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많은 기사에서 말했지만, '로보 리콜'은 특별한 게임이다. 게임으로서의 재미를 말함이 아니다. 분명 재미있는 게임이지만, 이보다 더 재미있는 게임도 찾아보라면 많이 있다. '로보 리콜'이 특별한 이유는 이 게임이 상용화를 노리고 개발한 게임이 아닌, '실험작'임에도, 현존 최고의 VR게임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에픽게임즈는 VR 게임이 어떤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단순히 HMD를 쓴 상태부터 시작해, 움직이며 영상을 감상하거나, 소파에 앉아 플레이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왔다. 그 와중 '오큘러스 터치'를 접하게 되었고, 10주만에 '불릿 트레인'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협력 파트너인 '오큘러스'는 '불릿 트레인'이라는 아웃풋에 만족했다.

그리고 주어진 다음 기회. 에픽게임즈는 VR로 만들 수 있는 게임의 완성형을 보고 싶었다. '불릿 트레인'으로 쌓은 노하우와 '언리얼 엔진4'의 기능을 활용했다. 그렇게 '로보 리콜'이 탄생했다. '언리얼서밋 2017'에서, '로보 리콜'의 리드 디자이너인 '닉 도널드슨'의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로보 리콜'에 대한 강연은 꽤 많았다. 아트와 프로그래밍에 대한 강연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궁금한 건 '디자인'이었다. VR 콘텐츠가 아직 '미완성이다'라는 말을 듣는 이유는 레퍼런스라고 할 만한 디자인이 없어 게임플레이에 허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 리드 디자이너의 강연이라니. 궁금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 닉 도널드슨(Nick Donaldson) 에픽게임즈 VR팀 리드 디자이너



■ Step 1. '로보 리콜'은 어떤 게임이어야 하는가?


먼저, 닉 도널드슨은 '로보 리콜'을 정의했다. 게임을 만들기 전에, 먼저 이 게임이 무엇이고, 어떤 것까지 가능하며, 어떤 것이 불가능한지, 그리고 어떤 요소를 집어넣을지 자세히 계획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한 건 '플레이어'의 감성이다.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게임에 임하게 할 것인가.

해답은 어렵지 않았다. 닉 도널드슨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를 생각했다. '매트릭스' 또한 가상 공간이 무대임을 생각해보면 꽤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생각한 '네오'의 특징은 이런 것들이다. 수많은 적을 상대로도 그 자리에서 모두 처치할 수 있고, 쿨하게 총을 쏠 수 있어야 한다. 모르긴 몰라도 '불릿 트레인'과 다르게 '로보 리콜'의 주적이 로봇인 이유도 이런 무차별 액션을 구현함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려면 적을 무기물로 설정하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일 거다.

▲ 가상 공간 + 슈팅 + 주인공 =?

여기에 '아케이드'의 감성을 더 담고자 했다. 복잡함 없이 한 번 즐기는 것으로 깔끔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게임. 하지만 그 게임 플레이 자체가 재미있어 다시 플레이하고 싶은 게임이 '로보 리콜'의 지향점이었다. 때문에 '점수'와 '멀티플라이어(콤보 달성 시 점수가 배로 뛰는 시스템)'등 아케이드에서 볼법한 여러 시스템을 가져왔다.

기본적인 게임의 컨셉을 정한 후엔, 게임에서 필요없는 요소들을 지정했다. 진지한 스토리는 '로보 리콜'에 필요없는 요소다. 마찬가지로 비장한 분위기 또한 필요 없다. '로보 리콜'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벼운 분위기에서, 즐겁고 리드미컬한 플레이를 지향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기획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또 있었다. '로보 리콜'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 '플랫폼'에 대한 것이다. '로보 리콜'은 종전에 보기 힘든 독특한 디바이스와 장치를 사용하는 게임이다. 그러므로 그는 VR이라는 플랫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감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싶었고, 나아가 로보 리콜의 가상 공간에 진입한 플레이어에게 충분한 현실감을 주고 싶었다. '게임으로서의 재미'와 'VR이라는 플랫폼의 특징'. 닉 도널드슨은 마치 판타지와 현실의 벽에서 고민하듯, 이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두 가치를 저울질했다.

