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넥슨 왓스튜디오 강임성 게임 디자인 1파트 파트장

특정한 게임 포스트모템이 아닌 디자이너 본인의 커리어를 포스트모템하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넥슨 왓스튜디오의 강임성 게임 디자인 1파트 파트장은 자신의 커리어를 부검대에 올렸다.

* 전달의 용이함을 위해 1인칭으로 서술한다.


나는 늦깎이 게임 디자이너다. 30줄에 들어서야 기획자로 첫발을 디뎠다.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신입부터([NDC2016] 3년 차 디자이너 이정수, "나의 직업 자존감은 어디에?") 디렉터에 이르기까지([NDC2016] 이은석 디렉터, "게임 개발자들이여! '창잉'적인 인재가 되라!")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거기에 구체적인 사례를 얹고 싶어서 발표를 신청하게 됐다. 나는 살아있으니 부검(포스트모템)이 아니라 생검 쯤 되겠다. 내가 뭐 대단한 디자이너도 아니고. 그냥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다.

난 대학원을 8년 다녔다. 사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다.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해서 지질학을 선택했다. 공부해 보니 재미있어서 고생물학을 대학원가서 더 공부했다. 진학에 별다른 고민은 없었다. 그냥 하던 거니까 했다. 게임 개발? 그때는 상상도 하지 않던 때다.

그런데 대학원에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학부생 때는 시키는 것만 해도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왔는데 혼자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대학원은 그렇지 않았다. 하던 대로 공부하는데도 논문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병에 걸려서, 무릎을 다쳐서, 결혼해서 늦어지기는 했지만, 내 문제는 '일을 완료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거다.

나는 이걸 '어설픈 완벽주의자의 함정'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 함정에 빠져있었다.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자 할 때 마음을 다잡고 제작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만들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부끄러워서 결과물을 중간 공유하지 않았다. 부끄러우니까 스펙을 이것저것 막 추가하다 보면 기일에 맞추기 위해 급히 추가한 티가 많이 나는 결과물이 나온다. 산만하기 까지 하다. 도대체 원래 뭘 하려고 했던지 조차 모를 정도로.

그러다보면 마감을 못 지키고 일정을 연기해버린다. 일정이 늘어나니 나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들도 그만큼 기대가 올라간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뭔가를 만들라 하면. 다시 부끄러워서 중간 공유를 건너뛰는 단계를 순환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좀 바뀌었다. 제작하고 중간 공유를 한다.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아 피드백에 기반을 두어 더 나은 방향으로 접근한다. 그러면 더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프로젝트가 '완성'된다. 부끄럽고 두려워도 '이게 내 최선이다'라고 인정하고 공유하는 게 '완성'을 가져왔다.

▲ 페이스북 사무실에 붙어있는 "완벽한 것보다는 일을 완수한 게 낫다"

하지만 이때는 이 사실을 몰랐다. 몇 년의 악순환을 계속했다.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잠을 안 자면서까지 해도 결과물은 초라했다. 그러자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다든지, 블로그를 운영한다든지 에너지를 다른 곳에 썼다.

석사 3년, 박사 5년 총 8년. 변변한 결과물이 없었다. 앞서나간 선배, 동기, 후배들을 보며 초라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먹고 사는'문제에 당면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과연 나는 미래에 생존할 수 있겠느냐는 고민이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생태학에는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라는 개념이 있다. 스페셜리스트는 서식범위는 좁지만, 자신이 전문화한 환경에서는 강력함을 뽐내는, 이를테면 팬더 같은 존재다. 제너럴리스트는 서식범위가 넓은 너구리 같은 동물로 대표할 수 있다. 제너럴리스트는 다양한 환경이나 생활 방식에 맞춰 살 수 있으며 스페셜리스트가 자리 잡기 힘든 곳에서 득세한다.

생명 진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환경이 생기면 제너럴리스트가 재빨리 지배한다. 그러다 환경이 안정되면 스페셜리스트가 대두하여 제너럴리스트를 몰아낸다. 다시 환경이 바뀌면 스페셜리스트는 멸종하고 제너럴리스트가 다시 지배하는 구조가 순환한다.

