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이머에게 어떻게 프로 생활을 하게 됐는지 물으면 많은 이들이 이렇게 답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게임을 좋아하고 또 잘하면서 입단 테스트까지 합격하는 경우가 많았죠.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 그들 입장에서도 거절하기 힘든 선택이라고 할 수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프로의 세계에 들어오면 게임에 대한 즐거움만으로 버틸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 살아남는 건 또 다른 일이니까요. 취미가 일이 된다고 단순히 재미로만 즐길 수 없고, 또 자신만의 능력을 만들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죠.

화려한 겉보다 프로의 세계는 더 냉혹했습니다. 오버워치 리그의 샌프란시스코 쇼크 팀에 속한 ‘라스칼’ 김동준 역시 최근 리그에서 우승하기까지 정말 수많은 일들을 겪었죠. 국내 오버워치 대회 준우승의 경력을 보유했지만, 리그에서 주전 자리를 놓치고 연이은 이적과 방출, 2부로 강등까지 개막 첫해부터 힘든 시기의 연속이었다는데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서 그런 걸까요. 2년 전 리그 진출을 앞두고 있던 그때의 '라스칼'과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당시 게임하는 게 좋고 팀원과 우정-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던 '소년'이었다면, 이제는 냉혹한 현실에서 성장해 진정한 '프로'다운 면모를 갖추게 됐답니다.

한 시즌 동안 절망 속에서 우승이라는 결실을 내기까지, '라스칼'은 얼마나 성장했을까요. 우승 이후 더 큰 목표를 향하는 그가 그동안 걸어온 길이 궁금했습니다.



■ 세계가 주목하는 꿈의 무대, 그 앞에 '언어의 벽'

외국어를 잘하면 좋다는 말은 많이들 들어봤을 겁니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 때가 생기니까요. 현실은 대부분 막연히 좋다는 것을 아는 정도일 뿐,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전 세계인을 상대로 하는 오버워치 리그의 경우 말이 달랐습니다. 한국인으로 구성된 팀에서 주전 로스터에 들지 못하는 순간, 언어가 생존을 위한 '의무'가 돼 버린 거죠. 런던 스핏파이어에서 리그를 시작한 '라스칼'을 비롯한 팀원들도 그랬답니다. 영어 수업보단 게임 실력에 집중하는 선택을 했지만, 모두가 주전이 될 수 없었죠. 그리고 영어로 소통하는 팀으로 들어가서 현실을 마주해야 했고요.

댈러스 퓨얼로 팀을 옮기면서 영어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어요. 당시 댈러스에 한국인이 '이펙트' (황)현이 형과 저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형은 오래전 엔비어스 시절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딱히 구단에서도 저만을 위한 영어 수업을 만들어주진 않았죠.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지만요.

영어 공부에 대한 절실한 시점은 댈러스에서 방출당한 시기에요. 팀을 나가게 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나 전략을 팀원들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없더라고요. 팀원과 의사소통 자체가 원할하지 않다 보니까 아쉬움이 남았어요. 그때 내가 만약 영어를 더 잘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악에 받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댈러스 때보다 컨텐더스 NRG에 있을 때 오히려 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했죠.

영어는 최대한 대화를 많이 하려고 했어요. 대화할 기회를 일부러라도 더 만들었죠. 문법적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틀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말했습니다. 상대도 신기하게 제 말을 알아듣더라고요. 그렇게 영어 실력을 늘렸던 것 같아요.


주변 사람을 붙잡고 하는 영어. 타지에서 생존을 위한 공부였던 것이죠. 2부 팀으로 강등되면서 프로 생활을 포기할 법한 상황에서도 '라스칼'은 다시 리그로 가기 위한 선택을 했답니다. 그리고 대략 1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기간 내에 확실히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오버워치 리그의 쇼크로 올라와 한국인과 외국인 프로 사이에서 소통의 중심을 잡고, 영어로 인터뷰까지 시도하는 그의 달라진 태도에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고요.

통역사분이 있는데, 영어로 인터뷰한 건 팬분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노력해서 인터뷰도 영어로 할 수 있다는 걸 말이죠. 많은 팬들이 제가 영어가 많이 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통역이 있어도 영어로 인터뷰하는 건 팬분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에요. 해외팬들도 많이 좋아해 주는데, 영어로 말하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영어로 방송 인터뷰한 날도 제가 준비된 상태가 아니라 떨리긴 했어요.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마음 정도 먹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마침 스테이지2 전승을 거둔 날 저를 불러주더라고요. 누가 당일 인터뷰할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나간 거였죠. '골든 스테이지'라는 기회라 그런지 더 잘할 수 있는 말도 평소보다 잘 안 나왔던 것 같아요.