▲ '게임'이지만, VR이기에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VR이라는 생소한 장비가 물리적으로 가지는 특징 또한 고려 대상이었다. 닉과 그의 팀은 사람이 VR 환경에서 얼마나 지속해서 게임을 할 수 있는지 여러 테스트를 거쳤고, 수없이 검증 과정을 거친 끝에 '로보 리콜'의 볼륨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로보 리콜'의 개념이 완성되었다. 앞서 언급한 많은 핵심 요소를 기조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간단한 의사 결정만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 그것이 '로보 리콜'의 가치이자 게임의 '기둥(Pillars)'이었다.



■ Step 2. 게임 속 플레이어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동시에, 닉과 그의 팀은 '로보 리콜'이라는 새로운 게임에 도입될 수많은 시스템을 검토했다.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이동 방식'이었다. 매우 단순하게 컨트롤러의 스틱으로 이동하게 할 수도 있지만, 이 방법은 테스터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바람에 폐기되었다. '이브 발키리'와 비슷한 식으로 '콕핏'에 탑승하는 형태의 이동 방법도 고려해 보았지만, 이는 '로보 리콜'의 핵심 가치와 상반되는 방법이었기에 역시 반려되었다.

다음으로 고려된 방식이 바로 '텔레포트'였다. '불릿 트레인'에서도 주된 이동 방법은 텔레포트였다. 하지만 로보 리콜과는 달랐다. '불릿 트레인'에서는 정해진 위치로만 이동할 수 있었으며, 이동 시 플레이어가 보는 방향도 늘 일정했다. 이는 '오큘러스'의 기기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오큘러스'는 HTC VIVE와 같이 후면 센서를 배치해 정교한 룸스케일링 모션 트래킹을 하지 않고, 전면 센서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뒤로 돌아버리면 움직임을 잡을 수 없는 단점이 있다.

▲ 이미 불릿 트레인에서 구현되었던 '텔레포트'

때문에 '불릿 트레인'에서는 늘 플레이어의 시선을 고정해야 했고, 적들 또한 플레이어가 보는 방향에서만 나오게 배치해야 했다. 하지만 '로보 리콜'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이동을 추구했다. 앞서 말한 'VR'이라는 플랫폼의 특징인 '현실감'을 높이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레이저 방식의 포인터를 이용하고, 손목을 Z축으로 회전시켜 시선의 방향을 정하게 만들어 보았으나, 직관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레이저는 너무 멀리까지 나가 플레이어가 게임을 이탈해 버리는 일이 생겼다.이후, 시행착오를 거쳐 현재의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아날로그 스틱을 누른 채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만들었고, 레이저 방식의 이동 위치 조정 방식은 '버짓 컷'의 포물선형 궤적 추적 시스템을 따 왔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훔쳐 왔네요.(웃음)"

▲ '버짓
컷'의 텔레포트 지정 방식을 살짝(?) 따라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이동 시스템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이런 문제도 있다. 플레이어가 왼쪽으로 텔레포트 하고 싶어 왼쪽으로 몸을 돌린 채 시선의 방향을 맞추고, 텔레포트를 시도하면, 몸은 왼쪽으로 돌아간 상황이다. 이때 몸을 다시 정위치하면, 처음 생각했던 곳보다 오른쪽을 바라보게 된다. 때문에 '프론트 페이싱 트래킹'기능을 이용해 몸을 돌린 채 이동을 하면 그만큼 시선이 기울어 있게 만들었다. 닉 도널드슨은 이 문제에 대해 말하며, 아마 나중에 VR 장비가 더욱 발전해 전방향 트래킹이 가능해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일 거라 말했다.



■ Step 3. '로보 리콜'의 가장 큰 가치 '상호작용'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상호작용'은 로보 리콜이라는 게임을 이루는 큰 축이자, 게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성요소다. 그러므로 더 신경을 써야 할 수밖에 없었다. '불릿 트레인'에서 '오큘러스 터치'를 처음 접한 후, 닉과 그의 팀은 터치 컨트롤러를 이용한 상호 작용을 더욱 확장시키고 싶었다. 처음으로 당면한 문제는, 플레이어가 어떤 것을 잡을 수 있고, 어떤 것을 잡을 수 없는지 쉽게 알게 하는 것이었다.

'불릿 트레인'에서는 손을 가져다 대면 오브젝트가 노랗게 하이라이트 되어 상호작용 여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거리가 매우 짧아 사실상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던 중, 닉은 '라스트 오브 어스'의 상호 작용 시스템을 볼 수 있었다.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는 상호작용할 수 있는 물건이 동그랗게 하이라이트 되요. 그래서 또 훔쳐왔죠.(웃음)"

▲ 상호작용 식별 아이콘은 요 게임에서 슬쩍(?)했다.

