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워치 리그의 첫 타이틀 매치에서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단 하루 만에 일어났다. 런던 스핏파이어가 정규 리그 경기에서 자신을 꺾었던 두 상대를 넘어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심지어 결승 상대였던 뉴욕 엑셀시어에게는 당일 첫 경기에서 패배하고도 복수전에 성공했다. 이전 경기 그대로 뉴욕의 우승으로 끝나는 듯 했지만, 결과는 런던의 우승이었다. 그것도 가장 극적인 역스윕으로 말이다.

극적인 대결의 중심에는 '버드링' 김지혁이 있었다. 타이틀 매치에 진출한 다른 팀보다 한 단계 더 올라와야 했고, 결승에서 0:2로 밀릴 때는 몸도 마음도 지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마다 '버드링'이 팀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내면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뉴욕의 우승을 직감할 시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3위에서 1위, 세트 스코어 0:2에서 3:2로. 단순히 숫자로만 설명할 수 없는 승부였다. 극한의 상황에서 버틸 수 있었던 '버드링'만의 저력이 발휘되면서 최악의 확률을 뚫고 승리한 것이다. 결승전의 주인공, MVP가 될 만했다. 개인 기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에임, 그것을 넘어선 '버드링'만의 무기가 있었다.


위기에 강한 진짜 강심장
침착함이 만든 결과


타이틀 매치 당일까지 결승 상대인 뉴욕 엑셀시어의 기세는 매서웠다. 앞선 경기에서 뉴욕이 3:2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결승에서도 2:0으로 런던을 압박했다. 그 과정은 완벽에 가까웠다. 이전과는 다른 스타일로 경기했지만, 뉴욕의 승리는 변함없었기에 상대하는 입장에서 더욱 까다로울 수 밖에 없었다. 쟁탈전이 아닌 곳에서 '파인'을 기용했고, 오리사 중심의 수비 라인을 '리베로'의 파라, '메코-파인' 별동대로 지체없이 돌파해버렸다. 지원가 '쪼낙'의 로드호그까지 통하면서 거침없이 승리한 것이다. 게다가, 쟁탈전에서 0:99 스코어를 100:99로 역전하는 장면까지 이어지면서 뉴욕의 그림이 완성되는 듯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허무한 3:0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런던이 두 세트를 내주는 과정에서 페이스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킬 로그에 꾸준히 얼굴을 올리는 '버드링'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결승전이 끝난 게 아니란 걸 팀원들과 관중에게 알린 것이다. 그리고 승부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3세트에서 극적인 승리가 '버드링'의 활약 속에 나왔다. 돌진 조합을 준비한 뉴욕의 첫 전진을 틀어막았고, 3라운드에서도 적절하게 두 명의 지원가와 '리베로'의 겐지를 끊어냈다.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뉴욕이 설계한 플레이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2세트까지 완벽해 보였던 뉴욕의 전략에 빈틈을 만들었다. 그 틈을 파고들어 런던 스핏파이어가 우승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 준우승하는 순간에도 '버드링' 킬로그는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이번 결승전을 보면서 작년 APEX 시즌3 결승전의 '버드링' 모습이 겹쳤다. 당시 풀 세트 접전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버드링'은 경기가 끝나기 직전까지 킬 로그를 올리면서 분투했다. 패배를 직감할 만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버드링'의 모습은 이번 결승전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후회가 남았던 점은 APEX 시즌3 결승전 연습을 더 하지 못한 것. 연습으로 충분히 긴장감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말을 남겼다. 다음 결승전에서는 이전만큼 긴장하지 않을거라고. 그리고 정말로 다시 결승전에 올라왔을 때 침착하게 기회를 잡은 게 '버드링'이었다. '버드링'의 에임과 판단은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자
트레이서부터 위도우메이커로 결승 MVP까지



작년까지 '버드링'을 본 팬들이라면 인상적인 트레이서를 기억할 것이다. 앞선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버드링'이 유명세를 탄 것은 기막힌 트레이서 플레이를 선보인 뒤다. 하지만 이번 오버워치 리그에서 '버드링'의 주특기였던 트레이서는 예전만큼 자주 볼 수 없었다. 메타의 변화도 있었지만, 트레이서가 필요하면 주로 팀원인 '프로핏'이 들고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리그가 시작되면서 '버드링'은 맥크리-위도우메이커 위주로 선택하면서 또다른 역할을 맡은 것이다.