나는 스페셜리스트였다. 스페셜리스트의 최종 테크트리라고 불리는 대학원생 - 연구원 - 교수임용 코스를 밝고 있었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들인 시간 대비 성과가 형편없는 삼류 스페셜리스트가 될 판이었다. 위기였다. 답답했다.


냉정하게 나를 돌아보니 1~2년 이내에 박사를 끝낸다는 보장도 없었고, 박사 과정을 끝내도 괜찮은 스페셜리스트라는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접었다. 8년을 들인 시간이 아까웠지만, 매몰 비용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하면 안 됐다. 이때가 내 나이 서른 이었다.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스페셜리스트의 길에 실패했으니 제너럴리스트의 삶을 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새로 시작한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부터 고민했다. 지금까지 해온 게 공부밖에 없어서 해본 게 별로 없었다.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약간의 웹디자인을 하거나 꾸준히 잡다한 글을 쓴 것들, 그리고 약간의 검색력과 번역 아르바이트 경력이 있었다. 뭘 해도 고만고만했다. 그래서 여기서 선택하기보다는 제일 열심히 할 것을 찾기로 했다.

당시 나는 휴대용 전자기기에 관심이 많았다. Palm PDA부터 아이팟, 아이팟 터치,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시대였다. 하루하루 새로 나오는 뉴스만 봐도 재미있었다. 저 바닥에서 일하고 싶다는 선망이 가득했다.

▲ 환경이 바뀌면 제너럴리스트에게도 기회가 올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시기에 마침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발표했다. 그래서 스마트폰 앱을 만드는 일을 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새로운 환경이 열렸기에, 기존 피처폰 개발하던 스페셜리스트들이 미처 점유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 말은 새로 시작하는 내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또 어디선가 '미래는 소프트웨어가 바꿀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주워듣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굉장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림을 못 그리고 프로그래밍을 못해서 기획 직군을 지원했다. 딱히 전문성이 눈에 보이지도 않아 진입 장벽이 낮아 보였다. 또, Palm PDA나 아이팟 터치를 써오면서 일찍부터 사용자 경험이 쌓였기에 아이디어와 자신도 있었다. 물론 앱을 많이 써본 것과 앱을 개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처음으로 기획서를 한 장 작성했다. 그 때 난 '한 장'에 꽂혀있을 때라 그랬다. 뭔가 그럴싸하게 쓴 것 같았다. 지금 보면 정말 부끄럽고 부끄럽다.


뭐 어쨌든 간에 이 기획서를 바탕으로 상세계획서를 작성하게 됐고 2009년 10월, 30세 늦깎이 디자이너로 회사에 들어가게 된다. 내가 들어간 곳은 '블루크라우드'였다. 대표가 휴대폰 게임 업계 1세대로 믿음이 갔으며 무엇보다 기획/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쌓은 상호 신뢰가 나를 이 회사를 선택하도록 했다.

사회 초년생이자 초보자라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세분된 업무를 맡기보다는 이것저것 실무 경험을 빠르게 늘려가고 싶었다. 또한, 의사 결정 구조가 짧은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출발선이 늦었기에 굉장히 초조했다. 의사결정 구조가 짧은 곳을 찾은 이유도 의사 결정이 느린 곳에서 고생하기보다는 빠르게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초조함과 함께 불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QA 업무를 했는데 재미없었다. 피처폰 관련 일이었는데 아이폰이 있음에도 피처폰 일을 해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그러다가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발표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아이패드용 앱을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맡게 된 '프로젝트 인지니'는 장애 아동을 위한 인지 훈련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엔씨소프트문화재단과 아산병원, 양현재단이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작고 단순한 게임을 여러 개 만들어야 했기에 빠르게 성장할 기회라 판단했다. 또한, 모두에게 있어 새로운 도전이었기에 늦깎이라는 페널티 대신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첫 디자인을 맞게 되니 의욕이 넘쳐 흘렀다. 요즘 말로 신나서 노오오력을 했다. 장애 아동 교육 서적도 읽어보고 iOS 휴먼 인터페스 가이드라인도 읽었다. 그렇게 공부해서 기획서 수십 장을 만들었다. 스스로 '이 정도면 그럴싸하지?'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기획서를 프로그래머에게 넘겼는데 프로그래머의 표정이 이상했다. 문장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다시 기획서를 훑어봤다.

