅(우)

2015 시즌을 화려하게 마친 SKT였지만 시즌이 바뀌자마자 위기를 맞았다. 장경환과 이지훈이 중국으로 떠나면서 최상위 클래스 탑 라이너와 굳건히 허리를 지키던 미드 한 명을 잃었다. 게다가 메타도 SKT의 편이 아니었다. '벵기' 배성웅은 캐리형 정글 메타에 적응하지 못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경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든든한 지원군들을 잃은 이상혁 역시 흔들렸다. 하드 캐리형 원딜 챔피언들이 하향을 당하면서 장경환과 이상혁의 뒤에서 안정적인 캐리력을 자랑하던 '뱅' 배준식이 경기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조차 줄었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SKT이 준비한 카드는 식스맨 정글러 신예 '블랭크' 강선구였다. 하지만 세체팀 SKT 내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은 팀을 물론 본래의 궤도로 올려 놓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강선구를 집어 삼켰다. 데뷔전부터 쓴 맛을 본 강선구는 이기는 경기에서조차 혹평을 들을 정도로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고, 팬들의 비판은 비난과 조롱으로까지 번졌다. 배성웅의 경기력 회복과 메타 적응만이 SKT를 예전의 최강팀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SKT 코치진은 강선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SKT는 정규 리그 중간에 열린 국제 대회 IEM 시즌 10 월드 챔피언십에서 주전으로 기용하는 강수를 뒀고, 거기서 전승 우승을 맛본 강선구는 2라운드부터 크게 발전한 경기력을 뽐냈다. 결국 SKT는 정규 시즌 16승 2패라는 괴물 같은 성적을 기록한 ROX 타이거즈를 누르고 스프링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식스맨 체제의 힘이 가장 큰 진가를 발휘한 대회는 LoL 월드 챔피언십이었다. 당시 SKT는 스프링 시즌 이후 다시 경기력이 조금씩 무너지면서 서머 포스트 시즌서 KT에게 승승패패패 역스윕을 당한 뒤였고, 특히 두 정글러 모두 최악의 폼으로 팬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손쉽게 조별예선을 통과하고 RNG와 마주한 8강. 배성웅이 선발 출전한 1세트서 RNG의 속도전에 밀려 선취 세트를 내주자 SKT는 곧바로 강선구를 투입했다. 강선구는 자신만의 카드인 자크를 내세워 세트 스코어를 동점으로 만들었고, 흐름을 탄 SKT는 그래도 3:1 스코어로 RNG를 꺾고 4강에 안착했다. 우승 후보 ROX와 맞붙은 4강에서는 배성웅이 힘을 내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4세트에서 선보인 배성웅의 니달리는 그간의 걱정을 완전히 불식시키는 완벽한 캐리형 정글러 그 자체였다.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되찾은 배성웅은 그간의 설움을 풀 듯 삼성과의 결승전에서도 활약하며 결국 세번째 롤드컵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한 편의 드라마 같았던 SKT의 2016년은 강선구와 배성웅이 모두 있었기에 가능했다. 누군가 부진한 기간 동안 다른 한 명이 그 빈 자리를 메워주고, 때론 교체 투입으로 팀의 분위기 반전을 이끌어내며 함께 성장한 배성웅과 강선구가 서로를 위해 꼭 필요했던 진정한 식스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 이제 SKT T1의 교체 기용은 언제나 옳다? '피넛' 한왕호-'블랭크' 강선구

▲ '블랭크' 강선구

배성웅과 '듀크' 이호성이 팀을 떠나고 '피넛' 한왕호와 '후니' 허승훈이 새롭게 SKT에 합류했다. 지난 시즌 가장 큰 약점으로 꼽혔던 정글 라인에 최상위권 캐리형 정글러로 꼽히는 한왕호가 보강된다는 소식은 SKT 팬들은 물론 모든 e스포츠 팬들의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몇 시즌 간 세체팀의 이미지를 굳건히 지켜온 SKT가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작정한 것이냐는 타 팀 팬들의 볼멘 소리도 나왔다.

뚜껑을 열어본 SKT의 경기력은 역시나 강력했다. 다만 그 강력함이 많은 팬들이 예상했던 정글이 아닌 탑에서 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을 뿐. 지나치게 공격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우려를 샀던 허승훈이 막강한 교전 능력을 보여주면서 팀의 캐리 라인으로 우뚝 선 것이다. 전 맵을 휘젓고 다니리라 기대했던 한왕호는 아군의 강력한 라인전 능력 덕(?)에 큰 이목을 끌지 못했고, 오히려 종종 실수 장면을 연출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특히 아프리카전은 이상혁의 부진과 맞물리면서 시즌 첫 패배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따끔한 패배가 약이 됐는지 바로 이어진 bbq 올리버스와의 경기에서는 각성한 경기력으로 캐리하기도 했지만, 전 동료인 '프릴라' 듀오와 마주한 롱주 게이밍전 1세트서 한왕호는 뚜렷한 성과나 팀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세트 선취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두번째 패배라는 위기 앞에 선 SKT는 강선구 교체 투입이라는 승부수를 띄웠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카직스라는 공격적인 챔피언을 선택해 한왕호보다 다소 수비적이지만 더 안정적인 플레이를 펼친 강선구는 아군의 라인전에 힘을 보태는 뛰어난 갱킹과 준수한 한타를 뽐내며 2:1 승리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했다.



강선구가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SKT은 언제든 내놓을 수 있는 식스맨을 보유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됐다. 이는 스프링 스플릿 1라운드 중 3강 반열에 올라있는 삼성 그리고 우승 후보로 꼽히는 최대 라이벌 kt와의 두 경기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당연히 SKT에게 좋은 카드일 수 밖에 없다. 또한 2016년 '벵기-블랭크' 체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 '피넛-블랭크' 체제도 시간을 거듭할수록 강력해지는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국내 및 국제 리그에서 SKT은 그들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세계 최고의 팀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