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지스타에서, 아주 독특한 게임 하나를 발견했었습니다. 이거 뭐 보스하고만 싸우는데 난이도는 굉장히 어려워서 시작부터 죽어나가고 또 이어하고 또 하고 또 하고…말 그대로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게임이었죠. 그게 기자와 이블팩토리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것도 넥슨 부스에서요. 아니, 넥슨이 이런 돌연변이 같은...인디 느낌이 짙은 게임을 내는 건가? 하고 놀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NDC의 마지막 날인 27일, 바로 이 '이블팩토리'의 PD가 직접 강단에 섰습니다. 네오플의 황재호 PD는 NDC의 세션을 통해서 이블팩토리가 어떤 전략을 가지고 기획되었는지를 설명했죠. 강연하는 내내 뭔가 느낌이 왔어요.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하죠? 넥슨이라는 금수저 집안에서 나온 '괴작'의 아버지답게, 그는 아주 과감하게 선택하고 이를 집중해서 차별화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강연의 서두에서 짧게 자신과 이블팩토리를 소개하고 난 후, 그는 어째서 이블팩토리가 이런 게임이 되었는지를 차근차근히 설명해나갔습니다.

네오플의 황재호 PD

"이블팩토리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테니 간략히 설명하죠. 이블팩토리는 세로뷰 형식의 픽셀 그래픽을 채택한 게임으로, 보스전만 진행하는 것과 탈 모바일급 컨트롤이 필요한 게임입니다. 매 스테이지에서 기본으로 20번은 사망하는 난이도가 매우 높은 게임이에요. 일단 영상으로 한 번 보시죠.


'이블팩토리'는 19개월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지난 2월 2일이 출시됐습니다. 개발 인력은 다섯 명인데 이것도 처음에는 세 명이었고, 지스타에서 최초로 공개됐을 때는 "넥슨이 이걸?"이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블팩토리는 155개국 애플스토어 글로벌 피쳐드를 받았고, 구글 플레이는 126개국의 글로벌 피처드를 받았습니다. 출시 35일경에는 약 150만 다운로드를 달성했죠.

냉정히 보면 이블팩토리는 치명적인 단점과 부족한 콘텐츠를 가진 게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고요? 게임에 엔딩이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셀링 포인트를 가지고 있던 게임이고, 황재호 PD는 이를 '엣지'라고 불렀습니다. 이블팩토리의 엣지 포인트는 차별화와 간지. 차별화는 게임 내부 요소이며 '간지'는 안 촌스러운 외관입니다.

안 촌스러운 외관을 위해서 굳이 세련되거나 고퀄리티 그래픽을 추구하지는 않고, 레트로를 선택한 이블팩토리. 차별화 역시 흔히 말하는 황금비율인 8:2, 20%의 독특함보다 훨씬 더 차별화를 하려고 했습니다. 북미에서 "이거 그냥 아시안 게임인 것 같다"라고 듣지 않도록요."




■ 이블팩토리, "금수저 아빠에게서 나온 괴작"

정말 무시무시한 방법.

회사를 퇴사하고 SNS를 개발하다가, 황재호 PD는 부름을 받게 됩니다. 게임 제작을 권유받았는데 "그냥 너 좋아하는 이상한 컨셉에 게임만 재밌으면 돼."라는 제안. 당연히 "그럼 돈 안될텐데요"라는 답변을 했지만 그는 '방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우 당황스러운 제안이었지만, 그래도 매우 재미있을 것 같아 일단 하기로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던 '괴수물'을 만들려고 했죠. 프로젝트에 돌입하고 첫 번째 게임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봤지만 지나치게 강한 주인공, 그리고 단조로운 공격 방식이 너무나 재미가 없어서 셀프드랍을 하게 됩니다.

단조로운 공격과 너무 강한 주인공이 재미없었으면 반대로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황 PD는 프로젝트의 방향을 확 뒤집어봅니다. 다양한 공격 옵션이 있지만 주인공은 놀랍도록 약한 게임. 그래서 '초약체의 주인공'이 탄막을 뿌려대는 보스와 근접전을 펼치는 게임이 바로 이블팩토리의 초안이었죠. 말 그대로 주인공이 약할 수 있는 요소는 다 넣었습니다.


