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게임을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만드는 요소는 다양하다. 깔끔한 게임 디자인이나 시나리오, 그리고 그래픽과 아트,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게임을 완성하는 요소는 너무나 많으므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콕 집어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다. '캐릭터'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조금 다르다. 게임을 이루는 수많은 구성 요소 중 하나인 것은 맞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중요도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정도일까?

'캐릭터'는 딱히 '게임'에서만 쓰이는 요소가 아니다. 영화, 만화, 소설. 모든 문화 미디어에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 캐릭터는 곧 힘이 된다. 때로는 캐릭터의 인기가 작품의 인기를 뒤엎기도 할 정도다. 게임이 재미없어도 좋아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기 때문에 게임을 구매하는 경우가 이와 같은 사례 아니던가. 물론 그 인기가 영원히 이어지지도 않는다. 마치 숨을 쉬는 하나의 생명처럼, 캐릭터의 인기는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삶과 죽음을 겪는다.

'하라다 카츠히로' PD는 세계 최고의 격투 게임 시리즈인 '철권' 시리즈의 메인 프로듀서다. 생각해보면 '격투 게임'만큼이나 '캐릭터'에 의존하는 장르가 또 없다. 시작부터 끝까지 캐릭터 간의 격투로 이뤄진 게임에서 그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마블코믹스의 '스탠 리'정도를 제외하면, 캐릭터 메이킹에 있어 그만큼 정통한 사람도 찾기 힘드리라. 그런 그가 언리얼서밋의 기조 강연자로 강단에 섰다. 미리 알려진 강연 주제는 게임 개발과 프로듀싱에 대한 철학. 하지만 진짜 내용은 그와 '철권' 팀이 쌓아온 '캐릭터 메이킹'에 대한 노하우였다.

▲ 반다이 남코 '하라다 카츠히로' 수석 프로듀서



■ '좋은 캐릭터'란 어떤 캐릭터를 말함인가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하라다 PD는 간단한 농담으로 대중의 긴장을 풀었다. 언리얼서밋에 온 만큼, 언리얼엔진에 대한 홍보를 해야겠으니 언리얼엔진 라이센스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해당 국가 지사장의 불륜 여부(...)를 조사하면 라이센스 가격을 꽤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그 지사장을 소재로 훌륭한(그러니까 조금 다른 의미로) 영상을 만들어 GDC와 같은 큰 무대에 들고 나가 "우리가 이 정도로 영상을 만들 수 있다"라고 발표한다고 하면 거의 무조건 가격을 깎을 수 있다고 말했다.

▲ 미팅장소가 경찰서가 될 수도 있다. 잘 생각하자

짦은 농담이 끝난 후, 본격적인 강연이 시작되었다. 제대로 청중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상징과 같은 선글라스를 벗은 그가 말했다.

"좋은 캐릭터란 어떤 캐릭터일까요?"

'좋은 캐릭터'에 대한 정의는 굉장히 유동적이다.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어떤 게임이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조금 경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그 게임을 팔리게 하는지, 혹은 캐릭터 상품이 잘 팔리는지도 좋은 캐릭터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남코와 하라다 PD의 팀이 생각하는 '좋은 캐릭터'는 '10년 이상의 인기를 유지하면서, 100만 단위 이상의 상품을 팔 수 있는 캐릭터'이다. 문제는 이런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과연 쉬우냐는 거다.

"타겟이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캐릭터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는 거죠"


먼저, 하라다 PD는 캐릭터를 디자인하기 전에 그 캐릭터가 누구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 세밀하고 명확하게 가설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한국에 거주하는 20대 남성, UFC와 같은 종합 격투기를 즐기고, 서양 문화에 관한 관심이 높음, 어린 시절 약간의 애니메이션 감상 경험이 있으며, 좋아하는 영화는 히어로물과 액션물(어디까지나 예시이다)'과 같은 식으로 타겟 고객층을 정밀하게 설정하고, 이를 세분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가설을 '수치화'해서 데이터로 남기는 것이다. 어떤 고객층이 이 캐릭터를 좋아했으면 하는지, 그리고 이 캐릭터와 관련된 상품을 샀으면 하는지를 계속 생각하고, 또 검토해야 한다. 한 가지 놓치면 안 되는 점도 있다. 고객 스스로 본인의 니즈를 100%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숨은 니즈까지 전부 읽어내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필요하고, 이 데이터는 가설과 그 결과로 쌓여간다.

▲ 사람은 본인도 모르는 니즈가 있기 마련이다.

'철권'과 '섬머 레슨'을 예로 들어보자. '철권'은 젊은 게이머 층을 대상으로 설정했으며, 격투 게임과 PVP 콘텐츠에 높은 관심이 있는 계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다. 이 전제에 각각 문화권, 혹은 가치관에 따른 테이스트가 가미되면서 여러 캐릭터가 탄생했다. '섬머 레슨'은 VR 체험을 원하는 '얼리어답터'층을 노리고 만들어진 게임이다. '섬머 레슨'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새로운 장비나 기계에 돈을 아끼지 않는 계층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 게임의 목적에 따라 타겟 유저층이 달라질 수도 있다.



