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패패패패승승승승'이라는 스코어를. 심지어 부담과 긴장이 하늘을 찌르는 LoL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 무대에서 말이다. 다시없을 기적의 스코어를 만든 주인공은 바로 롤드컵 그룹 스테이지 B조의 프나틱이다.


2011년 창단된 프나틱은 유럽을 대표하는 LoL 프로팀으로 긴 역사와 함께 많은 업적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 멤버 교체도 잦았고, 작년에는 예상 밖의 큰 부진으로 롤드컵 진출마저 실패했다. 그리고 2017년, 리빌딩과 함께 그들은 다시 일어섰다. 실패를 딛고 돌아온 이번 롤드컵 무대에서 프나틱이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자.


■ 홀수해의 프나틱? 올해는 글쎄...

프나틱은 홀수 해마다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왔다. 2011년에 치러진 초대 롤드컵 우승을 시작으로 2013년과 2015년 롤드컵에서는 4강 진출에 성공했다. 반면 2012년과 2016년에는 롤드컵 진출에 실패했고, 2014년에는 그룹 스테이지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찾아온 2017년, 프나틱은 한국인 용병을 포기하고 모든 멤버를 유럽인으로 구성해 LCS EU 무대에 임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2017 LCS EU 스프링-서머 두 시즌에서 모두 3위를 달성해 롤드컵 지역 최종 선발전으로 향했고, H2k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며 롤드컵 플레이-인 스테이지에 진출했다. 압도적인 기량으로 LCS EU을 지배했던 2013년과 2015년에 비하면 부족한 성적이긴 했지만, 지난해에 겪었던 부진에 비해서는 상당한 성과였다.

프나틱은 롤드컵 플레이-인 스테이지에서도 순항을 이어갔다. 동남아의 영 제너레이션에게 한 차례 패배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이어진 플레이-인 일리미네이션 스테이지에서 LMS의 홍콩 애티튜드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며 여전히 강팀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룹 스테이지에서 프나틱의 부진이 시작됐다. 롱주 게이밍, 임모탈스, 기가바이트 마린즈와 함께 B조에 속한 프나틱은 1경기에서 기가바이트 마린즈의 라인 스왑 전략을 부수지 못하고 패했다. 임모탈스와의 2경기에서는 치열한 접전 중 '레클레스'의 앞 점멸이 패배를 불렀고, 롱주 게이밍에게는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불과 20분 만에 패배했다.



■ 기적의 시작

롤드컵 그룹 스테이지 1주 차에 프나틱이 받은 성적은 0승 3패. 그들의 롤드컵 8강 진출 확률은 매우 희박했고, 그룹 스테이지 B조에 대한 팬들의 관심사는 롱주 게이밍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경기력과 기가바이트 마린즈가 보여주는 참신한 전략에 쏠렸다.

12일, B조의 경기로 그룹 스테이지 2주 차 일정이 시작됐다. 1경기는 2승 1패의 임모탈스와 1승 2패의 기가바이트 마린즈가 대결했다. 임모탈스가 승리한다면 그들의 롤드컵 8강 진출이 유력해지는 상황에서 기가바이트 마린즈가 준비해온 탑 우르곳 전략을 선보이며 임모탈스를 꺾었다. 이어진 롱주 게이밍과 프나틱의 2경기는 롱주 게이밍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프나틱의 전적은 0승 4패가 됐고, 롤드컵 그룹 스테이지 B조의 일정은 앞으로 단 네 경기만이 남아있었다. 임모탈스와 기가바이트 마린즈가 각 2승을 기록 중인 상황에서 프나틱이 롤드컵 8강에 진출하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였다. 남은 경기에서 프나틱과 롱주 게이밍이 전승을 거둬 임모탈스-기가바이트 마린즈-프나틱이 모두 2승 4패의 상황이 된 후, 이후 치러지는 재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는 것. 이외 다른 어떠한 상황이라도 발생한다면 프나틱은 그룹 스테이지에서 롤드컵 일정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시나리오가 시작됐다. 3경기에서 임모탈스를 만난 프나틱은 또다시 팽팽한 접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 웃은 쪽은 프나틱이었다. 4경기에서는 롱주 게이밍이 기가바이트 마린즈의 전략에 한동안 흔들렸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역전승을 거뒀다. 이후 5경기와 6경기 모두 프나틱-롱주 게이밍이 연달아 승리하며 결국 롱주 게이밍을 제외한 모든 팀이 2승 4패의 성적으로 순위결정전으로 향하게 됐다.



■ 대망의 8강 진출

프나틱이 만들어가는 기적에 많은 LoL 팬들의 이목이 집중됐지만, 그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는 앞으로 두 번의 순위 결정전까지 승리해야 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임모탈스와의 순위 결정전 첫 경기가 시작됐다. 접전 끝에 한 차례씩 승리와 패배를 나눴던 양 팀이기에, 한동안 신중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하지만 프나틱이 19분경 임모탈스의 봇 듀오를 잘라낸 후 바론을 획득했고, 계속해서 차이를 벌리며 승리를 거뒀다.

이제 프나틱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한 경기뿐이었다. 기가바이트 마린즈도 끊임없이 시도했던 그들만의 전략을 포기하고 롤드컵 메타에 따른 탱커-향로 조합으로 정면 승부를 선택했다. 하지만, 정면 승부는 프나틱이 한 수 위였다. 동남아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이는 기가바이트 마린즈였지만, LCS EU 두 시즌을 보내며 잔뼈가 굵은 프나틱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경기 중반 기가바이트 마린즈가 한차례 앞서갔지만 프나틱이 운영을 통해 이내 역전에 성공했고, 결국 43분 만에 기가바이트 마린즈의 넥서스를 파괴했다.



