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가 되면, 약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독일 서쪽의 작은 도시, 쾰른으로 발걸음을 향합니다. 이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 바로 일반인들에게 활짝 열려있는 유럽 최대의 게임 축제, '게임스컴'을 방문하기 위해서죠.

숫자만으로는 정확한 체감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일반인 입장이 시작된 게임스컴 현장에서는 말 그대로 바닥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파와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전시관을 들어가는 복도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전시장으로 떠밀려가기 일쑤고, 인기 있는 게임을 시연하기 위해서는 4시간 이상 대기를 해야 하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게 되면,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더라도 스트레스는 자연히 쌓이게 마련입니다. 거대한 전시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땀 흘리는 관람객들이 서로 어깨를 스칠 수밖에 없는 공간, 작은 마찰로도 큰 갈등을 빚을 수 있기 딱 좋은 환경이죠. 적어도, 제가 출근길에 매일같이 이용하는 신도림역은 딱 그랬습니다.

▲ 밀려오는 요청에 같은 자리에서 10분 동안 사진을 찍어준 트레이서

물론 출근길 풍경과 게임인의 축제에 모여든 인파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게임스컴 현장에서는 신도림역의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 같은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땅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복도를 오가면서 '어깨라도 부딪히면 어떡하지'하던 생각도 모두 쓸데 없는 걱정이었죠.

그렇게 처음 이곳 게임스컴에서 느꼈던 이들의 친절함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수로 상대방을 밀친 사람보다 밀쳐진 사람이 먼저 "쏘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흔한 광경이었고, 이렇게 실수로라도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각자가 조심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죠. 또, 지나가던 코스튬 플레이어들에게 인사를 건네면 흔쾌히 사진을 함께 찍어주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게임스컴 현장에서는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일 년에 한 번 찾아온 게임 축제를 즐기기 위해 참관한 장애인 게이머들을 정말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점은 이러한 장애인 게이머들에 대한 배려가 이곳에서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면, 바닥도 보이지 않는 인파들을 자랑하는 곳에서 딱 한 부분, 장애인 게이머들의 주변만 사람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안 요원들의 통제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관람객 모두가 장애인 게이머들의 편의를 신경 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죠.

특히, 이를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현지시각으로 23일 저녁, 블리자드가 자사의 부스에서 오버워치의 신규 애니메이션을 공개하는 '블리자드 공개 행사'를 진행했을 때였습니다.


블리자드 정도의 대형 게임사가 신규 정보를 공개하는 행사를 가지면, 기본적으로 게이머들은 행사가 시작하기 두세 시간 전부터 미리 대기를 하게 됩니다. 더 가까이, 더 좋은 자리에서 행사를 보기 위해 다른 게임을 시연할 수 있는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는 것이죠.

그렇게 행사가 시작되기 5분도 채 남지 않았을 무렵, 한 보안요원이 이미 사람으로 가득한 무대 앞쪽을 향해 그야말로 '모세의 기적'을 행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블리자드 행사를 관람하고 싶은 장애인 게이머가 보다 앞쪽 자리에서 무대를 잘 볼 수 있게 배려하기 위함이었죠. 이 때,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기분 나쁜 표정을 짓거나 불만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밖에도 장애인 게이머에 대한 배려는 쾰른 시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쾰른 대성당 근처에 위치한 한 상점이 가장 인상 깊었죠.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마블 등 프랜차이즈의 상품을 판매하는 굿즈샵이었는데, 지하 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존재하는 10 칸이 채 안 되는 계단에도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승강기를 설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개인적으로 게임스컴 현장에서 겪은 일을 소개하며 이곳 게이머들의 친절함을 설명해드릴까 합니다.

사건은 8전시장 안에 위치했던 마이크로소프트 XBOX 부스에서 발생했습니다. 콘솔 버전이 공개된 '배틀그라운드'와 '검은사막'을 시연해 보기 위해 부스를 찾았다가 그만 그곳에 지갑을 놔두고 다른 부스로 향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전시장을 돌아보며 약 40분이 흘렀을 즈음, 우연히 주머니를 뒤져보다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알아챘습니다. 이곳에 와서 교환했던 명함과 신용카드, 그리고 무엇보다 당장 사용할 유로가 모두 사라졌다는 생각에서 눈앞이 깜깜했죠. 돈만 없었으면 ATM에서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카드까지 없어지다니, 앞으로 이곳 쾰른을 생각만 해도 이날의 악몽부터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있을수는 없었기에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역추적하며 지갑을 찾아보기로 했죠. 하지만 쾰른메쎄의 전시장 수는 11개, 한 전시장이 부산 지스타 전시공간에 버금간다고 생각하면 그 규모가 조금은 이해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전시장을 하나하나 돌아다닐수록 지갑을 되찾을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져 갔고, '이제 어떻게 하지'하는 고민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 절대 잊지 못할 그 단어 '메쎄바허'

그렇게 동선을 역추적하며 결국에는 XBOX부스로 되돌아왔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배틀그라운드 부스를 지키고 있던 스태프에게 지갑을 본 적이 없느냐고 물어봤죠. 그러자 스태프가 지갑이라는 단어만 듣고 눈이 커지더라고요. "여기서 찾았는데, 상사한테 건네줬으니 메쎄바허에 가면 찾을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는 스태프를 보고 그만 눈물이 핑 돌 뻔 했습니다.

그렇게 이번에는 '메쎄바허'를 찾는 여정을 계속했습니다. 알고 보니 경비실(Security Office)를 뜻하는 독일어였어요. 그렇게 경비실에 찾아가 제 지갑을 되찾고, 아름다운 결말을 맞이하면 되는 줄 알았던 찰나, 경비실 직원에게서 "오늘은 신고된 것이 없으니, 내일 다시 찾아와 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전시장도 문을 닫을 시간. 다시 부스로 돌아가 스태프에게 물어볼지, 아니면 잠자코 내일 다시 경비실을 찾을지 고민했습니다. 정말 지갑을 경비실에 맡겼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지만, 지갑이 손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선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죠. 그렇게 골똘히 생각을 계속하는 중에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XBOX스태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 우연히 찍은 사진 속에 담긴 고마운 스태프의 모습 (왼쪽)

알고 보니, 지갑을 맡긴 상사가 다른 경비실에 가져다 줬고, 그래서 동선이 꼬일까봐 일부러 찾아 여기까지 달려왔다는 겁니다. 그가 건네주는 지갑을 받아들며 정말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전했습니다. 그러자 스태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남은 게임스컴도 재밌게 지내길 바라"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왔던 길로 달려가 버렸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일수록 사소한 사건,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번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럴 때일수록 함께하는 사람들의 친절함이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죠. 만약 지갑을 잃어버리고 끝을 맺는 결말이었다면 앞으로 '게임스컴'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웃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안 좋은 기억도 추억으로 바꿀 수 있는 비결, 어쩌면 친절에 그 열쇠가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