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EIM 정사인 기술이사

[인벤게임컨퍼런스(IGC) 발표자 소개] 정사인 기술이사는 1999년 설립된 스튜디오EIM의 창립멤버다. 마비노기영웅전과 메이플스토리1,2, 스페셜포스2, 레이븐, 듀랑고, 소울워커 등 300여 종의 게임 개발에 참여했다. 강연에서는 '가상현실 시대에서 오디오가 해야할 역할은 무엇인가'를 부제로 무엇이 좋은 소리이며, 가상현실에서의 좋은 소리는 무엇인지를 들려주고자 한다.

씩씩거리는 몬스터의 숨소리부터 적을 가르는 경쾌한 타격음. 마을에서는 정겨운 배경음악과 물건을 파는 상인의 목소리와 마을을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게임을 플레이하며 수많은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이 소리는 좋은 소리일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게임을 연상하게 하고 게임 속 이야기를 더듬게 하는 잘 만든 소리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개발자라면 유저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좋은 소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좋은 소리를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 걸까? 스튜디오 EIM 정사인 이사는 소리에 대해 정리한 자료를 들고 연단에 올라 그 답을 공유했다.


■ 좋은 소리는 무엇인가? - 게임 속 4가지 좋은 소리

소리. 즉 사운드는 우리 삶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있는 감각이다. 어딜 가든, 어디에 있든 우리 주변에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5가지 감각 중에서도 청각은 전체 처리 정보 중 시각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처리 정보량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소리의 홍수에서 사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리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한다.

태아는 엄마 배 속에 있는 20주 이후부터 청각이 발달한다. 특히 엄마의 심장 소리가 빠르고 크기가 높아지면 아기는 불안감에 빠지고 부모의 좋은 목소리를 들으면 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정사인 이사는 사망 비율의 2%가 소음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유럽의 한 조사 결과를 들며 소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처럼 소리는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우리는 좋은 소리를 찾고, 들으며 살아야 한다 주장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좋은 소리일까? 막연할 수 있는 이 내용을 정사인 이사는 개발자가 디자인하고 기획하는 소리 중에서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게임에서의 좋은 소리를 크게 4가지로 나눴다.


1. 객관적으로 좋은 소리

품질 이야기에 앞서 같은 음악 클래식 음악 두 곡이 강연실에 울렸다. 곡 내용은 같았지만, 더 좋은 음악을 묻는 강연자의 질문에 많은 이들이 첫 번째 음악을 선택했다. 첫 번째 음악은 웨이브로 된 원본 소스였고 두 번째 음악은 일반 모바일 게임에서 많이 쓰이는 64kbps의 MP3 곡이었다. 즉 2곡의 차이는 '품질'이었다.

곡의 품질, 이른바 음질이 좋은 음악이 좋은 소리의 첫 번째 조건이다.

손뼉을 딱 치거나 발을 구르는 소리를 직접 내는 자연발생적인 소리는 아날로그 정보다. 게임에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발생한 소리를 디지털 정보로 저장해야 한다. 즉 0과 1의 숫자로 소리를 바꾸는 작업이다. 객관적으로 좋은 소리. 즉, 품질이 높은 소리는 이런 정보 변환 과정에서 왜곡을 최소화했다는 의미다. 직접 발생하는 소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소리는 디지털로 변환된 소리다.

이런 음원들은 인간이 주로 들리는 영역 외에 나머지 소리 요소를 걷어내 용량을 줄인 것들이다. 변환 과정에서 왜곡을 최소화할수록 품질이 높은 음원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디지털 정보가 더 많은 정보를 담게 해 가능하다. 이런 고품질의 소리를 듣기 위해 LP나 블루레이 음반, FLAC 음원을 사용하기도 한다.

▲ 왜곡이 적은 고품질 음악은 누가 들어도 좋은 음악이라고 평가한다.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소스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발매되는 라이브러리들은 대게 24bit의 96 KHz로 출시되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CD 음질의 2배 정도 높은 수준이다. 또한, CD 음질의 4배 높은 음질도 표준화되는 추세다.