J. 난이도 조절: 4회 연속 정답일 경우 1단계 상승, 3회 연속 오답일 경우 1단계 하강해서 사용자의 수준에 맞는 문제를 출제한다. ('정답'은 처음 입력한 답이 정답, '오답'은 정답을 처음으로 입력하지 못한 경우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 문제에서 여러 번 오답을 입력해도 1회 오답으로 간주한다)

마침표가 두 개밖에 없는 이상하도록 긴 문장이었다. 너무 길어서 전달력이 부족했다. 지금 같으면 아래처럼 썼을 거다.

J. 난이도 조절
첫 입력이 정답/오답인지 판단
난이도 1단계 높임: 4회 연속 첫 입력이 정답이면
난이도 1단계 낮춤: 3회 연속 첫 입력이 오답이면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담당 프로그래머가 다가오더니 "이거 뭔가 빠졌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하면 어떻게 돼요?"라고 물어왔다. 음. 나는 생각해보지 않은 영역이 있다.

물론 '완전무결한 기획서'는 유니콘 같은 거라 믿는다. 특히 게임처럼 여러 기능이 복잡하게 얽히는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에서 '오류가 하나도 없는, 빠진 게 하나도 없는' 기획서는 유연함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프로그래머가 구조를 구상할 수 있을 정도의 요구 조건은 갖춰줘야 했다.

나는 이를 구멍이라 표현했다. 구멍을 줄이기 위해 마인드맵을 수시로 체크하고 맥킨지의 MECE(Mutually Exclusive Collectively Exhaustive, 상호배제와 전체포괄) 등으로 빠뜨리는 것을 줄이려 했다. 또한, 프로그래머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순서도 등으로 로직 훈련을 했다.

프로그래머는 로직 구성을 전문적으로 훈련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게 경력이니까. 비전공 디자이너의 로직이 불완전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느 선에서 조절할지는 담당자들의 호흡에 달려있다. 소통도구로써 순서도는 조금 낡았지만, 놓친 예외가 없는지, 로직이 쓸만한지 훈련용으로 쓰기에는 유효했다. 엘리베이터, 자판기 ATM기, 셀프 주유소 등 생활 속 로직에서 순서도를 역기획하는 것도 좋은 훈련이었다.


디자이너로서 시간이 좀 지나다 보니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그림도 안 그리고 코딩도 안 하는데, 과연 게임 디자이너는 왜 팀에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그림 못 그리고 프로그래밍 못해서 기획하는 것 같았다. 자괴감이 몰려 들어왔다. 일정 관리하고 업무 조율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개발에서 디자이너는 어떤 전문 역량을 발휘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트는 아티스트가, 프로그래밍은 프로그래머가 당연히 더 잘한다. 그럼 구현력이 없는 앱/게임 디자이너는 과연 전문 역량이 없는 것일까? 의사소통하고 일정 조율하는 것도 기획자의 역할이지만, 프로듀싱이 아닌 '게임 디자인'에서 전문 역량은 펼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의 시작과 끝은 '다른 디자이너와 나는 뭐가 다르지?'였다. 거기서 '엣지'라는 결론을 찾을 수 있었다. 개성 있고 독특한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 다른 게임 디자이너는 못 만드는, 그리고 아티스트나 프로그래머가 보았을 때 만들고 싶은 욕심이 드는 그런 디자인을 만들기로 했다.

당시 나는 프로젝트 인지니에 들어갈 개구리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눈과 손 협응 능력의 향상이 목적인 게임이었는데 요구 조건 안에서 원래 목적을 만족하면서도 개성을 불어넣으려 노력했다. 제한 시간 동안 게임을 즐기면 종료되는 게임이었다. 게임 오버라는 부정적인 경험을 실패로 연결해 전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HUD 대신 게임 세계의 요소로 녹여내는 UI

그런데 장애 아동들이 이용하는 게임이다 보니 시간을 알려주는 방법에 난항을 겪었다. 90초 제한 타이머를 표현해야 하는데 다양한 연령대, 장애 정도의 아동에게 '타이머'를 이해시킬 방법을 찾기 힘들었다. 아이들은 숫자나 초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여 숫자로 표현하기는 무리가 있었으며, 시계도 볼 줄 몰라 시계로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추상적인 프로그레스 바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 판단했다.

