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이하 LCK) 섬머 스플릿이 시작한 6월 12일, 그야말로 대혼돈의 시대가 찾아왔다. 개막전부터 누누-카서스와 마스터 이-타릭이 정글과 미드 라인을 누볐으며, 봇 라인에는 룰루가 원거리 딜러 자리를 대신했다. 이어서 한화생명e스포츠와 그리핀의 경기에서도 비원거리 딜러인 라이즈와 블라디미르가 봇 라인에 섰다. 원거리 딜러의 아이템 변화와 공격력 약화에 따른 메타 변화였다.

이와 더불어 LCK 신입 그리핀이 초반부터 연승행진을 달리며, 순위표 맨 위를 차지했다.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사이 지난 시즌 결승에 올랐던 아프리카 프릭스와 킹존 드래곤X가 중상위권을 유지 중이었고, 젠지 e스포츠는 묵묵히 2위를 지켰다.

당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팀은 그리핀이었다. 그리고 2018 아시안게임 역시 팬들을 흥분시켰다. 국가대표팀의 면면이 화려했으니 말이다. 단, 스프링 스플릿 5위에 머물었던 젠지 e스포츠 봇 듀오 '룰러' 박재혁과 '코어장전' 조용인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2018 아시안게임 동아시아 예선전이 6월 8일부터 10일까지 진행됐다. LCK의 개막은 6월 12일, 국가대표 차출에 응한 팀들은 연습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각 포지션에 대체자원 혹은 연습생을 갖춘 아프리카 프릭스, kt 롤스터, 킹존 드래곤X, SKT T1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젠지 e스포츠는 사령탑인 최우범 감독이 자리를 비우는 동시에 봇 듀오의 공백까지 생겼다.

급변한 메타에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고, '룰러'를 대신할 선수도 없었다. 최우범 감독의 고심이 깊어졌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최 감독은 봇 듀오의 적응을 위해 2:2 봇 라인전 연습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룰러'는 이렐리아, 모데카이저, 야스오와 끊임없이 맞붙었고, 최우범 감독은 '룰러'의 기량을 체크한 뒤 팀의 계획을 완성했다.

계획은 매우 간단했다. 최우범 감독은 브루저 혹은 메이지 챔피언을 마다하고 '룰러'에게 끝까지 원거리 딜러를 쥐여줬다. 그만큼 '룰러'가 절정의 기량에 달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LCK 2일 차, 킹존 드래곤X와의 첫 대결에 승리를 거둔 '룰러'는 "브루저가 등장할 때마다 싹을 자르겠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많은 팀 관계자가 젠지 e스포츠의 선택에 의문을 가졌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이다.


고뇌에 빠진 최우범 감독, 메타에 물음표를 던지다
최우범 감독, "메타는 돌고 돈다"




'메타는 돌고 돈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씬에서 통용되는 말이다. 경쟁 팀들이 'EU 파괴 메타'에 부지런히 적응 중일 때, 최우범 감독은 한 번 더 생각했다. 그는 다시 원거리 딜러의 시대가 돌아오지 않겠냐며, '룰러'의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원거리 딜러가 정답이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오히려 비원거리 딜러들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최 감독은 원거리 딜러의 카운터는 없다고 여기는 지도자다. 그리고 자야, 이즈리얼 등은 무난하면서도 서포터에 따라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성장에 지장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면, 비원거리 딜러들은 카운터가 분명했다.

이렐리아, 야스오, 모데카이저 등은 CC기로 무장한 서포터들로 충분히 카운터 칠 수 있는 챔피언들이다. 예를 들어 알리스타가 대표적이다. 게다가 비원거리 딜러들은 일부 서포터들과 궁합이 좋지 않다. 상대가 알리스타를 뽑았다고 해서 모르가나나 원거리 서포터를 쉽게 고르기 어렵다.

