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뉴먼트 밸리'는 당시 모바일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일면이 있던 게임이었다. 시각적인 효과를 이용했던 퍼즐은 아름답고 몽환적인 인상을 남겼다. 게임 디자인은 물론이고 독특한 아트를 통해 판매량과 작품성 모두를 챙긴 게임이기도 하다.

모뉴먼트 밸리 이후, 아트 디렉터였던 '켄 웡(Ken Wong)'은 자신의 회사 'MOUNTAINS'를 설립하고 잔잔한 로맨스를 첫 작품으로 선보인다. 커다란 규모, 박진감 넘치는 연출이 아니라, 작지만 아름답고 잔잔한 네러티브를 가진 '아름다운 게임'으로 첫 작품 '플로렌스(Florence)'를 디자인하고자 했다.

또한, 단순한 로맨스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디 개발사인 만큼 자신들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게임에 담고자 했으며, 연애와 사랑, 이별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게임의 형태로 빚어냈다. 딱 30분짜리 플레이. 그리고 수수한 아트웍을 가진 게임임에도, 플레이하고 나서는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오랜 시간 연애를 계속해 온 사람 입장에서는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설렘과 연애. 그리고 이별과 개인의 성장, 독특한 표현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날이 / 일초만 비켜갔어도 / 이 순간 / 우린 만날 수 있었을까.
- 이남일 시인, '만남의 조건' 中

플로렌스에서 눈여겨 봐야 하는 지점들은 주인공 '플로렌스'의 감정선을 따라서 보여주는 아트들과 게임의 특징적인 조작방식들이다. 모뉴먼트밸리의 아트 디렉터였던 '켄 웡(Ken Wong)'은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게임'의 정의를 플로렌스를 통해서 입증하려 했다.

두 인물의 만남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켄 웡의 표현은 꽤 센스가 넘친다. 누군가와의 만남은 형태는 다를지언정, 어느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시작된다. 때로는 군중 속에서도 그 사람만 보이고, 그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게임 내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서로의 얼굴을 대면하는 장면도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길거리에서 곡을 연주하는 '크리시'. 그리고 그를 스쳐 지나가면서 지켜보기만 '플로렌스'. 두 사람의 거리는 사고를 통해 급격히 좁아졌으며, 이 과정에서 상대에게 초점을 맞추는 과정을 겪는다. 말 그대로, 카메라 조리개 링을 이리저리 돌리는 과정을 통해서.

이 과정에서 게임에서는 아무런 텍스트도, 설명도 없다. 아니, 게임 내에 텍스트라고는 정말로 일부분만 들어가 있으며, 스토리 진행을 직접 설명하는 과정조차 없다. 모든 것은 플레이어가 궁금증을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행위, 그리고 일러스트로 표현한다. 하지만 직접적인 표현이 없어도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 처음에는 좌측이던 이미지가 초점을 맞추면서 형태를 잡아간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나게 된다.

이어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만남을 시작하면서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시작된다. 텍스트를 사용하지 않은 게임에서 대화는 퍼즐로 표현됐다. 이것 또한 의미가 있는 형태다. 플레이어가 두 사람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등장인물의 거리를 담고자 했다.

대화를 진행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퍼즐을 맞춰나가는 행위와도 같다. 서로의 관심사, 공통적인 관심사, 일상, 취미 등 서로 알아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첫 만남에서는 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어떻게 이야기를 할지도 고민해야 하고,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켄 웡은 아마도 이런 과정들을 게임으로 풀어내고 싶지 않았을까.

데이트를 이어나가면서 플로렌스의 퍼즐은 점점 수가 줄어든다. 더불어 퍼즐을 풀어나가는 데에는 점점 시간이 줄어들게 되며, 플로렌스가 대화하는 말풍선이 올라오는 간격도 함께 줄어든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두 사람의 거리. 그리고 마음을 직접 표현하는 말풍선은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대화문이자 완성된 퍼즐의 형태-아마도 사랑을 직접 이야기했을-로 제공된다. 그리고 입맞춤으로 챕터의 끝을 알린다. 잔잔하지만 확실한 표현은 이렇게 두 사람의 만남을 아름답게 그린다.

▲ 퍼즐의 수는 줄고,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그리고 결말을 맺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타인과의 만남은 결국 자신은 물론 상대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서로의 가치관을 확인하고 상대가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계기를 만들게 되기도 하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아니면 현재 매진하고 있는 업무에 긍정적인 결과물을 가져오기도 한다.