게임을 제작하고 그는 자발적으로 사내 테스트를 여러 차례 진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내 테스트 결과 총점 70점의 얼마 안 되는 점수로 시작했다가, 최종적으로는 스스로 목표한 80점대까지 게임을 개선하는데 성공합니다. 처음부터 게임의 긴장감과 도전 욕구는 높은 평가를 받았기에 나머지 부분을 개선하고 리소스를 집중하는 방식으로요. 네 차례에 걸친 사내 테스트에서, 다양한 불안요소들이 발견됩니다.

다양한 불안요소...정말 솔직한 피드백

"저주에 가까운 말도 있었고...완전 폭언도 있죠(웃음)? 농담이고요,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다 수용하면 양산형이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흰 '엣지'에 올인하기로 했습니다. 매출이 얼마 안 나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두루두루 80점을 받기보다는 어디서는 100점, 어디서는 60점 받아서 평균 80점을 받는게 나아 보였어요."


■ '이블 팩토리'의 게임적 차별화


황재호 PD는 기획자라면, 아니 굳이 기획자가 아니더라도 "왜 다른 게임 말고 이 게임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고민해봐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이블팩토리 역시 이런 고민이 이어졌고, 다른 게임과는 정말 다른 이블팩토리만의 차별화 목표를 크게 세 가지로 선택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고퀄리티의 정통 아케이드 게임'. 아케이드 게임은 수익이 매우 낮습니다. RPG는 수치 기반의 시스템이라서 수익을 내기가 비교적 용이하지만, 매판 코인을 사용하면서 플레이하는 아케이드 게임들의 수익률은 현저히 낮습니다. 그럼에도 해외에는 수요가 분명히 존재했고, 철저한 아케이드의 감성을 추구하기로 합니다. 결과는 다행히도, 레트로 아케이드 게임으로 인정받고 성공적인 포지셔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목표는 '타겟층에게 먹히는 감성코드'였습니다. 아케이드 게임을 목표로 한 만큼, 8~90년대 일본 게임 경험이 있는 서구권의 유저들을 타겟층으로 잡았습니다. 이들은 도전 욕구가 매우 강한 게이머층이기도 하죠.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매우 좋아하며 주로 남성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블팩토리 게임 속 곳곳에 '오마주'를 설치하기로 합니다. 물론 과해져서 저작권이나 도용이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선을 잘 조절해서 말이죠. 게임 속에 오타쿠적인 코드도 숨겨놓았는데, 이게 의외로 유저들에게 잘 캐치가 돼서인지 유저들의 '공감대'가 형성이 됐습니다. 공감대가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바이럴이 발생하고, 타겟 유저들에게 퍼질 가능성이 높을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알맞게 기대한 바이럴도 발생했습니다. 벌써 두 개의 목표가 제대로 잘 들어갔네요.


마지막 목표는 '기존에 없던 플레이 방식'입니다. 황 PD는 처음부터 '플레이 방식' 자체는 정말 색다르게 해보자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게임이 어찌 됐든 간에, 플레이 방식 자체는 달라야 제대로 튄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흔히 있는 정석 공방이 아닌 '시간차'를 이용한 전투를 해보자고 정하고 탄막 속에서 피하다가 폭탄을 설치하고 도주하는 형태로 잡게 됩니다.

무기는 오로지 폭탄만 사용하고, 보스의 경우는 이동 방향과 패턴을 생각하게 하는 전투를 만들게 되죠. 앞서 말한 아케이드 게임의 특징처럼 '반드시' 틈이 생기도록 하고요. 근데 막상 이렇게 하고 보니까 조작감과 피로도의 이슈가 생겨 시간 조작의 요소를 도입해서 조금이나마 이동+공격의 스트레스를 완화했습니다. 이렇게 한방에 죽는 주인공과 타이밍 공격, 그리고 슬로우 모션의 차별화된 게임 메카닉스를 구축할 수 있었죠.

아주 독특한, 하드코어한 전투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 '간지'라고 한 외관에 관련된 이야기, '이블팩토리'의 간지

"많은 한국 게임들이 차별화보다는 '간지'에서 실패한다고 생각해요. 넥슨 아메리카에서 근무할 때, 베타 테스팅을 하러 가져간 경우가 많았는데 괜찮은 게임이네 해도 아트풍이 마음에 안 든다, 보기 구리다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사실 그게 제일 큰 허들이었고요.

'간지'라는 게, 문화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굉장히 난감합니다. 미국 친구에게 '너네는 어떤 스타일이 멋진 거냐?'하고 물어봤는데 제이슨 스타뎀이 정말 멋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건 사실 시대상도 있고 문화요소가 많이 들어간 거라 잡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블팩토리의 간지 포인트를 잡았어요. 레트로풍의 픽셀아트, 레트로하지 않은 사운드. 그리고 서구권에 먹히는 로고.