스웨인, 블라디미르, 모르가나 같은 메이지 챔피언들도 마찬가지다. 라칸, 카르마 같은 부류의 챔피언들을 적절히 기용해 대응할 수 있다. 적어도 라인전 단계에서 원거리 딜러가 무너지지 않게 만들기 충분하다. 여기에 쉔이나 탐 켄치 같이 아군 보호와 운영에 도움이 되는 챔피언들은 최우범 감독이 '룰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존재였다.

'룰러'는 이런 최우범 감독의 확신과 기대에 부응했다. 이즈리얼(80%, 10게임), 애쉬(62%, 8게임), 자야(80%, 5게임)로 라인전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았다. 모르가나를 제외한 비원거리 딜러들은 대부분 공격 사정거리가 짧거나 아이템을 갖추기 전까지 원거리 챔피언의 공격에 노출되기 쉽다. '룰러'는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코어장전' 조용인은 탐 켄치와 라칸으로 '룰러'가 공격에 집중하도록 보호했다.

지금까지 최우범 감독의 '룰러' 활용법은 정답에 가깝다. 메타에 대한 적응은 비원거리 딜러 '사용'이 아니라 '대응'에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젠지 e스포츠는 9승 3패(+8)로 그리핀(9승 3패, +10)에 이어 2위에 자리하고 있다.


무난한 봇 라인, 그 뒤에 숨은 전략
최우범 감독이 선택한 최선의 방법




일반적으로 젠지 e스포츠를 '무난'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최우범 감독은 경쟁자들이 10인 로스터, 거물급, 다수의 신예 영입 등으로 바쁜 비시즌 기간을 보낼 때, 즉시 전력감 영입은 '플라이' 송용준이 전부였다. 이미 전성기가 지난 선수로 평가받은 '플라이' 영입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더 많았다. 비교적 무난한 비시즌 기간을 보낸 셈이다.

경기 스타일도 그렇다. 메타가 어떻든 젠지 e스포츠는 챔피언 조합, 공격할 때의 플레이, 불리해진 상황에서의 단단한 수비 모두 한결같았다. 메타 적응에 실패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따랐으나, 최우범 감독은 조용히 플랜 B를 구상하고 있었다.

스플릿 초반까지 '플라이'와 '하루' 강민승이 확고한 주전처럼 보였다. 리프트 라이벌즈 이전까지 '플라이'는 전 경기 출전했으며, '하루'도 '앰비션' 강찬용보다 더 많은 경기에 나섰다. 이후 1위 그리핀과의 대결에 '크라운' 이민호가 첫 출전해 말자하로 무난한 경기를 펼쳤다. '앰비션'은 2라운드에 들어 세주아니-트런들로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최우범 감독은 틈틈이 선수 기용에 변화를 주면서 팀원들의 경쟁심을 이끄는 동시에 다양성을 더하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챔피언 조합에도 고민한 흔적이 있었다. 지금은 등장하지 않지만, 스플릿 초반에 '플라이'에게 미드 브라움을 맡겨 2전 2승을 거뒀다. 그리고 실패로 끝난 '카이사' 몰아주기, '큐베' 이성진의 스웨인-케넨 등 다른 팀과 차별되는 조합으로 쏠쏠한 재미를 봤다. 원거리 딜러 활용 뒤에 감춰진 젠지 e스포츠의 색다른 전략이었다.

전혀 변화가 없는 봇 라인 때문에 상대 팀이 쉽게 대처할 거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대부분 젠지 e스포츠를 꺾는 데 실패했다. 바로 위와 같은 변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최우범 감독은 "현재 메타가 재미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프로게이머도 사람이기 때문에 전부 잘할 수 없다. '룰러'가 원거리 딜러를 잘하고 있는 시점에 굳이 다른 유형의 챔피언을 주문해 밸런스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며, "그저 우리가 잘할 수 있는 플레이와 챔피언을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최우범 감독의 이 같은 선택들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기 어렵다. 반대 성향의 그리핀 역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고, 나머지 팀들도 비원거리 딜러를 사용 중이다. 게다가 아직 정규 스플릿 여섯 경기가 남았다. 마지막 순간에 젠지 e스포츠가 아홉 팀을 모두 따돌리고 웃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