플로렌스에서는 이런 감정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뒀다. 프롤로그에서 단순한 반복작업을 하고 있던 주인공이 연애를 시작하면서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것도 센스있게 표현했다. 게임 처음부터 보여줬던 간단한 퍼즐이 연애를 시작한 다음부터는 자동으로 진행된다. 음악도 통통 튀는 경쾌한 분위기로 전환되며, 아무런 대화 없이도 상황적인 설명을 충분히 전달한다.

또한, 동시에 개인의 성장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음을 한 챕터(액트)를 들여서 설명하려 했다. 크리시가 음악 아카데미에 가는 것을 시작으로 주인공은 잊어버렸던 어릴 적 꿈을 떠올린다. 이전 챕터에서 얼기설기 만들었던 색종이는 이제 성인이 된 주인공의 손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서로의 자아를 찾아가고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찾게 된다.

▲ 그저 스쳐 지나가는 챕터인 줄 알았건만...

주인공이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는 거울이 좋은 장치로 등장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쿨리 (C.H. Cooley)가 '거울 자아(looking-glass self)'를 통해 설명했던 것처럼, 서로가 상호작용하여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모습을 갈구한다.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크리시가 있고, 이를 보며 자신이 잊었던 모습을 찾고 거울 속에만 존재하던 새로운 길을 밟아나가는 주인공 플로렌스가 있다.

쿨리는 자아 개념 형성을 타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인식의 단계',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판단할지 상상하는 '평가의 단계', 타인의 평가에 따라서 자아를 형성하는 '변화의 단계'로 구분한다. 게임의 주인공들은 서로 비춰보며 상상하고, 조금씩 변화를 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셈이다.

▲ 거울과 상상, 서로의 교류는 주인공들의 자아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우린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
- 조지 엘리엇

하지만 영원한 만남은 없는 법, 둘의 관계는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하고, 이별을 준비한다. 이별에서 오가는 말들과 느껴지는 감정들이 서로와 자신에게 상처로 남는 시간이 왔다. 게임에서는 이 과정을 하나의 챕터(액트)를 들여서 표현한다. 감정이 변하는 과정을 따라서 지금까지 게임에서 진행했던 모든 방식을 비트는 형태로 말이다.

대화는 이전처럼 퍼즐로 제공되지만, 감정선이 달라지면서 기존과는 형태가 달라진다. '말에 날이 서 있다'고 표현하듯이 퍼즐의 튀어나온 부분은 원형이 아니라 어디인가 찌를 것과 같은 형태로 변한다. 또한, 이전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퍼즐 피스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 대화창 하나로만 구성된다. (이건 분명 욕이다)

갈라지는 관계는 합이 맞춰지지 않는 퍼즐이 된다. 합이 딱 들어맞던 퍼즐은 아무리 맞추려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형태로 변한다. 둘 사이의 어긋난 관계는 결국 다시 끼워 맞춰지지 않는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 위한 해답은 없고, 그저 복구할 수 없는 관계를 지켜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전까지 무언가를 해야만 진행되던 게임은, 이별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기존 구조를 비틀어 버리는 방식으로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풀어냈다.

▲ 말에 날이 서고, 관계는 다시 결합하지 않는다. 이별의 시간이다.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성장시키는 경험이다
- 모건 스콧 펙 (M.scott Peck)

하지만 이별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둘의 사이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플로렌스는 연인인 트리시를 떠나보냈다. 하지만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연인은 떠나가고 깊은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뒤에는 자신의 성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짧은 분량이지만, 플로렌스는 이별을 극복하고, 마주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개인의 성장임을 강조한다. 일반 사무직이었던 플로렌스는 직장을 떠나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크리시와의 연애 기간을 즐거웠던 추억으로 회상하면서 상자에 담는다. 그리고 '플로렌스'는 화가의 길을 걷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 플로렌스와 트리시의 이별이 남긴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다.

아마 단순한 로맨스였다면 리뷰를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임의 전체적인 플레이 시간은 30분 정도로 매우 짧은 편인데다, 반복해서 플레이할 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를 통해 플로렌스는 사랑과 만남, 이별이라는 주제를 관통한다. 지나간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리고 당시에만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플로렌스가 사랑을 통해 개인적 성취를 이룬 것은 우리의 게임 플레이와 함께 종결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플로렌스는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 아주 단순한 게임 플레이, 별다른 선택지조차 없는 진행. 심지어 큰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이렇게 여운이 남게 표현했다. 평범할 수 있었던 무언가를 독특한 표현방식으로 인상 깊게 전달했다는 것. 이게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어찌보면 식상할 수 있는 연애와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이토록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켄 웡이 추구했던 아름다운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연애 과정에서 무언가를 느꼈던 사람이라면, 플로렌스가 전하는 아트와 메시지가 크게 인상 깊게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