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저녁 식사를 하는 김에 뭔가 보려는 생각으로 켠 TV에서 생소한 아이콘을 보았다. 프로그램 아이콘 위에 자그마하게 그려진 게임 패드 모습이 딱 봐도 뭔가 조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겠구나 싶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이내 관심은 사라졌다. 나는 밥을 먹는 김에 뭔가를 보려 하는 거지, 게임을 하려고 TV를 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중에서야 생각이 나서 플레이해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다. 출연진도 열연을 펼치고, 선택지도 꽤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비록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꽤 짧은 편이었지만 한 번쯤 해볼 만한 콘텐츠는 된다 싶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왜 다시 이런 콘텐츠들이 등장하는 걸까? 게임이라고 보기에는 모호하고, 영상이라고 보기에는 귀찮다. 물론 다른 게임들과 비교해 절대적 우위에 있는 점이 있기는 하다. 뭐냐고? 그래픽 하나는 끝내준다. 3D로 아무리 비벼 봐야 현실은 못 이긴다.

이런 콘텐츠들을 우리는 `인터랙티브 무비`라고 부른다. 리모컨이나 마우스로 간단한 조작을 통해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구성된 이 콘텐츠는 최근 몇 년간 꾸준히 만들어지며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스팀을 통해 출시된 `레이트 시프트`나 `허 스토리`, 넷플릭스로 서비스되는 `당신과 자연의 대결`, `블랙 미러: 밴더 스내치`가 좋은 예다.

▲ 좋은 평가를 받았던 '레이트 시프트'

관객 참여에 따라 플롯이 변화하는 유동적인 콘텐츠 자체는 굉장히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중세 연극의 경우 관객 반응에 따라 플롯이 즉석에서 결정되었고, 한국의 마당극은 애초에 그게 정통이다. 현대로 다시 돌아와 게임이 활발히 개발되던 시기로 넘어와서도 `용의 굴`이나 `아스트론 벨트`등 꽤 많은 작품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이런 인터랙티브 무비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한계가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터랙티브 무비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존재했다. 게임이 막 개발되던 시기에는 `조작의 맛`이 굉장히 중요했지만, 인터랙티브 무비는 게이머가 조작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 적었다. 게다가 실사 영상을 활용하다 보니 제작비도 비쌌고, 선택지에 따라 플롯이 나뉘어야 하므로 실제 촬영분보다 보이는 부분도 매우 적었다. 그마저도 완성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84년 GOTY 수상에 빛나는 인터랙티브 무비 '용의 굴'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장된 장르가 지금 다시 돌아온 이유는 게임 시장이 이를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임 산업이 발전하고, 저변이 확대되면서 게이머 층의 취향은 다양해졌다. 옵션 취급받던 내러티브는 게임을 이루는 중요한 축이 되었고, `헤비 레인`, `언틸 던`,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퀀틱 드림의 게임들이 대중에게 사랑받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지금의 `인터랙티브 무비`는 아직 게임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영화 같다`와 `게임 같다`의 느낌으로 생각하면, `밴더 스내치`는 게임 같았지만 영화였고,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영화 같았지만 게임이었다. `당신과 자연의 대결`은 게임으로 꽤 나아갔지만, 그래도 아직 게임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시도 자체가 이뤄지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아직 장르가 상업적인 완전성을 띄지 못한 과도기적 시점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며, 이런 시도들이 게임이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단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영상 미디어에 많이 다가간 모습을 보인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리얼한`, `실사에 가까운`, `자연스러운`

게임을 광고하는 카피라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들이다. 게임은, 그리고 게임 개발자들은 늘 똑같았다.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것이 게임의 존재 이유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게임은 늘 리얼리티를 추구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십수 년 전에도 게임 영상을 보면서 이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영화 같다.`

게임 산업에서의 거의 모든 대단한 발전 뒤에는 `현실에의 동경`이 있었다. 그래픽 구현 기술이 가파르게 발달했고, 이에 따라 연산 처리 장치인 GPU도 함께 발전했으며, 보다 생동감 넘치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AI는 알고리즘을 넘어 머신 러닝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게임과 현실의 간극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

▲ '당신과 자연의 대결'은 게임에 많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제 게임으로 현실을 만들려는 노력과 함께 현실을 게임으로 가져오려는 노력도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지금 만들어지는 인터랙티브 무비는 실험적인 부분이 많이 드러나는 수준이지만, 앞으로 꾸준히 개선이 이뤄진다면 분명 `게임 같은 영화`가 등장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영화 같은 게임`이 칭찬으로 통하던 걸 생각하면 꽤 재미있는 일이다.

문화 미디어 간에는 벽이 없다. 기술적 한계로 인해 나뉠 수는 있지만, 드물지 않게 섞이고, 융화되며, 진화한다. 비디오 아트나 뮤직 비디오가 그렇고, 인터랙티브 무비 또한 이런 진화한 미디어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이라고 다를까. 음악을 만나 리듬 게임이 등장했고, 문학과 섞여 내러티브가 생겼으며, 영상과 융화되어 게임의 영상미를 빚어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게임은 `영화 같은 현실성`을 추구하고, 인터랙티브 무비는 `게임과 같은 재미`를 찾아가고 있다. 영상 그리고 게임. 두 미디어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그때, 게임과 영상은 또 다른 방향으로의 한 걸음을 디딜 것이다. 내 선택에 따라 생존자가 갈리는 `워킹 데드`나 `왕좌의 게임`같은 콘텐츠가 나오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게임으로 경험한 내용이 그대로 드라마로 이어지고, 그 내용이 또 게임으로 다가오는 마법 같은 경험도 충분히 일어날법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