...정말 아트 취향이 다른 동양과 서양.

서구권은 정말 아트 취향이 동양과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마영전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리시타의 경우 한국에서는 프리티 보이 같은 느낌으로 나갔거든요. 근데 현지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수염도 붙이고 해봤는데 결국 그냥 갑옷을 씌워버렸어요.

이게 차라리, 퀄리티 이슈면 편한데 그게 아니라서 더 어렵죠. 하지만 서구권 게임이 아시안 스타일을 표방하는 거의 유일한 컨셉이 있습니다. 바로 레트로 그래픽이죠. 8bit, 16bit 시절의 감성은 만국 공통이라고 생각해요. 문화적으로 우리가 유리한 영역이 있다면,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픽셀 아트를 선택했어요.

레트로 그래픽은 MIDI 조합이 일반적입니다. 대부분 게임도 그랬고요. 그런데...굳이 미디를 안 쓰고 세련된 사운드도 괜찮더라고요? 실제로 그런 게임들도 좋은 평가를 받았었고요. 그래서 우리도 해보자고 하고 수소문을 했는데...국내에서 작곡가를 찾기 힘들어서 결국 뉴클리어스론의 사운드를 만든 분께 연락해서 작업을 했어요.

사운드는 외국의 작곡가와 함께, 세련된 사운드로!

마지막은 서구권에서 먹히는 로고....우리와 서구권의 생각 차이를 새로 깨달은 부분이 있어요. 저희는 다크소울처럼 무거운 느낌의 하드코어 액션이라는 느낌을 로고에 담으려고 했어요. 깨진 글자라던가, 독수리 군번표 같은 걸 로고로 잡아서 퍼블리셔에게 보냈더니 생각이 다르더라고요.

그쪽은 '가볍고 캐주얼한 아케이드 게임'의 느낌이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전혀 다른 로고를 보내주시더라고요. 저흰 처음에 장난친 줄 알았어요.



사실 좀 험악한 말이 오고 갔는데 결국, 현지 의견의 8~90% 정도를 수렴하고 테마만 바꾼 정도의 느낌으로 로고가 만들어졌죠. 저흰 출시할 때까지도 해골 병사가 나오는 게임의 인상을 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오히려 호평이더라고요(웃음). 눈에 잘 띄고 어울린다...등등.

좀 겸연쩍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거였어요. 게임과 관련이 있고 말고는 아무도 관심이 없던 거죠. 기획적 논리보다는 현지 피드백이 절대적인 느낌? 사실 좀 울며 겨자 먹기로 피드백을 수용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좋은 반응을 얻었죠."


그래서 로고는 이렇게.


■ 선택과 집중, "목표를 위해 많은 걸 희생한 프로젝트"


"저희가 소위 말하는 금수저이긴 합니다. 어쨌거나 월급이 나오고 과감히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사실 고퀄리티의 아케이드 게임도 약간의 사치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저희가 잘해서라기보다는 환경에서 할 수 있던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앞서 설명해드린 것 처럼 마케팅 예산도 없고 소규모에요.

이블팩토리는 목표로 한 '엣지'를 위해서 많은 걸 포기한 프로젝트입니다. 아케이드 액션을 위해서 조작감을 과감히 포기했고, 하드코어한 컨셉을 위해서 매끄러운 초반 플로우를 포기했어요. 그래서 1챕터 이후 이탈률이 75%에요.

이거 고치라고 엄청 지적받았는데 끝까지 안 고쳤어요. 이걸 고치면 뒤에 남은 25%의 유저들이 재미없을 거라고 판단했고, 처음부터 그냥 빡세게 나가기로 했어요. 그리고 사운드 퀄리티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영상 예산을 그쪽에 좀 올인했고, 아케이드 감성을 위해서 매출 요소를...과감히 축소했습니다.

소규모 팀은 선택과 집중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게임의 핵심 차별 요소를 정하시고요, 나머지는 다 덜어내세요. 이블팩토리는 로그인도 없어요. 넥슨 게임에서 유일하게 저희랑 애프터 디 엔드는 로그인이 없죠. 그리고 이블팩토리는 서버도 없어서 그냥 비행기에서 해도 됩니다. 덜 수 있는 건 다 덜었어요. 그게 제일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안 촌스럽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