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엔딩을 보면서 왠지 눈물이 났다."

아름다운 그림과 연출이 인상적인 Gris는 바르셀로나의 인디 개발사, Nomada Studio에서 개발한 어드벤처 게임으로, 잿빛 세계를 다채로운 색들로 채워나가는 게임이다. 게임이라기보다는 좀 더 비주얼 아트에 가깝다는 평도 많을 정도로 간단한 게임플레이로 이루어져 있지만, 음악과 아트, 그리고 연출이 함께 어우러져 많은 유저들에게 힐링을 가져다준 타이틀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게임의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는 모습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정확히 어떤 스토리였는지, 각 장면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유저도 마지막 엔딩을 볼 즈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Gris는 그만큼 언어로 표현된 메시지가 아니라 비주얼 아트의 아름다움으로 무언가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게임이다.

개발사 Nomada Studio는 3년 전 미술가 콘라드 로셋(Conrad Roset)이 게임 개발자인 로저 멘도자(Roger Mendoza)와 아드리안 쿠에바(Adrian Cuevas)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멘도자는 어쌔신크리드와 레인보우 식스 시리즈 개발자였으며, 쿠에바는 히트맨, 파크라이3, 파크라이4의 개발자였다고.

3년동안 게임을 개발하면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콘라드 로셋 디렉터. 그에게 Gris 개발과정과 비주얼 아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Nomada Studio의 콘라드 로셋 디렉터


게임플레이, 스토리, 그리고 미적 요소가 하나로
Gris의 개발 과정


거대한 손 위의 소녀, 소녀는 추락하고 잿빛 세계에서 게임은 시작된다. 높은 건축물부터 별자리, 석상과 바람을 지나 소녀는 세계에 하나씩 색을 입혀나간다. 유저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색깔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계를 바꾸어나간다.

"Gris를 기획하면서 가장 기본이 됐던 아이디어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하면서 점점 회복시켜나가는 무채색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우리의 목표는 아름답고 진화하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자유롭게 이해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유저가 회복시켜나가는 무채색의 세계, Gris. 기획 단계에서부터 아름다우면서도 변화하는 경험을 전달하는 것인 만큼, 유저의 행동에 반응하는 살아있는 세계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퍼즐을 풀어 세계에 빨간색이 하나 더 추가된다고 '회복시켜나간다'는 느낌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Gris에서 가장 눈에 먼저 띄는 것은 '눈으로 보는' 아트워크지만, 자세히 보면 구석구석 신경 쓴 티가 나는 애니메이션과 음악까지 여러가지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유저의 점프하나 만으로도 조금씩 세계를 반응하고, 자연스럽게 내 플레이가 영향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계속 변화하기에 Gris의 세계는 살아있고, 색깔이 추가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때 유저는 감동을 한다. 모든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개발자의 초기 기획 의도에 맞게 게임플레이가 단순한데도 유저에게 뚜렷하게 감정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개발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게임플레이, 스토리, 그리고 미적 요소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가였다. 각각의 요소들이 적절한 밸런스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Gris를 개발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물론, 음악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고."

콘라드 디렉터는 특히 음악이 Gris의 세계를 더욱 살아있게 만들어주었다고 강조했다. 음악은 밴드 Berlinist와 함께, 사운드 이펙트는 루벤 린콘(Ruben Rincon)과 작업했다고. 그럼 건축물과 음악, 장면 연출까지 Gris를 개발하면서 개발사가 참고했던 레퍼런스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정말 많은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아트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먼저 '완다와 거상'과 같은 게임에서 등장하는 건축물에서 영감을 받았고, '저니'의 미니멀리즘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게임뿐만 아니라 그 외 미디어도 많이 참고했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히메' 등 지브리 영화부터 디즈니 영화의 배경 디자인, 뫼비우스 구성, 테오 얀센의 움직이는 조각물이나 알렉산더 칼더의 키네틱 아트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키네틱 아트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사진: 알렉산더 칼더의 키네틱 아트 ㅣ 출처: 몬트레알 미술관)

