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팀의 승리를 몸소 이끈 선수들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선수들은 세트 MVP로 선정되어 많은 이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LoL은 팀 게임인 만큼, 혼자만의 힘으로 팀의 승리를 만든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MVP를 받은 선수가 활약하기 위해서는 이를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숨은 MVP'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번에 소개할 선수는 킹존 드래곤X의 정글러 '피넛' 한왕호다. 그는 얼마 전부터 예전 기량을 많이 상실한 정글러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했다. 하지만 '피넛'은 2018 LoL 챔피언스 코리아 섬머 스플릿 32일 차 1경기 킹존 드래곤X와 kt 롤스터의 3세트를 통해 자신을 향한 부정적인 평가에 제대로 반박했다. 그가 3세트에 보여줬던 트런들 플레이는 눈에 확 띄진 않았지만, 팀을 위해 꼭 필요한 플레이였다.

그가 어떤 플레이를 보여줬는지 짚어보기 전에 양 팀이 3세트에 꺼냈던 조합 콘셉트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킹존 드래곤X는 미드 제라스와 원거리 딜러 바루스로 날카로운 포킹 조합을 갖췄다. 이에 kt 롤스터는 오른과 아지르, 카이사, 쉔 등 파고드는 조합으로 응수했다. 오랜만에 포킹 조합과 돌격 조합이 부딪혔다.

이때 '피넛'이 선택한 트런들은 킹존 드래곤X의 조합 콘셉트를 완성시켜주는 퍼즐 조각이었다. 그의 트런들은 앞라인에서 '라스칼' 김광희의 초가스와 함께 딜러진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버텨주는 역할도 해야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했던 건 E스킬 '얼음 기둥'을 계속 적재적소에 활용해 자신들의 조합 강점은 살리고 상대 조합 콘셉트는 무너뜨리는 역할이었다.

포킹 조합은 '일방적인 원거리 포격'을 가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원거리' 보다는 '일방적인'이다. 멀리서 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에게 거리를 내준 채 얻어맞으면 절대 안된다. 그건 포킹 조합을 갖춘 팀이 탱커 챔피언이나 아군 보호 특화 챔피언을 선택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피넛' 트런들의 '얼음 기둥'이 매우 중요했다. 아군이 포킹을 가할 때 상대 돌격 조합이 진격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기회를 잡았을 때 아군의 포킹 스킬이 제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얼음 기둥'으로 상대 챔피언의 이동을 제한하는 플레이도 보여줘야 했다. 여기에 덧붙여 아군이 카이팅 구도를 만들었을 때, 상대가 쉽사리 후퇴하지 못하도록 이동 경로를 차단하는 플레이도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피넛'의 트런들은 이 모든 플레이를 3세트 내내 선보였다.

14분 10초부터 미드 라인에서 양 팀의 한타가 시작됐고, '프레이' 김종인의 바루스와 '유칼' 손우현의 아지르가 쓰러졌다. 잠시 후, '비디디' 곽보성의 제라스가 '데프트' 김혁규의 카이사에게 CC기를 적중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궁극기 포킹. 카이사가 이리저리 스킬을 잘 피하고 있을 무렵, '피넛'의 트런들이 슬쩍 다가와서 '얼음 기둥'을 카이사 쪽에 시전했다. 그 '얼음 기둥' 때문에 발이 느려졌던 카이사는 정확하게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오는 제라스의 궁극기를 피하기 위해 '점멸'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 제라스의 궁극기 활용을 도와준 '얼음 기둥'

양 팀은 계속 비슷한 구도로 싸웠다. 킹존 드래곤X가 멀리서 스킬을 난사하고자 자리를 잡으면, kt 롤스터가 오른의 궁극기와 함께 뛰어들고자 했다. 그럴 때마다 '고릴라' 강범현의 탐 켄치가 바루스를 곧장 뱃속으로 집어넣어 보호했고, '라스칼'의 초가스가 앞에서 신나게 얻어맞다가 적은 체력으로 계속 생존하며 상대 노림수를 실패로 돌렸다.

