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노리'가 돌아왔다. '소프트맥스'와 더불어 양대 국산 패키지게임 개발사로 군림했던 그 '손노리'. 한 손에는 '화이트데이'의 PC/콘솔 리메이크 버전이 들려 있었다.

명가의 귀환이었지만, 환영식은 없었다. 컴백 무대도 조촐했다. '손노리'는 올드 게이머들만 기억하는 이름이었으니까. 모바일로 먼저 출시되긴 했지만, '화이트데이' 역시 올드 게이머들에게 더 친숙한 게임었으니까.

이원술 대표를 만났다. 로이게임즈에서 '손노리'로 다시 돌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다시 태어난 '손노리'의 시작을 '화이트데이'와 함께 하는 이유도 물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라 그런 걸까. 포장지만 가득한, 그런 인터뷰는 아니었다.



▲ 손노리 이원술 대표





박태학 기자(이하 박태학) - '손노리'라는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원술 대표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이원술 대표(이하 이원술) - 한때 '손노리'는 패키지 게임 명가 이미지가 있었다. PC 시장이 저물어갈 때 우리도 발빠르게 대처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덕분에 '손노리'라는 이름의 가치도 많이 내려갔다. 사실, 이 이름을 다시 쓸 생각은 없었다. 그냥 '언젠가 다시 쓸 날이 왔으면 좋겠다' 정도였지.

박태학 - 그렇다면 계기가 뭔가.

이원술 - 로이 게임즈 시절, 모바일로 '화이트데이' 풀버전을 출시했는데, 사실 회사 입장에서도 이게 성공할 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예전 팬들의 성원 덕분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팬들에게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이건 모바일이 아니라 PC/콘솔로 나와야 할 게임인데...'라는 생각이 들더라.

프랜차이즈를 계속 유지시키려면 내부적으로도 변화가 필요했다. '화이트데이' 리메이크 버전부터 제대로 내보자고 마음 먹었고... 또, '화이트데이 하면 역시 손노리'라는 생각에 출시 시점에 맞춰 회사명도바꿨다. 화이트데이 팬들에게 로이 게임즈는 여전히 생소한 이름이었으니까. 어쨌든, 이번에 결과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 '손노리'의 부활이 패키지 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면 더 좋은 거고.


박태학 - 그런데 요즘 게이머들은 '손노리'라는 이름을 잘 모르지 않을까.

이원술 - 하하, 어차피 로이 게임즈도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라서 괜찮다. '손노리'는 올드 게이머들에게라도 알려져 있으니 차라리 그게 낫지.

▲ "그래도 '손노리'는 올드 팬이라도 있잖아요"


박태학 - 손노리는 '화이트데이' 외에도 대표작이 많았다. '악튜러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포가튼 사가' 등 팬층을 보유한 IP가 많은데, 손노리의 부활이 이들 IP의 부활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원술 - 나 역시 해보고 싶기는 하나, 현실적으론 좀 어려울 것 같다. 일단, 기존 팬들은 우리 게임들이 요즘 스타일의 모바일 게임, 그러니까 뽑기형 RPG로 나오는 걸 바라지 않을 거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는 게 낫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화이트데이'는 공포 장르이기에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지만, RPG는 그게 잘 안 된다. RPG는 국가별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데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포가튼 사가' 등은 외국에서 인지도가 아예 없는 게임이다. 결국, 국내 올드 게이머들이 고객이라는 건데, 우리가 큰 회사도 아니고... 무엇보다 시장이 너무 작다. 또, 어렵게 돌아온 손노리가 과거의 추억에 매몰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박태학 -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으로, 최근 PC/콘솔 시장을 바라보는 국내 게임 개발사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이원술 - 국내 게임업계 종사자로서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을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국내 대형 게임사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갔고, 매우 좋은 스타트를 끊었다. 국산 게임도 외국에서 잘 될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것 아닌가. 결국은 지금까지 이런 시도를 안 해왔던 게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모바일 게임 시장이 커지기는 했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아직 콘솔 게임 시장 정도는 아니다. 세계 시장을 노리는 게임들에게 더 많은 투자가 들어갔어야 했다.