인터뷰 장면을 보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라스칼'의 모습이 나옵니다. 영어도 인터뷰도 아직 완벽하다고 볼 수 없지만, 프로게이머로서 팀원과 팬들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태도는 많은 리그 팬들의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었습니다.

쇼크 해외 팬 반응
- 다시 한국인으로 구성된 팀으로 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쇼크에 자리잡을지 몰랐다.
- 해외팀으로 와서 외국인 팀원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 2부로 떨어져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멋지다.


▲ 시즌1 결승전에서 우승한 '라스칼' 친정팀 런던 스핏파이어

■ 런던의 파이널 우승을 보며 한 다짐

국내 APEX 준우승팀인 콩두 판테라 출신의 '라스칼'은 앞서 말했듯이 팀과 팀원에 대한 믿음이 큰 선수였습니다. 2년전 인터뷰에서 '라스칼'은 팀원 한 명 한 명을 생각하는 형, 정이 많은 듯한 인상을 줬죠. 현 팀원 그대로 리그로 가면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을 정도였니까요.

하지만 함께 리그에 올라온 뒤로 그들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라스칼'이 2부로 떨어진 시점에 리그 친정팀인 런던은 시즌1 그랜드 파이널 우승이라는 가장 큰 영예를 얻었답니다. 이를 지켜보는 '라스칼'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컨텐더스에서 다시 올라오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서 교차했겠죠.

리그에서 떨어지고 나서 한동안 리그를 잘 안 보려고 했어요. 보면 화가 나더라고요. 나도 저 자리에서 경기할 수 있었는데,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책도 많이 했죠. 그래도 런던이 결승전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응원했어요. 우승했을 때 저도 진심으로 같이 기뻤고요. 저를 내친 팀인데, 우승도 못 하면 더 속상할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제가 만약에 '런던에서 후보 선수로 우승했으면, 과연 행복했을까'라는 물음이 들 때도 있었죠. 그런 생각을 하면 팀에서 잘 나온 것 같았고요.

NRG에서 활동할 때는 막막했죠. 다른 것보다 이전 팀이었던, 런던과 댈러스에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악착같이 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제가 영어가 부족해서 리그에서 나오게 됐다고 생각해서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컸고요. 2부로 떨어지고 나니 제가 런던 친구들한테 먼저 연락하기가 힘들었어요. 리그에 가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도 지금은 다시 종종 연락하고 같이 술도 마시기도 합니다.




이후, '라스칼'은 다시 능력을 인정받아 오버워치 리그로 복귀하게 됐는데요. 1부로 복귀했으니 이제는 단순히 '열심히만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할 법한 시기처럼 보였죠. 그렇지만 '라스칼'은 쇼크에서 리그를 준비하기 전 기간이 자신에게 '가장 불안했고, 힘든 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쇼크에 처음 들어갔을 때, 12인 로스터로 시작한다는 사실에 걱정이 많았거든요. 이미 런던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려본 적이 있잖아요. 쇼크의 로스터 경쟁자들도 다 쟁쟁한 선수들이에요. 저와 비슷한 역할군의 선수가 6명으로 정말 많았죠. 걱정이 앞서면서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시즌2 스테이지 초반만 하더라도 제가 주전이 아니었잖아요. 런던 시절이 반복되는 건 아닌가... 그런 불안감이었죠. 팀 차원에서 내부 스크림도 많이 했고, 로스터 로테이션도 다양하게 준비해서 제가 거기에 리그에 설 수 있을지도 몰랐고요. 다행히 저에게도 기회가 왔죠. 그 기회조차 감사하게 생각하고 주전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승까지 할 수 있게 돼 더 기뻤죠.

이런 힘든 길을 걸어와서일까요. 리그에 와서도 안심할 수 없었고, 우승하더라도 마냥 기쁘지만 않았습니다. '라스칼'은 "스테이지2 우승 후에도 정말 기뻤지만 무언가 아직 남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즌2 그랜드 파이널까지 우승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의외로 먼저 들었죠"라며 쉽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승 후에도 방심할 수 없고,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하는 프로의 숙명이 느껴지기도 했죠.



■ 성장하는 쇼크와 '라스칼', 그들의 미래

그리고 이제 '라스칼'은 불안함 대신 팀에서 희망적인 면을 많이 봤습니다. 작년까지 PO에 들지 못하던 팀이 시즌2에서 팀적으로 발전했고, 팀원 개개인 역시 엄청난 발전을 이뤄냈죠. 성장을 멈추고 있지 않았기에 준우승 후 우승을 거둘 수 있었답니다.

