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의 상징이 되는 시간까지 3년. 그것도 가장 많은 인물이 거쳐 간 팀에서 심장이라는 칭호를 얻은 선수가 있다. 바로 롱주 게이밍 출신의 '프로즌' 김태일 이야기다. 약 3년 동안 그가 롱주 게이밍에서 거둔 성적은 55승 82패로 뛰어난 성적은 아니다. 팀 성적도 최하위권에 머물렀고, 개인 퍼포먼스도 압도적이지 못했으니 어느 하나 좋은 지표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태일은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선수다. 2015년에만 두 번의 승격강등전을 치렀고, 김태일은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뿐일까, 호화 군단이라는 기대 속에서 출발한 2016년에도 팀의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2라운드부터 등장해 연승을 이끌었다. 꾸준히 승리와 우승을 가져다 주는 에이스가 아닌, 팀이 힘들 때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세주였던 셈이다.

롱주 게이밍과 결별한 후 김태일은 국내, 해외 여러 팀의 관심을 받았지만,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터키의 페네르바체를 택했고, 프로 데뷔 첫 리그 우승과 롤드컵 진출을 해냈다. 여기에 섬머 스플릿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면서 개인 커리어와 폭발적인 인기는 덤으로 따라왔다.

결과적으로 롱주 게이밍과 김태일 그리고 페네르바체 모두 성공을 거뒀다. 김태일은 입단하자마자 팀의 체질개선에 나섰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에 안주하는 팀원들에게 의욕을 심어줬고, 코칭스태프 역할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자들에게 역할을 배정해줬다. 그야말로 심장 이식과 같은 거대한 작업을 해온 것이다. 한국을 떠나면서 반드시 성공하리라 의지를 다졌고, 낯선 땅에 도착해 팀원들과 함께 발전과 변화를 모색한 김태일. 그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다.


"페네르바체가 가장 적극적으로 영입 의사를 보였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 없이 계약을 체결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향수병처럼 외로움이 몰려오더라고요. 침대에 누웠더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하고 음식도, 사람도 전부 그리웠어요."

제아무리 형제의 나라라지만, 처음 접하는 문화는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게다가 언어까지 통하지 않으니 헤쳐나가야 할 과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연습 시간을 제외하고 남은 시간을 언어 공부에 오롯이 쏟아부었다.

"저는 영어도 터키어도 사용할 줄 모르는 데다 통역해줄 사람도 없으니 살기 위해 언어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보니 부탁하고자 하는 말이 상대 입장에서는 명령조처럼 느껴져 오해도 많이 생겨서 힘들었죠. 아무리 한국 무대에서 경험이 있고, 팀 관계자들이 전적으로 신뢰한다 해도 함께 뛰는 팀원들과의 호흡이 우선이기에 적응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했어요.

물론 노력이 따른 만큼, 팀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줬어요. 페네르바체가 일반 프로 스포츠에서는 명문 클럽이지만, e스포츠는 처음이기 때문에 저한테 자문하더라고요. 그래서 코치는 이래야 하고, 팀 시스템은 어떻게 구성돼야 효율적이라고 전달했죠. 그랬더니 정말 관계자들과 팀원 모두 따라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팀에 가자마자 분위기도 전부 바꿨어요. 다들 연습이나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얼어있길래 계속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도 같은 실수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대했어요. 6개월쯤 지나니 이제 본인들이 먼저 분위기를 풀면서 할 수 있다고 말하니까 뿌듯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당장 잘하는 선수보다 성격이 맞는 선수가 좋아요. 팀원들에게 피드백 시간 만큼은 서로 싸우자고 말했거든요.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서로 훌훌 털어 버리자고 했고요. 그래야 서로 발전할 수 있고, 당연하겠지만 저 또한 팀원들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려 노력했어요."



굳이 이런 가시밭길을 택할 이유는 없었다. 한국의 유명 팀에서 관심을 받았고, 돈을 좇을 수 있는 방법도 많았다. 그러나 김태일은 오로지 롤드컵 진출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터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직 선수 생활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당장 돈이 우선이 아니었고, 선수로서 이루지 못한 게 많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죠. 그리고 한국 팀에서는 저에게 관심을 가진 것 뿐이었지 정식 제의를 한 팀은 없었어요. 만약 제의가 있었더라고 페네르바체에 입단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선수 생활을 걸고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있던 만큼, 다른 팀원들에게 편승해서 이루고 싶진 않았어요.