'재장전'또한 고민거리였다. 슈팅 게임인 만큼, 재장전은 물리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손으로 산탄총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전하는 '플립 코크'장전을 구현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VR 내에서 재장전을 시켜보니 게임의 분위기를 깨버릴 정도로 멋이 없었다. 닉 도널드슨은 초심으로 돌아갔다.

"네오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거죠. 우리는 이걸 WWND(What would Neo do?)라고 부릅니다.(웃음) 그래서 영화를 보았더니, 쓴 총은 그냥 버리더군요. 그리고 새 총을 꺼내는 거죠."

▲ 다 쓴 총은 냅다 버리는 쿨가이

그래서 그렇게 만들었다. 다 쓴 총은 쿨하게 적에게 던져 버리고, 새 총을 꺼내 쓸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 쓴 총을 적에게 던져 맞추면 총이 장전되고, 적은 피해를 입게 되는 등의 시스템도 구현했고, 혹은 적이 들고 있던 총을 놓쳐 그것을 붙잡고 쏠 수 있게 만드는 등 다양한 경우의 수를 구현해 두었다.

적을 붙잡는 것도 로보 리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로보 리콜에서는 적을 붙잡아 던지거나, 붙잡은 채 펀치를 날리거나, 혹은 사지를 잡아 뜯을 수 있는 등 다양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위급할 땐 잡아서 방패로 써도 될 정도다.

▲ 잡아서 콩콩 쥐어박을 수도 있다

앞서, '로보 리콜'에서는 VR이라는 장치가 주는 자유로움과 현실성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적들과의 상호 작용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닉 도널드슨은 '로보 리콜'의 모든 액션이 스크립트가 짜인 연출이 아닌, 플레이어가 직접 만들어나가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정교한 물리 엔진을 적용해 어떤 경우에도 원인과 결과가 확실하게 하였고, 다양한 적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해두었다.

예를 들어 굉장히 빠른 적인 '패스트봇'의 팔은 뜯으면 마치 채찍처럼 적을 휘감는 무기로 쓸 수 있다. '드론'은 붙잡아 레이저 무기로 쓸 수 있으며, 기본적인 '바이페드(Biped)'도 물리적 타격을 이용해 무기로 사용하던가, 적의 총알을 막는 방패로 쓸 수 있다. 이런 고민이 합쳐지면서 '로보 리콜'의 플레이가 완성되었다. 이어 닉 도널드슨은 'HUD' 배치에 대해 짧게 설명한 후, 강연을 마쳤다.



■ Another Step. '로보 리콜'또한 더 나은 게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닉 도널드슨의 강연은 빠른 페이스로 진행되었음에도 대중의 집중을 유지했고, 강연이 끝난 후에는 수많은 이들의 질의응답을 받았다. 가장 성공적인 VR 게임의 디자인에 대한 설명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물론, '로보 리콜'은 언제까지나 완벽한 게임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영화가 없고, 완벽한 소설이 없듯, 완벽한 게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 콘텐츠는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수학이 아니니까. 언제나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고, 더 훌륭한 작품이 등장할 수 있다.

▲ 어디까지나 '거쳐 가는' 과정

닉의 강연 또한 이런 사실을 전제로 깔아둔 채 진행된 강연이었다. 강연 중간마다 그는 앞으로는 더 달라질 것이다, 혹은 나중에는 해결될 것이라는 말을 섞었다. 그 또한 '로보 리콜'이 VR 콘텐츠라는 거대한 시장으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로보 리콜'은 더는 업데이트가 계획되어있지 않다. 돈을 주고 사는 게임도 아니며, 오히려 '모드킷'을 통해 많은 유저, 혹은 개발자들이 로보 리콜의 요소요소를 뜯어볼 수 있게 하여 두었다. 이를 이용해 직접 게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기자이기 이전에 업계인의 한 사람으로서, 에픽게임즈의 이런 기조는 항상 기꺼운 일이다. 본인들의 작품을 다른 이들이 길을 잃지 않게 만들어줄 이정표로서 나눈다는 것. 그의 강연에서 얻은 지식도 물론 값졌지만, 에픽게임즈의 기조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아마 이 강연을 들으며 얻은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