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속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은 어디서든 저절로 눈에 드러난다는 의미다. 오늘의 주인공 '테디' 박진성은 사람들의 관심이 닿지 않는 주머니 속에서 시작해 결국 낭중지추의 존재감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인물이다.

진에어 그린윙스의 살아있는 넥서스로 불렸던 박진성은 작년 겨울 SKT T1에서 프로게이머 인생 제2막을 올렸다. 그리고 결승전 MVP급 활약으로 팬들의 기대감에 완벽하게 부응하며 한동안 우승과 인연이 없었던 SKT T1에게 2019 LCK 스프링 우승컵을 안겼다.

승자가 모든 것을 얻고 패자는 잊혀지는 냉정한 e스포츠에서 결과에 침묵하지도 않고, 언제나 꿋꿋하게 자기 몫을 다하면 결국 빛을 본다는 것을 증명한 '테디' 박진성,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이들에게 좋은 본보기 역할을 하고 있는 박진성과 직접 만나 한 시즌을 치른 소감과 곧 펼쳐질 2019 MSI에 대한 각오를 들어봤다.



# 의외로 싱거웠던 결승전

솔직히 3:0으로 이길 줄은 몰랐다. 그리핀이 특이한 픽을 꺼내면 첫 세트를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3:0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세트부터 바텀 탈리야-판테온 조합에 정글 올라프까지 꺼내더라. 그리핀이 초반에 힘을 많이 실어서 솔직히 무서웠다. 그래도 우리 팀 모든 라인이 안전한 플레이로 초반에 잘 버텨서 쉽게 풀린 것 같다. 어차피 후반으로 가면 우리 팀이 무조건 좋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천천히 하자는 콜이 있었다. 판테온-탈리야의 연계 플레이에 당하지 않기 위해 더 조심했다.

3세트에서도 탈리야-판테온 조합이 나왔는데, 나는 그리핀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계속 연습을 했던 조합이고 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픽을 선택한 것 같다. 3세트도 1세트와 마찬가지로 긴장하면서 각을 주지 않았다.

솔직히 플레이오프부터 자신감이 넘쳤다. 누구와 만나도 이긴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앞으로 더 잘 할 자신도 있었다.


# 생애 첫 우승

우승이 확정된 순간, 팀원들과 함께 우승의 기분을 만끽하려 했는데, 헤드셋 선에 손이 엉켰다. 그대로 일어서면 헤드셋이 땅에 떨어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어리바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타' 형이 내 머리를 치면서 일어나라고 하더라(웃음). 나도 '마타' 형이 내 머리를 툭툭 치는 짤방을 많이 봤다. 감격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한 건 아니었다(웃음).


결승전 시작 전 무대 뒤에 서있었는데, 관객들의 함성 소리가 굉장히 커서 설렜다. 함성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막상 우승하고 나서는 크게 실감이 안났던 거 같다. 우승하고 덤덤했는데, MVP를 받은 순간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결승전에서 그래도 내가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만족스러웠다(웃음). MVP는 내가 받았지만, 팀원 모두 결승전에서 잘했다고 생각한다.


# '드림팀' SKT T1의 초반 부진

KeSPA 컵과 스프링 시즌 초반에는 솔직히 호흡이 잘 맞지 않았던 거 같다. 한 번도 같이 게임하지 않은 선수들이 처음 만나 합을 맞추는 상황이었다. 서로의 플레이 스타일도 몰랐기 때문에 플레이 스타일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일단 간다고 말했으면 무조건 가는 사람이 있고, 간다고 말했다가 안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성향을 파악하는 단계를 거치며 결과적으로 호흡이 잘 맞춰졌다.

시즌 초반에 다섯 명 모두 플레이 메이킹 능력이 있어서 말을 많이 했는데, 말이 지나치게 많아서 오히려 합이 잘 안 맞았던 거 같다. 그래도 계속 연습하다 보니 그런 부분도 잘 맞춰졌다.



# 각성의 순간

부담감보단 해이함이 있었던 거 같다. 솔직히 대충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집중이 잘 안 되기도 했다. 게임하면서 화가 나면 잘하는 편인데, 화가 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방송할 때도 소리를 지르면서 하다 보니 스트리머 느낌이 많이 났다. 진에어 '테디'에서는 패기가 느껴졌는데, 시즌 초반 SKT T1 '테디' 이름에서 패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거 같다.

그래도 경기를 하면서 점점 편해졌다. 가장 크게 각성한 순간은 2라운드 한화생명e스포츠를 상대로 베인을 꺼내고 진 경기였다. 베인을 픽했는데, 바텀에서 징크스-쓰레쉬에게 솔로 킬을 당했다. 그렇게 1세트를 지고 화가 굉장히 많이 났다. 그 뒤로 각성해서 자신감이 크게 올랐다. 결국 한화생명e스포츠 상대로 역전승을 하고 패기가 생긴 것 같다.