박태학 - 욕심이 나지는 않나. '손노리'는 특히 패키지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회사였다. 아예 '패키지의 로망'이라는 합본을 출시했던 적도 있었고.

이원술 - '화이트데이'는 후속작도 같이 개발 중이다. 이 시리즈는 계속 PC/콘솔로 낼 생각이지만, 그외 다른 IP의 패키지화는 아까도 말했듯 고민이 필요하다. 일단, '화이트데이'가 잘 돼야 뭐라도 해볼텐데(웃음).

아, '화이트데이2'는 예전에 공개했던 '화이트데이: 스완 송'의 새로운 이름이다. 풀 네임은 '화이트데이2: 스완 송'으로, 올해 초에 기존에 만들던 걸 완전히 갈아 엎고 아예 새롭게 만들고 있다. 이전에 만들던 버전은 외전이란 느낌이 강했는데, 좀 더 볼륨을 강화한... 제대로 된 후속작으로 준비하고 있다.


박태학 - '스완송'은 VR 버전으로도 출시된다. 공포가 VR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리는 장르인 만큼, '손노리' 측의 기대도 클 것 같은데.

이원술 - 갈아엎기 전 버전은 짧막한 스테이지 여러 개로 구성된 캐주얼한 게임이었다. VR로 이미 게임을 만들어본 개발자들이 'VR 게임은 오래 하면 멀미가 나니, 각 스테이지의 호흡이 짧아야 한다'고 말했고, 이걸 수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출시된 외국의 한 공포 게임을 VR 버전으로 해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기존 VR 게임의 템포와는 완전히 다르게... 그냥 일반 패키지 게임처럼 갔는데도 몰입이 잘 되더라. 결국, 우리도 스테이지 단위로 끊지 말고 그냥 풀 스테이지로 쭉 가는 방식을 택했다. 기존에 있던 스토리도 VR이라는 플랫폼 특성에 맞춰서 바꿨다.

▲ '스완송'은 '화이트데이2: 스완송'으로 바뀌었다. 정식 후속작으로.


박태학 - 이제 '화이트데이' 리메이크 버전에 대한 질문을 해보겠다. 최근에 PS4 한정판 패키지를 공개했는데, 이걸 보자마자 딱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손노리가 패키지에 대한 로망은 여전하구나.'

이원술 - 내가 패키지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그냥 밀어붙였다(웃음). 사실, 국내 시장만 보고 한정판 팔아서는 남는 게 별로 없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잘 안 팔리면 어쩌지'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의외로 많은 분들이 구매해주시더라. 우리도 많이 놀랐다.

그리고 한정판에는 피규어가 포함됐는데, 피규어라는 거 자체가 대량생산을 해야 마진이 남는다. 외국 게임의 한정판은 애초에 피규어를 대량으로 만들고 각 나라에 뿌리니 숫자도 맞고 그러는데, 우리는 애초에 물량을 적게 만들었다. 잘 안 팔리면 그대로 회사가 손해를 안고 갈 수 밖에 없었고. 다행히 피규어 원형을 제작한 '켈베로스 프로젝트'가 손노리의 팬이기도 해서 도움을 많이 주셨다.


박태학 - 네번째 여학생 '유지민'이 추가됐다. 게임 내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이원술 - 4분의 1... 혹은 그 이상이다. 유지민을 위한 새로운 스토리 루트가 하나 더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기존의 루트에서 파생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루트로 설계했다. 이 때문에 기존 캐릭터들과 1:1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유지민을 위한 새로운 스테이지가 있고, 기존의 '화이트데이'에서 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다뤘다.

▲ '화이트데이' 리메이크 버전 한정판에 포함된 신규 캐릭터 '유지민' 피규어


박태학 - 사실, 나는 '화이트데이'의 상징은 귀신이 아니라 수위라고 생각한다.

이원술 - 동의한다.

박태학 - 그래서 이번 리메이크 버전의 수위 아저씨가 어느 때보다도 막중한 임무를 짊어졌다고 본다. 원작에서 큰 변화가 없다면, 이건 손노리 입장에서 비난을 받아도 뭐라 할 말이 없는 거다. 개발진도 이를 잘 알고 있을텐데,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들어보고 싶다.