그러다 예전에 본 글이 떠올랐다. '데드 스페이스'의 UI에 관련한 글이었는데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데드 스페이스의 UI처럼 HUD 대신 게임 세계의 요소로 녹여내기로 했다. 개구리 뒤 배경에 해를 두고 뜨고 지는 모습을 색을 달리해 표현했다.

공부한 걸 써먹었다는 뿌듯함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잘 알고 재미있게 플레이하는 모습에 보람까지도 느꼈다. 여전히 개구리 게임은 아이들이 좋아하며 플레이하고 있다. 솔직히 자부심도 생겼다.

프로젝트 인지니를 진행하면서 문서도 예전과 비교했을 때 한결 가독성 있고 간결해졌다. 빠르게 레벨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늘 초조했으니까.

새로운 뭔가를 만들 때마다 좌충우돌 한다는 게 늘 아쉬웠다. 커리어 출발이 늦은 탓에 더욱 초조했다. 실패를 줄이면서 좀 더 빠르게 레벨업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뭘 할지 모르니까 넓게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 물론 이런 일도 있었다.

최신 테크 뉴스, 게임 개발 인터뷰는 물론이고 그래픽 디자인, UI, 스토리 등등을 공부했다.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영화, 애니메이션 제작기도 공부했다. 게임은 종합 매체라서 나중에 돌이켜 보니 이런 잡식성 공부가 나름 도움이 된 거 같다.

당시에는 워낙 볼만한 책이나 커리큘럼이 적었다. 앱이나 게임 모두 워낙 빠르게 발전하는 곳이라 최신 정보가 아니면 금방 뒤처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항상 최신 정보를 접해야 한다.

나는 RSS와 페이스북을 이용하여 정보를 긁어놓고 링크의 경우 포켓에, 게임은 스팀에, 책은 알라딘에 저장을 해둔다. 그러다가 보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공유를 한다든지, 번역해 블로그에 올린다든지로 소화하고 있다.

사실 RSS로 긁어 오는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제목만 훑는다 치면 할만하다. 제목을 읽고 나중에 읽을 만한 거리를 분류한다. 나는 앱뉴스, 건축/제품디자인, 게임개발, AAA게임 소식, 인터뷰, 외국언론 번역 큐레이션, 아이폰 게임 등으로 분류를 나눠 정보를 긁는다.

만약 링크를 읽게 된다면 그날 읽은 링크를 요점 정리해둔다. 포켓 같은 경우 나중에 키워드로 검색해 볼 수 있기에 편리하다.

▲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글만으로는 현장감이 부족했다. 그래서 세미나를 열심히 다녔다. 그러다 한 세미나에서 어떤 연사가 이런 말을 했다. "GDC를 사비로 다녀왔는데, 가끔 다녀올 만하다. 아깝다 생각 말고 그만큼 영감을 얻으면 된다."

생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세미나를 많이 다녔지만 GDC는 생각도 못 했다. 당시 나는 1년 6개월 정도 됐고 이제 슬슬 앱을 전문으로 할지 게임을 전문으로 할지 결정해야 할 시점이었다. 사실 게임에는 처음에 관심이 없다가, 사람들이 내가 만든 걸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보람을 느껴서 고민하게 됐다.

그 게임 업계의 '정상'들이 모여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배낭 하나 메고 혼자 갔다 왔다. 허락해준 아내에게 참 고마웠다. 5일 내내 회의장 안에서 많을 걸 접하고 왔다. GDC는 성장에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짧은 시간에 다른 사람의 성공, 실패담을 들으며 실무적으로도 배운 게 엄청나게 많았다. 무엇보다 열정적으로 공유하는 개발자들 속에서 개발 생각만 하다 오는 게 엄청나게 큰 자극이 됐다.

GDC를 다녀와서 결심했다. 언젠가는 저 사람들을 따라잡으리라. 그래서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GDC를 다녀와서 'GDC뽕'을 맞아 각종 세미나에 나가 발표를 했다. 당시에는 공개할 프로덕트가 없어서 트렌드와 이론을 공부해 발표했다.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 그땐 'GDC 뽕'이 유효할 때라 가능했다. 그러면서 블로그에 이런저런 연구 글을 올리다가 게임 디자이너를 찾는다는 소셜 게임 회사 대표의 연락에 게임 회사로 입사하게 된다. 2년 1개월째 되던 때였다.