시즌 초반에는 개인 방송에서 너무 소리를 지르며 게임을 해서 집중을 잘 못했는데, 패기를 찾은 뒤부터 개인 방송에서도 최대한 진지한 자세로 집중하며 게임을 하고 있다. 원래 혼자 솔로랭크를 할 때 거의 말을 안한다.


# 최고의 동료들

'마타' 형 덕분에 편하게 게임을 했다. 서포터가 라인전을 할 때 필요한 위치가 있는데, (조)세형이 형이 잘 알고 있더라. 원래 서포터에게 포지션 관련해서 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항상 포지션을 잘 잡아줘서 편했다. 그리고 내가 라인전을 하면서 상대 정글러 생각을 잘 안하는 편인데, 세형이 형이 내가 부족한 부분을 항상 잘 챙겨주고 콜도 잘 해줬다. 세형이 형 덕분이 잘 안죽는 원딜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다른 라인에 기여하는 플레이도 잘하고, 오더 부분에서는 내가 본 서포터 중에서 최고인 것 같다. 세형이 형 덕분에 자신감을 갖고 더 플레이를 잘할 수 있었다. 확실히 '조련사'가 맞는 거 같다(웃음).

탑 (김)동하 형도 굉장히 든든했다. 나는 경기를 할 때, 정글러가 바텀을 봐주는 걸 좋아하는데, 동하 형은 정글러가 탑을 잘 봐주지 않아도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며 동시에 사리는 플레이도 잘한다. 한타도 잘하고 사이드 플레이도 잘한다. 못하는 게 없는 형이다. 게다가 성격까지 좋다. 착하고 재밌고 말도 잘한다. 역시 '칸'이다(웃음). (김)태민이는 본능적으로 게임을 하는 거 같은데, 자기가 해야 할 것은 다 한다. 동선이나 스킬 샷이 굉장히 좋다. 확실히 재능인가 싶다. 결승전에서는 강타가 아쉬웠지만, 강타도 잘 사용한다.

(이)상혁이 형은 처음에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래도 친해지고 싶어서 말을 많이 걸었는데, 잘 받아주더라. 착한 형이었다(웃음). 게임할 때도 본인이 주도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고 계산적인 플레이를 잘한다. 모든 수를 생각하며 최대한 실수를 안 하고 최대 이득을 얻으려고 한다. 괜히 우승을 많이 해본 게 아니다.



# 진에어에서 얻은 것

2017년 진에어 그린윙스에서 처음 LCK 시즌을 뛰었는데, 솔직히 2017년에는 잘 못 했다. 연패도 많이 해서 스프링 시즌이 끝나고 승강전까지 갔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삭발도 했는데, 게임하는 게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울기도 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2017 LCK 섬머 시즌에 팀 성적이 올라서 6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도 2017년에 내가 많이 못했던 것이 맞다. 그때 당시 LoL이라는 게임에 대해 잘 몰랐다. 원래 원딜은 자신감을 갖고 앞 포지션을 잡으며 과감하게 딜을 넣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2017년의 나는 그냥 평균 혹은 평균 이하의 원딜이었다.

그러다가 2017 섬머 시즌이 끝나고 향로 메타가 왔다. 스크림을 하면 원딜로 시작해서 원딜로 끝나는 메타였는데, 그 때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 자신감도 얻었고, 오더하는 방법도 깨달았다. 맵 리딩도 많이 늘었다. 향로 메타에서 얻은 것을 바탕으로 2018년에 잘했던 거 같다.

진에어 그린윙스에서 플레이오프도 못 가고 승강전만 가봤지만, 그래도 배운 것이 많다. 프로게이머로서 '쇼맨십'도 배웠고, 경기를 하면서 리더십도 생겼다. 당시 초중반은 '엄티'가 리드했고, 중후반은 내가 거의 다 리드했다. 솔직히 말해서 중후반 플레이메이킹 역할을 나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캐리 욕심이 많아서 그런 상황이 재밌었다.

SKT T1에서는 다들 캐리력이 있어서 든든하기도 했고, 캐리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나의 플레이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 MSI를 앞두고

솔직히 말해서 해외 경기를 잘 안 본다. 특이한 픽이나, 라인전, 한타 구도 정도만 본다. 그래서 MSI가 어떻게 흘러갈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가 하던 대로만 하면 충분히 우승할 것 같다. 오랜만에 국제 대회인데 시청자들에게 '국뽕'을 느낄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웃음).

빠듯한 일정 때문에 걱정하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프로 선수로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돈을 받으며 하고 있는데, 피곤하다고 집중하지 못하면 그 사람의 인생은 거기까지라고 본다. MSI 같은 높은 무대에서 커리어를 쌓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더 집중해서 열심히 할 생각이다.


# SKT T1의 보물 '테디'의 목표

SKT T1에서 2년 계약을 맺었는데,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본다. 2년 동안 열심히 해서 최대한 많은 우승을 하고 싶다. 이번 결승전에서 평소 하던 대로 플레이했는데,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으니 믿어주셨으면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