배경 디자인도 아름답지만, Gris를 플레이하면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캐릭터 애니메이션도 눈에 띈다. 펄럭거리는 소녀의 치맛자락부터 구조물들의 움직임까지. 특히 잉크처럼 움직이는 형체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모습이나 발판이 만들어지는 모습은 아주 작은 요소처럼 보이지만 게임의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옛 셀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었던 감성을 담은 Gris. 애니메이션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콘라드 디렉터는 Gris의 애니메이션을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준으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전통적 애니메이션은 초당 24프레임에 대한 그림을 손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한마디로 1초당 24장의 그림을 작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여타 게임과 같이 Gris도 60프레임으로 이루어져있지만, 캐릭터 애니메이션은 TV 기준과 같이 24프레임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게임 속에서 옛 디즈니나 다른 애니메이션과 같은 느낌이 나게 된다."



Gris의 목표, "스스로 자기만의 해석을 하는 것"
Gris와 비주얼 아트,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하여

다시 기사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볼까. 스토리는 정확히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왜인지 엔딩을 보니 눈물이 났다는 감상. 단순한 스토리 전개에 간단한 게임플레이로 이루어져있지만, Gris의 몰입감은 상당하다.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느낌보다 경험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물론 언어로 진행되는 스토리만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Gris는 어떤 부분에서 유저로 하여금 스토리를 이해하지 않고도 감동받게 만들 수 있었을까? 개발자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게임이 전반적으로 전달하는 감정과 아트가 깊은 멜랑콜리와 아름다움에 물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아름다운 음악이 Gris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유저에게 더욱 와 닿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의 모든 요소가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전달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주인공인 소녀는 이상한 세계에서 길을 잃어버린 캐릭터다. 어떤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냐는 질문에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부드럽고 희망적인 느낌을 함께 가진 캐릭터로 기획했다"고 설명한 콘라드 디렉터. 단순히 우울한 감정과 다르게 멜랑콜리는 사랑과 함께 얽혀져 종종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나 예술로 승화되는 창조적인 감정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유저 스스로 세계를 회복해나간다는 창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게임플레이 자체도 이러한 멜랑콜리와 연결되어있다.

게임뿐만 아니라 게임을 완료한 후에도 유저들의 창조적인 행위는 이어진다. 유저들의 리뷰 대부분에는 스토리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인 글들이 많았다. 주인공은 어떤 인물인지, 엔딩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는지. 콘라드 디렉터는 스스로 해석해볼 수 있다는 것이 Gris를 개발하면서 목표로 했던 가치였다고 설명했다.

"정말 멋지고, 우리의 의도에 딱 맞는다고 생각했다! 유저들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열려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는 정말 큰 목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Gris를 플레이하고 나서 각자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이 정말 그렇게 느꼈다면 모두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유저가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이 Nomada Studio의 목표였다"

어느 게임이나 미디어든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시각적인 요소다. 눈에 딱 보이니까. Gris는 특히 텍스트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게임 속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비주얼 아트다. 물론 다른 요소와의 조화가 전체적으로 유저에게 감정을 느끼게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중요하겠지만, 시각적인 요소가 가장 즉각적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 이런 부분에서 콘라드 디렉터가 생각하는 비주얼 아트의 힘은 무엇일까?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기에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도구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내가 선택한 미디어이기도 하고. 비주얼 아트는 어떤 언어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모든 이가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음악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뷰를 마무리 하기 전에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던져봤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물론 한마디로 정리하기에는 어렵고, 개인적으로 표현하기에도 어려운 것이지만, 콘라드 디렉터의 개인적인 생각이 궁금했다.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름다움이란 아주 주관적인 것이고 변화무쌍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에는 이에 대한 오래된 말이있다. "la bellesa esta en els ulls d'aquell que mira" 번역하자면,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있다"라는 뜻인데. 한국에도 이와 같은 말이 있는지 궁금하다."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는 각자 다른 기준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Gris는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평을 받았다. 게이머로서 훌륭한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을 게임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유저들이 Gris를 통해 어떤 경험을 하길 바라는지 들어보았다.

"앞서 말했듯, 각각의 플레이어들이 Gris를 플레이하면서 그들만의 특별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게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옳고 그른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플레이어들마다 그들의 해석이 있을 수 있고, 그들에게 그 해석은 특별하고 진실한 답일 것이다. 유저들이 각각 느끼는 모든 것이 Gris를 더욱 소중하고 값진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