내가 들어간 곳은 '로켓오즈'였다. 페이스북 소셜 게임에서 성과를 내던 몇 안 되는 우리나라 회사였다. MAU 300만을 기록하는 회사였다. 웹 개발 인력이 주축이 되어 각자 자유롭고 적극 게임 디자인하는 문화가 있었다. 장점도 단점도 있었지만, 일단은 내가 성장하기 좋은 환경으로 판단했다.

입사 몇 주 만에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난 새로운 프로젝트에 유일한 게임 디자이너로 참가했다. 게임의 장르는 시티빌더. 페이스북 올릭핌 오피셜 소셜 게임을 만들어야 했다. 올릭픽과 시티빌더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6개월 동안 완수해야 하는 과업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안 맡았겠지만, 그때는 아직 'GDC 뽕'이 남아있던 때라 '까짓 거 한번 해보죠'라며 덜컥 받아들였다.

시간이 6개월밖에 없었기에,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지만 고민했다. 일단 인원은 나를 비롯해 아트 2명, 프로그래밍 5명, 마케팅 2명이었다. 한 번도 호흡을 맞춰본 적 없는 작은 팀이었다. 까다로운 올림픽 가이드 라인을 준수해야만 했다. 즉 '일정 내에 관계 조직이 만족할 퀄리티로 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만 했다.

출시일을 고정하고 일정을 역산해 보니 정신이 멍해졌다. 그래서 디자인에 들일 시간을 과감히 쳐 버렸다. 완벽히 새로운 무엇인가는 사치였다. 익숙하고 안전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케이크 따라 만들기'였다.

이미 잘 만들어진 케이크의 기본 구조를 따르되, 재료를 조금 바꾸고, 크림을 좀 더 넣고, 토핑에 힘을 주는 방식으로 기존의 익숙함을 조금씩 바꾸는 것이 프로젝트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욕심은 버리지 못해서 매끈한 스토리텔링과 튜토리얼을 만들겠다고 퀘스트 시스템과 콘텐츠를 막 짰다. 그런 와중에 관계 조직을 안심시킬 수 있는 괜찮아 보이는 디자인 문서도 계속 만들어야 했다.

'최종' 디자인 문서를 보내고 요약판을 또 만들어 보내고 하는 문서 지옥에 빠져있었다. 페이스북 플랫폼의 특성을 연구해서 발표도 진행해야 했다. 이건 페이스북에서 끌고 가서 회사 이름을 걸고 발표해야 하는 거라 유독 힘들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핵심 차별 디자인 요소를 막판에서야 끼워 넣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심리적으로 붕괴했다. '난 오리지널리티엔 소질이 없나보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다행이 기일에 맞춰서 출시는 할 수 있었고 짧은 시간이지만, 유의미한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출시후 Funnel 분석해서 추가 개선도 하고 지표 분석 리포트도 쓰면서 성장했다는 느낌도 받았다.

이 프로젝트를 겪으며 팀워크와 팀원 간 신뢰, 아침 5분 회의의 미덕 등 많은 교훈을 얻었다. 또한, 혼자서 초반 컨셉부터 런칭 & 라이브까지 전체 파이프라인을 경험했다는 큰 자산도 얻었다. 강제로 레벨업 된 문서 작성력은 덤이었다.

'케이크 따라 만들기'에서도 교훈을 얻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막연히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케이크다운 케이크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재료를 바꾸고 새로운 토핑까지 얹으려면 더욱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교훈이었다.

한 사이클을 경험하고 나니 그동안 쌓아온 시티 빌더의 꿈을 이루고 싶었다. 만 3년 차 넘는 시점이니 개인적으로도 히트작을 내야 했다.

매끄러운 초반 도입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퀘스트 기반으로 스토리텔링하는 미니멀한 디자인을 가진 게임을 만들고 싶었다. 마침 카카오게임플랫폼이 런칭을 앞두고 있었다. 카카오톡 유저 눈높이에 맞는 시티빌더를 고민했고 '트레인시티'를 개발하게 된다.