이루고자 하는 게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금액적인 부분은 고려대상이 아니었어요. 롱주 게이밍에서 받은 연봉에 비하면 지금은 절반도 되지 않아요. 과거나 현재의 저에게 우선순위는 팀과 선수로서의 명예에요. 그만큼 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고, 커리어를 쌓고 싶어요. 롱주 게이밍에 속해 있을 때 '프로즌은 잘하는데 롱주 게이밍에서 탈출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에 화가 많이 났었어요. 이건 현재 팀인 페네르바체에서도 똑같고요."



그러나 2017 시즌을 앞두고 롱주 게이밍과 김태일은 작별했다. 당시에는 리빌딩을 원하는 롱주와 재계약을 바랐던 강동훈 감독이 대립하고 있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김태일은 최소 연봉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게다가 주전 자리를 보장받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이미 경쟁에서 살아남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충분한 경험을 쌓았으니 말이다. 애석하게도 협상은 실패했고, 강동훈 감독은 "심장을 도려낸 기분이다"라고 말하며 두 사람의 동행은 2016년에 막을 내렸다.

냉정한 현실 속에서 김태일의 이런 의지를 알기에 강동훈 감독이 재계약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성적이 나오지 않았으니 어찌할 도리는 없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위치에서 정상을 밟았기에 아픈 과거마저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재계약 기간에 감독님이랑 따로 대화를 나눴는데, 정말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감독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팀에 정말 큰 실망을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IM에 있는 원주민을 롱주가 쫓아내는 느낌이랄까. 물론, 경쟁 세계에서 당연한 일이긴 해요. 성적을 못 냈으니 현실적으로 저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 게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섭섭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잠시나마 한국에 오면 롱주 게이밍 숙소에 가서 감독님을 뵙고, 이모님께도 밝게 인사할 수 있어서 좋아요. 신기하게 올해 IM 출신들이 좋은 성적을 거둬서 감독님이랑 탈 IM은 진리라고 농담도 주고받고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또 추억이 보정된다고, IM 시절 돈 없이 연습하던 게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그때는 감독님이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선수에게 조금이라도 돈을 쥐여 주시고, 휴대폰 정지가 된 팀원도 도와주셨거든요. 저도 약간의 용돈을 받아 생활하곤 했는데, 다들 그렇게 힘들다 보니 팀원들끼리 받은 돈으로 서로 사주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꼈어요."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어느덧 24세가 된 김태일은 꽤 성숙해져 있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의 IM, 그 그늘막 속에서 바깥으로 나와보니 마치 성인이 돼 독립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터키라는 불모지에서 막막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보다 더 어린 나이에는 감독님이나 코치님께 엄청 대들었어요. 멘탈이 나가면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고집도 부리면서 말대꾸도 많이 했죠. 그런데 제가 페네르바체에서 감독님, 코치님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겪어 보고, 지나 보면 안다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어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프로게이머 데뷔 약 1,500일 만에 김태일은 꿈을 이뤘다. 비록 롱주 게이밍에서 롤드컵 무대를 밟는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부단히 노력한 끝에 자신의 첫 목표를 달성했다. 끝으로 현재 팀원들에 대한 자랑과 옛 식구들에 대한 응원 그리고 첫 롤드컵 도전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저희 탑 라이너가 정말 똑똑해요. 이 친구는 한국 선수와 비교해도 영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약간 '임팩트' 정언영 선수나 '루퍼' 장형석 선수와 유사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이번 롤드컵에서 주목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만약 조별 라운드에 가면 롱주 게이밍이 있는 B조는 피하고 싶어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같은 조에 (이)호종이 형도 있어서 누군가는 반드시 탈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모두 잘해서 더 높은 곳에서 만났으면 좋겠네요.

마지막으로 이 말은 정말 하고 싶었어요. 저는 정말 축복받은 선수에요. 가끔 인터넷을 보면 롱주 게이밍의 경기 때 저를 찾아주시는 분들을 보면 끊임없이 응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늘 제 소식을 전해주는 한 팬이 있는데, 정말 감사해요. 계속 응원 부탁 드리고, 남은 기간 롤드컵 준비 열심히 해서 목표로 삼은 8강에 꼭 오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