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확실히 좋아졌죠. 합을 맞추는 기간이 늘어나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지고, 그러면서 팀적인 실수도 줄어들더라고요. 밴쿠버와 지난 결승은 한 끗 차이라고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조금 더 실수를 많이 해서 패배한 경기였습니다. 우리만의 실수를 줄이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느껴서인지 결승전 들어설 때 승리를 확신했고요.

그리고 쇼크처럼 외국인과 한국인이 함께 하는 팀의 장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팀원들은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거든요. 모이면 능동적으로, 전략적인 움직임을 많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해외 선수들은 피지컬과 에임이 특출난 경우가 많죠. 피지컬 적인 면은 해외 선수들이 폭발력을 갖고 있어요. 거기에 한국 선수들의 운영 능력이 더 해지고, 서로 보조해주면서 하니까 잘 된 것 같습니다.


엄청난 기록들과 슈퍼 플레이로 화제를 모았던 팀원들에 대한 말 역시 빼놓지 않았습니다. 작년까지 빛을 보지 못한 선수들이지만, 어느새 리그의 정상급 선수로 성장해있었죠.

스테이지1에서 준우승하면서 '슈퍼'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누구보다 더 밴쿠버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더 성장하더라고요. 항상 과감한 플레이를 펼치면서 의지를 불태웠죠. 평상시에는 장난기 많고 팀 분위기 메이커라고 생각해요. 방송에서 보여주는 면모들이 스크림에서도 나오거든요. 팀원들을 잘 이끌어주죠.

'시나트라'는 시즌1 중반 이후로 합류하면서 긴장하거나 실수를 많이 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 경험이 시즌2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팀원들과 합부터 게임을 예전보다 잘 풀어나가는 능력이 생겼죠. 시즌1의 '시나트라'는 피지컬을 앞세우는 선수였고, 운영과 팀합에서 부족한 면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제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더 성장한 듯해요.

'최효빈' 선수는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납니다. 경기 중반에 큰 흐름을 잡아주는 중요한 오더를 많이 내려요. '바이올렛' (김)민기는 에임이 뛰어나다 보니까 기본 운영의 틀을 벗어난 변수를 많이 만들 수 있어요. 다양한 팀과 선수가 출전하는 리그의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팀원들과 합을 맞추는 능력까지 생긴 것 같아요. '크러스티' 코치님은 게임의 방향성을 잘 제시해줍니다. 선수들이 그 방향을 이해하도록 돕고 하나로 뭉치게 하는 특출난 능력을 지녔죠.



'라스칼' 본인은 현 위치와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쑥스러운듯 답했지만, 현 메타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팀원을 붙잡아주는 역할이 가장 커요. 아무래도 제가 주로 다룬 영웅인 브리기테가 어떻게 보면 '허리' 역할이거든요. 앞라인 탱커들과 소통을 해야 하고 뒷 라인 힐러와도 말해야 하니까요. '바이올렛' 민기가 부족한 영어도 제가 도와주고, 앞-뒷 라인에서 부족한 부분을 제가 채워나가는 거죠. 중간에서 돕는 역할이라고 보면 됩니다.

솔직히, 힐러 역할도 저와 잘 맞다고 봐요. 심리전에 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심리전이란 게 상대방만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팀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아야겠죠. 내가 어떻게 해줘야 팀원이 편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팀 게임에서 중요한 부분이죠.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33' 메타가 오버워치의 팀플레이를 극대화할 수 있어서 재미있기도 했어요.


마지막으로 '라스칼'은 어떤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2년 전이라면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라고 답했지만, 많은 것이 변한 지금의 '라스칼'의 답변은 또 달라졌죠.

사람들한테 '라스칼'이라는 프로게이머를 많이 알리고 싶어요. 그냥 스쳐지나가는 선수가 아닌 오버워치 리그 역사에 남을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는데, 한국 국가대표로 경기해보고 싶어요. 메타가 바뀌면, 선발된 국가대표들이 힘을 못 쓰는 거 아니냐는 불안감이 많이 있더라고요. 브리기테도 연습 열심히 해서 이 정도까지 기량을 끌어올렸거든요. 그렇게 다른 딜러들도 다시 연습해서 잘할 수 있으니까 다시 정상급 딜러로 언급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앞으로도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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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영상 출처 : 샌프란시스코 쇼크 공식 유튜브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