그럴 때마다 알게 모르게 '피넛'의 트런들은 상대의 스킬 연계나 진격을 방해하기 딱 좋은 위치에 '얼음 기둥'을 시전했다. 27분 5초에 '피넛'의 트런들은 3세트 내에서 자신이 맡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장면을 연출했다. 타이밍이 살짝 빗나가긴 했지만, 아래와 같이 '피넛'의 트런들은 경기 내내 오른의 궁극기 시전을 '얼음 기둥'으로 방해하려고 노력했다.

▲ '하지마!'

그는 중요한 한타마다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드래곤 둥지 앞에 모여있던 킹존 드래곤X는 상대 오른과 카이사의 연계 때문에 위기에 빠질 뻔 했다. 이때, '피넛'의 트런들이 팀을 위기에서 구했다. 오른이 궁극기를 되받아치려는 순간, 그곳에 정확하게 '얼음 기둥'을 시전해 상대의 시너지를 방해했고, 오른의 궁극기를 믿고 미리 파고들었던 카이사가 역으로 쓰러졌다.

▲ 상대의 시너지를 망친 '얼음 기둥' 활용

3세트의 마지막을 알렸던 미드 라인 대규모 한타에서도 '피넛' 트런들의 '얼음 기둥'은 절묘했다. 그 활용 방법이 앞서 소개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상대가 오른의 궁극기와 함께 싸움을 열기 직전에 '피넛'의 트런들은 오른 쪽이 아닌, 상대 본대 쪽으로 '얼음 기둥'을 활용했다. 이 때문에 kt 롤스터의 주력 딜러들은 오른과 쉔 쪽으로 빠르게 합류하지 못했고, 킹존 드래곤X가 한타를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 '오지마!'

'피넛' 트런들의 '얼음 기둥'은 한타에서 오른이나 상대 본대 쪽을 견제하는 용도로만 쓰이지 않았다. 상대의 이동 경로를 완벽하게 망치는 스킬 활용도 눈부셨다. 먼저, 미드 라인 근처 수풀 쪽에서는 상대 오른의 후퇴를 방해하는 위치에 '얼음 기둥'을 세워 이를 지켜주려던 '스코어' 고동빈의 그레이브즈를 끊어내는 팀적인 플레이를 이끌어냈다.

▲ 후퇴를 제대로 방해하는 '얼음 기둥'

위와 비슷한 장면이 또 있었다. 아까 소개했던 드래곤 둥지 부근 한타에서 '피넛'의 트런들은 상대 아지르를 끝내 쓰러뜨리는 장면의 시작을 알렸다. '유칼'의 아지르는 원래 벽 너머로 모래 병사를 소환한 뒤에 E스킬 '신기루'로 벽을 넘어 탈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절묘한 '얼음 기둥' 활용에 막혀 실패로 끝났다. '얼음 기둥'은 아지르를 살짝 왼쪽으로 밀어냈고, 이 때문에 아지르의 모래 병사는 벽 너머가 아닌 벽 안쪽에 소환됐다. 상대의 스킬 사거리 계산을 제대로 방해한 '얼음 기둥' 활용이었다.

▲ '모래 병사' 소환 사거리 계산을 망친 절묘한 '얼음 기둥' 시전

이처럼 '피넛'의 트런들은 3세트 내내 자신들의 조합 콘셉트를 살리거나 상대의 노림수를 망치는 플레이를 연거푸 선보였다. 3세트 승리를 이끄는 슈퍼 플레이나 눈에 확 띄는 캐리력을 뽐내진 않았지만, 묵묵하게 팀을 받쳐주는 역할을 통해 팀의 승리에 힘을 보탰다.

과거 '피넛'은 공격적인 정글러의 대표주자로 손꼽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넛'의 공격성은 점점 무뎌진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런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다. 하지만 이번 3세트에 보여줬던 트런들 플레이를 통해 '피넛'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단순히 공격적이기만 한 정글러가 아닌, 팀원들과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팀원들과 함께 호흡하는 정글러로 발전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