결승전 이전까지 '버드링'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플레타-파인'이 홀로 쓸어 담는 하이라이트 장면을 쏟아내면서 맥크리-위도우메이커 플레이의 정점으로 기억됐다. '버드링' 역시 꾸준히 제 역할을 했지만, '플레타-파인'만큼 오버워치 리그의 이슈가 되진 못했다.

▲ '버드링'이 위도우메이커에 겐지? (출처 : Official Overwatch Highlights)


하지만 가장 극적인 순간에 '버드링'의 플레이는 빛났다. 위도우메이커로 기세 좋던 뉴욕의 흐름을 완벽히 칼 같은 저격으로 끊어버렸고, 뉴욕의 영웅들이 달려드는 상황에서도 유유히 살아남았다. 맥크리로는 오아시스 맵에서 일방적으로 딜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다닐 줄 알았다. 맵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트레이서가 아닌 '버드링'의 새로운 영웅의 활약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영웅 선택 역시 깔끔했다. 결승 이전의 뉴욕과 대결 3세트에서 승부를 가릴 3점 싸움이 나왔다. 평소 잘 선보이지 않았던 솔져 76를 선택해 달려왔다. '버드링'의 선택과 플레이는 적절했다. 전술 조준경까지 활성화하면서 자신의 손으로 경기를 승리로 이끈 것이다. 결승전 마지막 세트에서 등장한 겐지의 용검 역시 빛났다. 특정 상황에 필요한 영웅을 적절하게 선택해 제 기량을 발휘한 것이다.

사실, '버드링'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왔다. 단지 트레이서에 가려져있던 것 뿐이었다. 데뷔했던 팀인 콩두 운시아 시절에는 '라스칼'처럼 투사체 영웅을 맡았다고 한다. 콩두 판테라에서는 주로 트레이서를 맡았지만, 다른 딜러인 '큐리어스'가 들어왔을 때는 다시 투사체 영웅을 준비했다. 새로운 팀에 합류할 때마다 그 팀에 맞는 옷을 입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다. 다양한 역할을 충실히 해온 시기가 있었기에 '버드링'만의 플레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시걸'-'페이커'를 향해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버드링'


▲ 오버워치 초창기부터 이름 날린 '시걸' (출처 : 오버워치 리그 공식 페이스북)


안녕하세요. '버드링' 김지혁입니다. 저는 오버워치 초창기 때부터 'Seagull' 선수 방송을 자주 봤어요. 'Seagull' 선수를 따라 새와 관련된 아이디를 짓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버드'라는 단어에 새로운 단어들을 붙여보다가 어감이 가장 좋은 '링'을 붙이게 됐어요.

누구나 한 명쯤은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롤모델, 우상 있을 것이다. 존경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누군가의 팬이 되거나 그 사람의 길을 따라갈 수도 있다. '버드링' 김지혁 역시 초창기 특정 선수를 동경하는 평범한, 오버워치를 좋아하는 청년이었다. 지금은 자신의 닉네임에 영감을 준 댈러스 퓨얼의 '시걸'과 같은 무대에서 뛰고 있다. 동경했던 대상과 한 무대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버드링'의 이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오버워치에서 최다 우승을 해보고 싶어요. LoL의 '페이커' 선수처럼요.

새로운 목표가 생긴 '버드링'의 첫 걸음은 절대 쉽지 않았다. 두 시즌이 계속될 때까지 뚜렷한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APEX 시즌3에서 첫 결승에 올랐지만, 쓰라린 준우승을 경험해야 했다. 최강이라고 평가받던 시절 4강 문턱에서 좌절한 기억도 있다. 그렇게 힘들 길을 돌아서 오버워치 리그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동경하는 대상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만들어낸 기적 같은 결과. 하지만 '버드링'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제 2의 '페이커'를 꿈꾸는 프로게이머들은 많을 것이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최다 우승이라는 커리어는 단 한 팀, 한 선수만 세울 수 있는 기록이니까. 하지만 '버드링'은 우상이었던 '시걸'과 같은 무대에 섰고, 우승이라는 목표 하나를 더 이뤄냈다. 자신이 말했던 것을 하나씩 지켜나가고 있기에 최다 우승이라는 목표가 허상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새로운 우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제 2의 '페이커'보단 '버드링' 김지혁으로 불리면서 말이다.


▲ 출처 : 런던 스핏파이어 공식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