4개월 남짓 정신없이 달렸다.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원래 세웠던 마일스톤을 거의 지켜가면서 정말 팀원 모두와 열심히 달렸다. 지스타 분위기도 좋았고 회사의 기대도 커졌다. 덕분에 회사의 거의 모든 인원이 '트레인시티' 프로젝트에 투입됐다.

하지만, 회사 내 유일한 디자이너로 불안감은 커졌다. 런칭을 앞두고는 특히 심했다. 체력이 떨어져 가니 더욱 불안했다. 그런 가운데 게임을 출시했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리뷰도 좋았다. 그런데 라이브 2~3주 만에 힘이 떨어졌다. 지표가 곤두박질쳤다.

▲ 그 당시 불안감이 담긴 메모

실패 이슈는 복합적이겠지만, 게임 디자인의 문제만 따지자면 콘텐츠 소모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 가장 컸다. 인간의 물리적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못할 것 같은 건 못한다고 이야기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개인역량과 노력 책임감으로만 커버하려고 했다.

전체 프로세스에서 치명적인 병목인 걸 알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뒤늦게 개선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카카오톡 게임 특성상 모멘텀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후 번아웃이 찾아왔다. 자신감이 하락하니 결정을 회피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엣지 없는 디자인이 나오게 됐다. 당연하게도 구현결과는 좋지 않다. 동료의 신뢰도 떨어졌다. 자신감은 점점 하락했다.

번아웃을 이겨내는 방법으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작은 성취로 자신감,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이 있다. 조직 차원에서는 회복하는 동안 엣지가 덜 필요한 디자인을 맡기거나, 아니면 개발 파트너를 바꿔주는 등 시간을 주어 회복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번아웃에 빠지지 않는 거다. 번아웃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수렁이다.

▲ 디자이너의 번아웃

내 상태가 이랬는데 나는 이게 번아웃인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의견을 내기가 두려웠다. 뭔가 근거를 제시하며 설득할 에너지가 없었다. 신작 개발에도 시큰둥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니어가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옆에서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너무 미안하게도...

회사는 매우 고맙게도 새 업무를 할 수 있게 배려해줬다. 그래서 디자인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의 반년 넘게 기능 디자인을 하지 않았다. 지표 분석, 개선점 논의 , 통계, 라이브 콘텐츠 업데이트만 담당했다. 나중에는 운영, 페이스북 광고 마케팅 영역까지도 업무를 확장했다. 새 업무도 나름 재미있었다. 퍼포먼스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큰 것을 잃어버린 거 같았다. 어떻게든 다시 행복해지고 싶어 노력했지만, 상황은 나빠지지 않았다. 2년 2개월의 로켓오즈 생활을 내려놓았다.

이 후 약간의 휴식 후 기나긴 구직의 시간이 찾아왔다. 솔직히 구직에는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4년 3개월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풀 사이클 경력도 있었다. 통계와 시각화에 강점도 있었고 대외 발표도 많이 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적어도 모셔가지는 않아도 구직에는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처음에는 디자인 일이 두려워서 사업 쪽으로 구직했는데 서류통과도 힘들었다. 간혹 면접이라도 보면 "스펙이 너무 높아서 안 되겠는데요"라는 이상한 대답을 들었다. 재충전은커녕 실시간으로 에너지가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냉정하게 나를 돌아보니 히트작이 없는 아동용 타블렛 게임, 페이스북 캐주얼 게임, 모바일 캐주얼 게임 디자이너였을 뿐이었다. 당시에는 하드코어 RPG들이 시장에 강점을 보이고 있었다. 사업 쪽으로도 변변한 사업 경력이 없었다. 그나마도 성과가 있는 건 아니라 잠재력을 봐야 하는데 나이가 너무 많았다.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 한 스페셜리스트가 되어버렸다. 내가 스페셜리스트인 스킬은 이미 수요가 없었고 다른 스킬은 제너럴리스트 수준이었다. 대나무가 사라진 판다가 되어버렸다.

원인을 찾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래서 기분 전환 겸해서 게임잼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디자인 오리지널리티와 프로듀싱 자신감을 회복했다. 시간이 많아져 예전엔 바빠서 못했던 공부도 하고 UX 글도 번역해서 올리기도 했다. 뉴욕타임즈의 혁신 보고서를 번역해서 게임 쪽에서 적용할 게 무엇이 있는지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내 마음에 불을 붙이는 소리를 듣게 됐다.