마이크 같은 녹음 장비, 혹은 고음질 제작이 가능한 소프트웨어를 통해서도 고품질 라이브러리를 구할 수 있다. 고품질 장비의 경우 기본적으로 높은 해상도의 음원 제작을 지원하고 있다.


2. 이미지에 맞는 좋은 소리

탄산음료의 캔 뚜껑을 따는 소리. 꿀꺽 꿀꺽하는 목 넘김 소리. 맥주나 콜라 광고를 보면 한 잔 마시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소리들이 있다. 또는 패스트푸드 로고송처럼 특정 광고와 상품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도 있다. 이런 소리는 그리 길지 않지만, 듣는이에게 상황과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특징이 있다. 이른바 감성을 총괄하는 소리들이다.

게임도 같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 항상 등장하는 전투 승리 음악. 음악 자체의 길이는 짧은 편이지만 뭔가 큰일을 했다거나 승리했다는 느낌을 준다. 오버워치의 맥크리 궁극기 사운드도 좋은 소리에 적합한 예다. '석양이 진다'라는 목소리로 위협을 주고 상대는 잔뜩 긴장하게 된다.


게임 개발에서 음악, 소리는 개발 막바지에 이루어진다고 여기곤 한다. 게임에서 주가 아닌 부가적인 요소로 생각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게임 개발 막바지에 음악을 추가하려 한다면 게임과 잘 맞지 않는 경우도 생기고 어느 한쪽이 부족해지기도 한다. 기껏해야 음악을 더한 수준에 그치고 만다.

앞선 예처럼 이미지에 맞는 소리는 게임에 다양한 감성을 쉽게 전달하는 강력한 기능을 수행한다. 개발 초창기부터 함께 고민하고 협력해 좋은 소리를 만든다면 단순히 음원을 더한 게 아니라 강력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제곱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3.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은 소리

아기 웃음소리나 아름다운 새소리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이다. 이런 소리가 왜 듣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하는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다. 인류의 조상이 거친 초원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밤, 혹은 맹수들의 위협에서부터 살아남아 아침을 맞는 소리. 즉 새소리를 듣고 안도감을 느낀 감정이 유전자에 남았다는 가설 정도가 전부다.

과학적인 이유가 어떻든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이러한 소리를 들었을 때 보편적으로 좋은 소리라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 자연물이 만드는 소리도 대표적인 감정적으로 좋은 소리다

흔히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이라고 부르는 입체 음향도 감정적으로 좋은 소리의 예다. 특히 공간감을 나타내는 ASMR은 특정 공간에 와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미지 등과 함께 활용하면 더 큰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도 만들어 표현할 수 있다. 마법 기구나 모닥불 소리를 틀어두면 소설 해리포터 속의 도시에 있는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르골 소리처럼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은 소리는 음악적인 완성도와 관계없이 잘만 활용하면 감성을 자극하고 추억과 기억을 되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4. 무음(無音)

잘못해 빼먹은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4번째 좋은 소리는 무음. 즉 소리가 없는 것이다. 소리를 비워두는 것은 게임에서 종종 사용되며 감정적인 변화를 직접 체험하는 과거 어드벤처 게임에서는 더욱 많이 사용됐다. 플레이어에게 어떤 사고를 하도록 유도하거나 우주 공간에 빠졌을 때, 슬프거나 망각에 빠진 연출 등에서는 되려 소리가 없어야 효과적으로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다.

물론 휴식의 의미로 소리를 넣지 않는 예도 있다. 계속되는 소리가 유저들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유저들이 어느 정도 음악을 들었을 때 피로해진다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게임마다 한 번에 플레이하는 시간도 다르고 장르, 플레이 방식마다 소리의 연출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음악도 뛰어났지만 음악의 여백을 잘 활용했던 어드벤처 게임들

확실한 건 흔히 좋은 소리는 앞서 말한 4가지 중 2가지, 혹은 3가지가 함께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 좋은 소리는 무엇인가? - VR과 함께 더 커진 가능성, 이제는 보편적인 소리를 찾아라

