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을 불문하고 스포츠 경기에서 언더독의 승리는 언제나 집중 조명을 받는다. e스포츠 역시 마찬가지로, 31일 진행된 LCK 스프링 스플릿 36일 차 1경기에서 언더독의 짜릿한 승리가 나오며 팬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9위를 기록 중이던 진에어 그린윙스가 단독 1위를 달리던 그리핀을 무너뜨린 것이다.

진에어 그린윙스는 선발 출전한 '저스티스' 윤석준과 '카카오' 이병권이 패하자 2세트에 '그레이스' 이찬주와 '엄티' 엄성현을 내보냈다. 주전 선수로의 교체 카드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리핀이 지금까지 떨쳐온 위용을 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진에어 그린윙스의 두 선수는 보란 듯이 팀의 승리를 견인하며 본인들의 가치를 증명했다.



■ [후반 '테디' 캐리] 진에어 그린윙스의 승리 공식, 그러나...


진에어 그린윙스의 에이스가 '테디' 박진성이라는 사실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세계 최정상급 피지컬에서 나오는 완벽한 포지셔닝과 딜링은 진에어 그린윙스의 수많은 경기를 캐리했다. 실제로 '테디'의 데스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진에어 그린윙스의 승률은 뚝뚝 떨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LCK의 모든 팀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진에어 그린윙스를 상대하는 대부분의 팀은 '테디'의 성장 억제를 최우선 과제로 둔다. 특히 '테디'가 직접적으로 킬을 올릴 수 있는 봇 라인 설계만큼은 철저히 차단한다. 이에 진에어 그린윙스의 상체에는 막중한 과제가 부여된다.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고 '테디'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다.

한편, 이번 섬머 스플릿에서 진에어 그린윙스는 많은 좌절을 맛봤다. 불과 몇 달 만에 완전히 달라진 봇 라인 메타는 더없이 치명적이었고, 이에 선수들의 개인 기량도 지난 스프링 스플릿보다 다소 떨어져 보였다. 상위권 팀과 하위권 팀이 뚜렷하게 갈린 가운데, 진에어 그린윙스는 스플릿 1라운드를 1승 8패로 마무리하며 승강전으로 떨어졌던 작년 봄의 악몽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스플릿이 2라운드에 들어서자 진에어 그린윙스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첫 경기였던 킹존 드래곤X전부터 승리를 따내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이후론 아무것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엎어지는 패배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여기에 적극적인 움직임이 늘어나며 승리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러한 진에어 그린윙스의 선전에 가장 빛난 건 '테디'의 캐리력이었지만, 그 바탕엔 '그레이스'와 '엄티'의 활약이 있었다.



■ ['그레이스'와 '엄티'] 진에어 순혈들이 뽐낸 완벽한 호흡



'그레이스'와 '엄티'는 경력이 그다지 길지 않고, 진에어 그린윙스가 첫 LoL 프로 팀인 '순혈' 선수들이다. 또한 데뷔 초반 몇 번의 슈퍼 플레이를 펼치며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기복이 다소 있어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이렇게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진 두 선수의 호흡은 쉼없이 발전해왔는데, 이번 그리핀전을 맞이해 비로소 하나가 됐다.

'엄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리한 교전이나 카운터 정글을 시도하다가 쓰러지는 일명 '잼티 타임'일 것이다. '그레이스'의 경우엔 어떤 챔피언을 기용하든 안정적인 플레이가 가능한 것이 장점이지만, 그만큼 압도적인 라인전을 연출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번엔 완전히 달랐다. '잼티 타임'은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았고, '그레이스'는 상대를 완전히 찍어눌렀다.


■ 2세트, 미드 설계로부터 시작된 깔끔한 스노우볼

두 선수가 그리핀전에서 보여준 플레이를 세트 별로 나누어 되짚어보자. 가장 먼저 확인할 부분은 2세트에서 나온 선취점이다. 초반 '타잔' 이승용의 탑 동선을 확인한 '엄티'의 트런들은 재빨리 미드로 향해 '래더' 신형섭 오리아나의 점멸을 빼냈다.

중요한 건 '그레이스'와 '엄티'의 다음 판단이었다. 라인전 도중 체력이 상당량 빠진 '그레이스'의 르블랑이 귀환 타이밍을 잡기 위해 뒤로 멀찍이 빠졌다. 트런들 역시 미드 아래쪽에서 귀환을 택했으나, 라인에서 파밍을 이어가던 오리아나를 보자 두 선수의 계획이 바뀌었다. 아니나 다를까 르블랑의 귀환을 예측한 오리아나가 앞쪽으로 약간 몸을 내밀었다. 르블랑과 트런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진입, 더없이 깔끔한 선취점을 올렸다.