이원술 - '화이트데이' 모바일 버전의 수위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PC 버전과 비교해봐도 그랬다.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곧 출시되는 '화이트데이' 리메이크 버전의 수위는 이전보다 훨씬 무섭다는 사실이다. 더 똑똑하고, 더 섬뜩하다. 그리고 유저 입장에서 실소가 나오는 어이없는 버그도 이젠 없다. 왜, 예전에 수위를 문에 끼워두고 학교 맘대로 돌아다니는 버그가 유명하지 않았나. 그런 건 다 고쳤다.

PS4로 나오는 모든 게임들은 소니의 철저한 검수를 받는다. 소니가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다 체크하는데, 눈에 띄는 버그라도 나오면 바로 출시를 미뤄버린다. 이걸 통과하는 작업만 몇 달이 걸린다. 우리가 체크하지 못한 버그가 있을 순 있지만, 그게 게임 플레이에 조금이나마 지장을 주는 버그는 아니리라 자신한다.


▲ 수위 아저씨. 화이트데이의 진정한 주인공


박태학 - 그러고보니 '손노리'의 게임들은 버그가 유독 많았던 것 같다(웃음).

이원술 - 오해다(웃음). 그 당시 국산 게임들은 다 버그가 많았다. 단지, 우리 게임들이 좀 더 알려진 편이라 버그도 유명한 거였고. 당시에는 유통사 파워가 굉장히 강했다. '일단 출시하고 난 후에 패치하자'는 요청도 많았다. 그런 상황이다보니 버그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박태학 - 원작 '화이트데이'를 해본 유저들은 귀신이 나올 타이밍을 기억하고 있을텐데... 그렇다면 기존 팬들은 좀 덜 무섭지 않을까.

이원술 -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화이트데이' 리메이크 버전은 외국 유저들에게 '화이트데이' 프랜차이즈를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크다. 이게 잘 돼야 시리즈를 이어나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훨씬 무서워진 수위, 신규 캐릭터 유지민과 새로운 스토리... 무엇보다 패드로 즐길 때의 감각 등, 기존 팬들도 관심있어할 요소도 많다고 본다. 실제로 해보면 확실히 다를 거다.

▲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 PC/PS4 트레일러


박태학 - 이번 '화이트데이'는 시리즈 최초로 글로벌 출시된다. 한국적인 색이 강한 작품이다보니, 시장 공략에도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은데. 콘텐츠까지 철저한 현지화를 거쳐 갈 건지, 아니면 동양적인 공포 그 자체로 승부수를 띄울건지 궁금하다.

이원술 - '화이트데이' 리메이크 버전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까지 총 4개 국어로 더빙되어 출시된다. 그리고 일본 출시 버전은 학교 디자인, 교복 스타일, 이름 등이 현지화됐다. 일본이나 대만, 인도네시아 등은 학교에서 우러나는 공포 분위기를 공유하고 있기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미국 출시 버전은 언어 로컬라이징 외에는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그루지나 컨저링 등 동양 특유의 심리적인 공포를 소재로 하는 영화가 많이 나온 상황이고, 또, 원래 공포 중에서도 '미지에 대한 공포'가 가장 크지 않나. 서구권에서는 '화이트데이'를 구성하는 모든 게 미지의 세상이다. 몰입도를 높이는 요소가 될 거라고 봤다.


박태학 - 워낙 유명한 게임사이기는 하나, 옛 명성에만 기대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장이 됐다. 원작의 팬들은 물론 현세대 게이머들까지도 포섭할 수 있어야 할텐데.

이원술 - 두번 다시 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다. '화이트데이'나 '손노리' 하면 뭔가 비운의 게임, 비운의 회사 이미지가 강한데, 이번 작품을 계기로 행운의 게임, 행운이 가득한 회사로 이미지를 바꾸고 싶다.

최근 국내 PC/콘솔 게이머들도 '우리나라 게임이 메타크리틱에 등재됐네?' 라면서 신기해하고 있다. 외국에서 평가를 좋게 받았다 이런 게 아니라, 외국 게임들과 나란히 비교되는 것 자체가 신기한 거다. 이런 분위기가 우리에게 기분 좋은 자극을 준다. 많은 유저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회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지켜봐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