인간의 취향이나 감정은 서로 모두 다르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나이나 시대에 따라 선호하는 것도 달라진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앞서 소개한 4가지 좋은 소리는 그 세부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좋다고 느끼는 기준 또한 매우 주관적이고 변화무쌍하다. 앞서 설명한 4가지 조건을 더하기만 한다고 좋은 소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 음악 관련 종사자들이 끊임없이 연구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관적인 영역 내에 대다수의 사람이 좋은 소리라고 여기는 '보편적 기준' 또한 존재한다. 소리의 음질은 사람 대다수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낸다. 보편적으로 감정을 좋게 만들어주는 소리도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좋다고 느끼는 것이 있다.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 좋은 소리는 보편적인 기준을 크게 넘어가지 않는다.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좋다고 느끼는 부분이 90%가량이고 5% 내외에서 새로움과 신선함을 부여하는 식이다. 보편적인 기준을 찾기 역시 쉽지 않지만 좋은 소스의 선택, 디자인 기법, 레코딩 방식과 일정 수준 이상의 하드웨어 구비라는 배경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자신의 색을 더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정사인 이사는 좋은 소리를 찾는 고민과 결론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독창적인 소리는 보편적인 사운드를 만들 줄 알아야 하며
보편적인 것을 갖추고 난 뒤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진짜 나쁜 소리는 독창적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경험을 무시하는 소리

▲ 좋은 소리는 독창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좋은 소스로 잘 적용된 게임이 출시되었다면 잘 듣는 것도 중요하다. 이 부분에서 투자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CPU니 램이니 하며 스펙에 대한 욕구와 관심이 큰 오디오에 대한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처럼 말이다. 하이엔드 장비가 아니더라도 20~30만 원 정도만 오디오 인터페이스에 투자하면 기본 빌트인 잭과 이어폰보다 훨씬 좋은 청감 환경과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니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VR은 한자리에 묶여 시청하는 영화와 달리 직접 돌아다니며 체험하며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시각과 공간감이 영화보다 훨씬 우월한 경험을 전달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사운드 부분은 이런 경험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보통 플레이어는 헤드 디스플레이에 달린 이어폰, 혹은 해당 위치에 있는 오디오 잭을 사용해 소리를 듣는다. 이 경우 큰 소리처럼 청각에 자극을 줘야 하는 소리가 나오면 귀가 아플 수 있다. 또한, 엄청난 진동이나 큰 움직임을 귀로만 느낀다면 큰 자극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부족한 음향 부분을 우퍼나 진동을 느낄 수 있는 4D 사운드 체어 등을 활용한다면 VR이 영화를 뛰어넘는 몰입감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음향을 담당하는 개발자의 경우 소리를 통해 재미를 주는 방법과 표현 방식이 한층 다양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의 자유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정사인 이사는 VRON/2H라는 VR 탑승 게임을 제작하며 소리 표현의 다채로움을 확인했다. 이 VR 게임은 수평, 수직 회전을 통해 가속도와 수직 낙하를 체험할 수 있는 기구다. 이 기기는 Head Related Transfer Functions를 사용해 위, 아래 , 뒤 등 다양한 상황을 디자인 할 수 있다.

▲ VR 엑스포에서 공개된 수평, 수직 VR 게임 기구 'VRON'

놀라운 점은 소리가 속도감을 더한다는 점이다. 유저는 실제로 기기 회전 속도보다 훨씬 격한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여기에는 회전속도보다 빠르게 돌린 소리에 있다. 플레이어는 소리에 맞춰 회전하고 있다고 느끼며 높은 긴장감과 함께 게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즉 소리로 현실을 왜곡한 것이다.

실제로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있다고 여기게 하고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공포게임에서 끼익 거리며 열리는 소리와 웃음 소리 등이 상황을 만드는 것처럼 VR의 소리는 게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최근에는 많은 개발사가 소리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국내 게임사도 개발 초기부터 사운드 부분을 신경 써 팀을 꾸리고 개발과정을 함께하기도 한다. 정사인 이사는 한국 게임 시장이 사운드에 투자할 여력이 아직 많으며 해외 라이브러리를 뛰어넘는 리소를 제작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좋은 소리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임을 강조하며 생태계 확장과 좋은 소리로 가득한 게임 세상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며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