■ 지금의 성공보다 미래에 쓸 '데이터'를 쌓아라

가설을 세우고, 이에 맞는 캐릭터 컨셉이 나왔다면, 이때부터는 적극 피드백을 수용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피드백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출시 전에 얻는 피드백이고, 나머지 하나는 출시 이후에 얻을 수 있는 피드백이다. 개발 중에 얻을 수 있는 피드백은 개발 과정에서 매우 귀중한 자산이다. 보통 해외 지사에게서, 혹은 매우 제한적으로 진행되는 비공개 테스트에서 이런 피드백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드백은 출시 이후에 받게 된다. 이러면 늦은 게 아닌가 싶지만, 이 피드백의 목적은 '인기 없는 캐릭터의 구원'이 아니다. 게임 출시 이후, 혹은 출시 이전에 받을 수 있는 수많은 피드백에서 가장 가치 있는 정보는 과연 이 캐릭터에 대한 가설이 맞았느냐이다. 비록 캐릭터가 대중에게 사랑받고, 많은 캐릭터 상품이 팔려나갔다 해도 캐릭터 제작 이전에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두지 않았다면,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하다. 성공한 캐릭터에 대한 자료수집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 성공은 일회용에 그치기 때문이다.


피드백을 얻고, 가설과 실제 데이터 사이의 차이를 검증하는 과정에서도 잊어선 안 될 점이 있다. 사람은 누구라도 상황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때문이 피드백을 본인이 얻고 싶은 결과로 유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마음에 흔들리지 말고 냉정하게 데이터를 보아야 한다.

이 검증 과정을 통해 쌓인 데이터는 곧 다음 캐릭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차를 줄일 수 있는 귀중한 데이터가 된다. 물론 데이터도 유통기한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상이나, 삶의 양식이 바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금은 아이디어의 정확도와 작업팀의 숙련도를 높이는데 도움을 준다.


하라다 PD는 철권의 개발 파이프라인 일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철권'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점이 있어요. 우리는 게임을 출시하기 전에, 먼저 캐릭터들을 분석해 인기 순위부터 사용률의 순위까지 모든 데이터에 대한 가설을 세워 둡니다. 물론 이런 과정이 다른 개발자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잘 알고 있어요.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지 묻는 분들도 많이 보았죠.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데이터와 실제 사례를 비교하면서 드러나는 편차를 분석하면, 다음 시리즈에서는 그 차이를 더 줄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사례를 거울삼아 미래의 이정표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너무나 뚜렷한 진리다. 하라다 PD와 그의 팀은 조금 달랐다. 단순히 과거의 사례를 거울삼는다기보단, 미리 다음날을 비출 거울을 만들어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이런 의견도 있다. "왜 처음부터 모든 캐릭터를 인기 캐릭터로 만들지 않는 건가?" 하라다 PD는 이런 의견에 대해 모든 캐릭터가 인기 있을 거란 것은 이상론에 지나지 않음을 다른 분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이런 예측이 완전히 빗나갈 때도 있다. 가령 '철권5; 다크 리저렉션'에서 등장한 신규 캐릭터인 '리리'와 '드라구노프'의 경우가 그렇다. 개발진은 '리리'를 푸시하면서 '드라구노프'를 저인기 캐릭터로 가정했다.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더 찬란해 보이는 일종의 '빛과 그림자 효과'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이와 완전히 달랐다. '드라구노프'의 인기는 예상 이상으로 훨씬 높아 최상위권 캐릭터들과도 경쟁할 정도로 높았고, 결국 1회용 캐릭터로 예정되어 있던 드라구노프는 다음 시리즈에도 연달아 등장하게 되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건, '나쁜 캐릭터'라 해도 다 쓸모가 있다는 점이다. 스모 선수에서 모티브를 딴 철권 캐릭터인 '간류'는 사용 빈도도, 인기도도 전 세계 모든 시장에서 최하위권이다. 그럼에도 간류가 시리즈에 거듭 등장한 이유는 '철권'이라는 게임의 내적 세그먼트를 고려할 때 꼭 필요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간류는 꾸준히 철권 시리즈에서 살아남았다. 물론 7편에서는 은퇴하겠지만.

▲ 이제는 볼 수 없는...



■ '가설, 입증, 그리고 기록' - 캐릭터 메이킹의 '바이블'을 만드는 법

하라다 PD의 발표를 요약하자면, 세 가지 단어로 축약할 수 있다. '가설', '입증', 그리고 '기록'이 그것이다. 캐릭터의 컨셉과 디자인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대상 유저층 또한 구체적으로 설정함으로써 데이터를 만들 '기반'을 닦는다. 단순히 대중에게 통하는가? 가 아닌, 어떤 대중에게 통하는가?를 파악해 데이터를 보다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후, 이 가설을 현실의 데이터와 비교해 어떤 부분은 맞고, 또 어떤 부분은 틀리는지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예상과는 다른 부분은 없었는지, 트렌드나 패션 코드를 잘못 짚지는 않았는지. 여러 방향에서 가설과 실례의 차이를 들여다보고, 이를 데이터로 정리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는 '기록'이다. 이 과정 하나하나를 겪으며 쌓인 데이터를 문서로 만들어 기록한다. 이 기록들이 쌓이면서 '총람'이 만들어지고, 나아가 캐릭터 메이킹의 '바이블'이 된다. 지금의 성공도 좋지만, 앞으로 더 좋은 캐릭터를 만들고, 더 오랜 시간 사랑받기 위한 일이다.


기조 강연치고는 짧은 40분 강연의 끝. 하라다 카츠히로 PD는 PPT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디어는 더는 아날로그가 아닙니다. 당연히 디지털로 치환될 수 있는 부분이고, 나아가 수치화할 수 있지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실례와 비교해가며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 쓸데없는 작업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지금의 게임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나아가 우리 다음 세대의 사람들이 우리 없이도 게임의 중심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 이런 과정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