콘텐츠 비즈니스 쪽으로 기웃거리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뉴스 서비스 연구 모임에서 고민하던 내게 포털 직원이 툭 던지듯 한마디 했다. "에이, 그래도 전 남의 콘텐츠 파는 것보다 내 것 만드는 게 더 재미있더라고요."

생각해보니 게임 만들 때가 정말 재미있었다. 그리고 돌이켜보니 구직활동을 한다고만 했지 면접에서 혼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탈락이 당연한 결과였다. 사업을 시켜주면 사업을 하고 게임을 시켜주면 게임을 하겠다. 뭐 이런 마인드였으니까.

게임 디자인을 다시 하겠다고 마음먹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왓스튜디오 면접장에서 무슨 게임을 만들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난 대답했다. "사람들이 오래 기억할 게임을 만들고 싶어요." 운이 좋았는지 어쨌는지 합격했고 지금은 함께 성장 중이다.


왓스튜디오에 들어와 보니 스튜디오 하나의 규모가 내가 일하던 회사의 규모보다 더 컸다. 혼자 엉성하게 하던 일을 n명이 하나하나 나눠서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게다가 마비노기의 OOO과 마비노기 영웅전의 OOO를 만든 사람들이 내 옆을 걸어 다닌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그 외 여러 가지 환경이 생경하고 어려웠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니 나아졌다.

하지만 디자인 환경도 역사도 다르다 보니 이점은 걱정됐다. 그동안 했던 프로젝트들에 비해 MMORPG의 복잡도는 굉장히 높았다. 어지간한 게임 너덧 개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커리어 대부분을 혼자 컨셉 잡는 것부터 시작해왔다가 끼어들려니 뭐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그렇다. 나는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멍해졌던 거다.

다행히 왓스튜디오는 신입 팀원 교육 시에 그간의 슬라이드와 동영상을 보여주어 게임의 현주소와 지향점을 제대로 주입한다.

그러나 비전과 히스토리를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해도 여러 명의 디자이너 사이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처음에는 잘 몰랐다. 비전을 수행할 디자이너가 여러 명이기에 서로 의식할 수밖에 없다. 내게 없는 강점을 가진 뛰어난 디자이너들을 보면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 강점을 부러워하거나 내 약점을 두려워해 봐야 소용없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제일 중요하다.

난 내가 매몰비용이라고 생각했던 전공지식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본능을 펼치기 시작했다. 캐주얼 사용자들에게 단련된 부분도 도움이 됐다. 덕분에 나만의 엣지를 세울 수 있었다. 다른 디자이너와 경쟁하기보다는 서로 강점을 살리는 편이 게임에 훨씬 좋다. 게임 곳곳에 엣지가 살아있어야 유저에게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디자이너는 '의도'를 동기화하는 피드백으로 성장한다. 디테일이 아니라 '의도'에 집중해서 피드백을 주고받으면 더 좋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요즘 '평생직장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어차피 평생 직업이 없는 시대라면, 어차피 커리어는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이라고.

'끝'에 절망하지 말고 언제 커리어가 끝날 것인지, 좀 더 오래 디자인을 하고 싶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다음 직업에서 게임 디자인을 했던 경험은 어떻게 쓰이게 될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You're only as good as your last game.(가장 최근 만든 게임이 네 실력이야.)"
- 오버워치 제프 카플란 디렉터-

이 말은 게임 디자이너에게 특히 와 닿는 말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일단 건강을 챙기라고. 그리고 완벽함도 좋지만 일을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부족하더라도 빨리 공유하고 피드백으로 성장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또한 번아웃은 절대 경험하면 안 된다. 위험은 빨리 알려 벗어나도록 하며 약점 보완보다는 강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다. 변화하는 환경을 늘 인지하고 그 강점을 점검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인생에 매몰 비용 같은 건 없다. 결국, 나도 박사 과정의 지식을 사용하게 되지 않았나. 결국, 모두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공부와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다. 타고난 재능과 센스? 타고나는 거나 본능적인 게 아니다. 공부와 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