▲ 가볍게 점멸을 뺀 후

▲ 귀환 시전 중 킬각 캐치

▲ 기습을 통해 깔끔하게 제압

이 플레이를 통해 '그레이스'의 르블랑이 핵심 아이템을 한 타이밍 일찍 갖추며 미드에서 '래더'의 오리아나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주도권을 확인한 '엄티' 엄성현이 그리핀의 정글을 바삐 누비며 미드에 더욱 힘을 실어줬다. 결국 진에어 그린윙스가 17분에 그리핀의 미드 1차 포탑을 밀어냈고, 곧바로 협곡의 전령과 바람의 드래곤을 챙기며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엄티'의 설계가 스노우볼을 빠르게 굴렸다. '엄티'는 미드 포탑 파괴 직후 강가 부쉬에 설치해뒀던 제어 와드를 그리핀의 정글 안쪽으로 옮겼다. 이 제어 와드는 머지않아 오리아나와 '타잔' 엘리스의 위치를 정확히 밝혀냈다. '엄티'는 한 치 망설임 없이 봇 라인에 협곡의 전령을 소환했고, 단번에 봇 포탑 2개를 파괴했다.

▲ 미드 포블 직후 제어 와드 위치를 바꾸는 트런들

▲ 오리아나와 엘리스의 동선을 파악하자

▲ 곧바로 전령 소환, 1차에

▲ 2차까지!

3개의 포탑 차이는 유의미한 골드 차이를 만들었다. 급해진 그리핀이 탑에 인원을 몰아 노림수를 던졌지만, 진에어 그린윙스는 이마저 가볍게 넘기며 변수를 차단했다. 이후엔 그리핀의 마지막 보루였던 바론 버스트까지 스틸하며 완승을 거뒀다. 2세트에서 그리핀의 득점은 단 1킬뿐, 포탑을 포함한 그 어떤 오브젝트도 챙기지 못했다.

▲ 그리핀에게 단 하나의 오브젝트도 허용하지 않았다


■ 3세트, 오리아나 선픽의 이유

3세트의 MVP는 후반 폭풍 같은 화력을 뿜어댄 '테디'의 진이었지만, 판을 깔아준 건 역시나 '그레이스'와 '엄티'였다. 2세트에서 그리핀에게 오리아나를 열어줬던 진에어 그린윙스는 3세트 선픽으로 '그레이스'에게 오리아나를 쥐여줬다. 오리아나는 '그레이스'가 지난 한화생명e스포츠전에서 3세트 연속으로 기용했지만 패배를 기록한 챔피언이기에 진에어 그린윙스의 선택에 의문이 남았다.

하지만, 의문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그레이스'의 오리아나가 높은 숙련도를 자랑하는 '쵸비' 정지훈의 조이를 완전히 틀어막은 것이다. 봇 듀오가 몇 개의 킬을 내주는 동안 '그레이스'의 오리아나는 줄곧 압박을 이어갔고, 결국 '엄티' 스카너의 과감한 다이브에 힘입어 진에어 그린윙스의 첫 킬을 신고했다.


이후 상황은 2세트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엄티'의 스카너가 드래곤 주변을 맴돌며 '타잔' 세주아니의 갱킹을 차단하는 동안 '그레이스'의 오리아나는 꾸준히 미드 포탑을 두드렸다. 결국 12분 만에 진에어 그린윙스의 포블이 나왔는데, 이는 전 세트보다 5분이나 빠른 속도였다.


▲ 끈질기게 세주아니를 붙잡고 늘어진 스카너

발이 풀린 진에어 그린윙스가 본격적으로 그리핀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의 오리아나가 몇 번 잘리긴 했으나 그로 인한 손해보다 재빠른 움직임을 통한 이득이 훨씬 컸다. 봇에서 한 차례 쓰러졌던 '테디'의 진은 흐름을 타고 무럭무럭 성장했다. 꾸준히 우위를 유지하던 진에어 그린윙스는 32분경 시작된 한타에서 대승을 거두며 승부에 쐐기를 꽂았다.


▲ 진에어 그린윙스의 승리로 연결된 한타 장면

두 선수가 2, 3세트에서 선보인 플레이는 상체 플레이메이킹의 진수였다. 또한 상대가 그리핀이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깊었다. 요는 이러한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진에어 그린윙스는 오늘의 승리가 요행이 아니었음을, 어떤 팀을 상대로든 비슷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음을 남은 경기를 통해 보여줘야 한다.



■ [승강전 탈출] 남은 건 단 3경기, 기세 이어가야 한다



오늘 승리로 진에어 그린윙스는 MVP와 동순위를 기록하게 됐다. 남은 경기는 kt 롤스터-젠지e스포츠-아프리카 프릭스전이다. 강팀과의 연전이 꽤나 부담으로 다가오겠지만, 킹존 드래곤X와 그리핀을 쓰러뜨린 기세를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 한편, MVP의 남은 대진도 한화생명e스포츠, 젠지, kt 롤스터로 만만치 않다. 두 팀 모두 승강전 탈출이 절실한 상황에서 먼저 승리를 올리는 쪽이 분위기를 확실히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은 '그레이스'와 '엄티'의 플레이에 초점을 맞췄지만, '테디'를 비롯해 '소환' 김준영과 '노바' 박찬호 모두 훌륭한 기량을 보여줬다. 앞으로 남은 경기들에서 그들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 진에어 그린윙스의 앞을 가로막겠지만,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추가 승리를 챙기고 승강전행을 피해가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영상 출처 : LoL eSports 유튜브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