■ 기적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

프나틱의 롤드컵 8강 진출은 과연 기적이었을까? 그들의 4연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1주 차 3패의 경우 기가바이트 마린즈의 전략에 당한 일격, 임모탈스와의 접전 끝 패배, 0순위 우승 후보 롱주 게이밍을 상대로 한 패배였다. 4번째 패배는 또다시 롱주 게이밍에게 당한 결과였다.

위와 같이 프나틱은 순수하게 약팀이기에 0승 4패라는 전적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4연패 이후 치른 임모탈스와의 경기부터 프나틱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며 4연승을 달성했다. 5개의 LoL 메이저 지역에서 3시드로 롤드컵에 진출한 것은 운이나 기적이 아닌, 그들의 진짜 '실력'이었을 것이다. 이에 지금부터 프나틱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2017년 리빌딩을 마친 프나틱의 강점은 각 선수들의 기량에서 나오는 탄탄한 기본기이다. 모든 라인이 안정적인 라인전을 자랑하며, 경기 초반부터 스노우볼을 빠르게 굴리진 못하지만 그만큼 쉽게 당하지도 않는다. 외국인 용병을 포기한 올해는 빠른 판단과 한타 포커싱도 눈에 띈다. 갱킹, 라인 푸시, 오브젝트 컨트롤, 바론 버스트 등 어떤 플레이를 하든 한치 망설임 없는 과감한 모습을 보인다.


프나틱의 선수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3년 만에 프나틱의 품으로 돌아온 탑솔러 '소아즈'의 경우 실력의 기복이 매우 큰 것이 장점이자 단점으로 꼽힌다. 실제로 그룹 스테이지에서 프나틱이 치른 1경기부터 5경기까지는 그의 무기력한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남은 경기에서 지금까지의 부진을 완전히 잊은 듯한 그의 플레이는 프나틱을 8강으로 올려놓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소아즈'는 높은 챔피언 숙련도와 노련함을 보인다. 기가바이트 마린즈와의 경기에서는 잘 큰 초가스로 위엄을 뽐냈고, 임모탈스와의 순위 결정전에서는 영리한 플레이로 '코디 선'의 트위치를 자르며 승리의 핵심이 됐다. 8강 진출이 걸린 최종전에서는 나르로 초반 2킬을 당하며 불안한 시작을 보였으나 이내 성장을 마치고 한타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브록사'와 '캡스', 둘의 경력은 합쳐도 5년이 채 되지 않고 롤드컵 무대는 처음 밟는 신예들이다. '브록사'의 경우 프나틱 아카데미에 입단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프나틱의 정규 멤버로 선발된 괴물 신인으로 탱커보다 캐리형 정글러를 선호한다. '캡스'의 경우 작년 터키 'Dark Passage' 소속으로 2016 TCL 서머 시즌 우승을 이끈 미드 라이너다.

LCS EU의 최고 유망주로 꼽히는 두 신예의 플레이는 롤드컵에서도 빛났다. 모든 경기에서 다른 포지션의 베테랑들 못지않은 안정감을 뽐냈고, 약간의 잔실수 외에는 아쉬운 모습도 남기지 않았다. 많은 미드 라이너들이 첫 롤드컵 무대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진 반면, '캡스'는 프나틱의 미드 라인을 꿋꿋이 지켜냈다. '브록사' 역시 렉사이를 위주로 캐리형 정글러들을 플레이하며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프나틱 봇 듀오의 강력함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유럽 최고의 원거리 딜러인 '레클레스'와 오랜 프로 경력과 함께 미드, 원딜, 서폿을 모두 플레이해본 베테랑 '제시즈'의 조합은 그 어떤 봇 듀오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이번 롤드컵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경기에서 '제시즈'의 보호 아래 '레클레스'는 무난하게 성장했고, 그 화력을 마음껏 뽐냈다. 임모탈스와의 경기에서 무리한 앞 점멸로 패배를 맛 보긴 했지만, 이후 치러진 경기에서는 안정적인 모습으로 프나틱을 이끌었다.

지금까지 프나틱의 롤드컵 8강 진출은 준비된 기적이었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룹 스테이지 2주 차에 있었던 모든 상황들(기가바이트 마린즈의 대 임모탈스전 승리, 롱주 게이밍의 1만 골드 대역전승 등)이 없었다면 프나틱의 8강 진출은 일찍이 좌절됐을 것이다. 정말 '홀수 해의 프나틱'이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이토록 극적인 상황은 앞으로 쉽게 보지 못할 것이다.


■ RNG와의 8강전을 앞두고

프나틱은 롤드컵 8강에서 중국의 RNG와 승부를 벌인다. 8강전은 단판으로 진행됐던 지금까지의 경기와는 달리 5판 3선승제로 진행된다. 다전제는 실력과 더불어 집중력이 경기력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이에 롤드컵이라는 무게는 프나틱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특히 세계 무대의 경험이 적은 '브록사'와 '캡스'의 경우 집중력을 쉽게 잃을 수 있다. RNG의 기세에 흔들리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이 프나틱에게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이번 롤드컵에서 물오른 기량을 선보이고 있는 RNG이기에 프나틱의 4강 진출 전망은 매우 불투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기적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롤드컵 무대를 치르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프나틱이기에, 그룹 스테이지보다 한층 더 단단해진 모습으로 멋진 경기를 펼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