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한때는 스스로 변태는 아닐까 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더랬다. 게임은 참 좋아하는데. 왜 그 많은 게임을 사서는 플레이는 하지 않고 모으는 데에서 더 즐거워하느냐는 게 그 이유였다. 지금에서야 스팀이 대중화되며 게임 모으는 게임이라는 게 딱히 이상할 거 없는 취미가 되며 변태 의혹은 떨쳐냈지만 말이다.

(사진 작가 Mike Mozart@JeepersMedia)

그런데 요즘엔 게임 모으는 게 참 쉽지 않다. 전에야 패키지만 사서 잘 모아두면 됐다. 기껏해야 의혹을 뿌리치고 밀봉된 비닐을 뜯어내냐마냐 하는 정도의 유혹. 그리고 그런걸 모으느냐며 등짝 스매싱을 가하는 어머니의 눈치만 잘 견디면 됐다.

이제는 대부분이 다운로드 콘텐츠다.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 그러니까 판매하는 마켓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게임 살 수 있는 게 어디 스팀뿐이랴. 블리자드와 EA는 각자의 게임을 독자 플랫폼인 배틀넷(블리자드 게임 앱)과 오리진으로 게임을 내고 에픽 게임즈는 독점 제공을 무기로 한 에픽 게임즈 스토어를 출범했다. PS4, Xbox, 닌텐도 스위치 등 콘솔까지 생각하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각자의 플랫폼마다 장점도 있고, 시장 경쟁이라는 의미에서도 서로 발전을 거듭한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게임 라이브러리가 파편화됐다. 게임 모은다는 느낌이 덜 하다는 거다. 이건 진짜 크다. 그래서 GOG Galaxy 2.0 (이하 GOG 2.0)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폴란드 유통사 CD 프로젝트의 게임 플랫폼 GOG의 새로운 버전은 지금까지 나온 게임 플랫폼의 게임들을 한곳에 모아서 보여준다. 단순히 나열만이 아니라 타 계정의 게임을 자동으로 불러오고 게임 실행과 업적까지 불러와 준다. 설명까지만 듣는다면 꿈의 게임 플랫폼이라 할 만하다. 정말 그럴까?

현재 클로즈 베타가 진행 중인 GOG 2.0 액세스를 CD 프로젝트를 통해 획득해 직접 확인해봤다.


그날 그날의 사건을 적는 일기. 하지만 일기는 기록물의 역할만을 지니진 않는다. (개학 전날 없던 일도 만들어내며 억지로 쓰는 게 아니라면) 일기를 다시 읽었을 때 우리는 그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게 된다. 뇌 속에 숨어있던 감정을 끄집어내는 기폭제 역할을 한달까? 그래서 라이브러리의 가치는 단순히 저장과 나열에 그치지 않는다.

수집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아챘던 해외에서는 오거나이저(organizer)라는 이름의 라이브러리 프로그램이 대중화되어 있다. 영화, 도서, 애플리케이션, 성인 영상물 등 영상 및 기록 매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물론 게임도 있다.

하지만 게임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게임 정보는 사용자가 일일이 입력해야 한다. 최소 100개 이상의 게임을 직접 입력하고 이미지를 불러오라니. 이만한 고역이 없다. 또 게임 계정을 불러와 게임 정보를 입력해도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각각의 런처로 따로 실행해야 했다.

GOG 2.0은 일단 게임 정보 입력에 대한 장벽을 없앴다. GOG 계정을 입력하면 GOG에서 산 게임 정보가 나열된다. 스팀, 오리진, 유플레이, 에픽 게임즈 스토어, 배틀넷 등 타사의 PC 플랫폼은 설정메뉴에 들어가 추가로 연동할 수 있다. 방법도 쉽다. 설정에서 통합 메뉴에 들어간 후 각 계정에 로그인, 연동 확인만 해주면 된다.

▲ 계정 정보를 입력, 연동하면 알아서 게임이 추가된다

가지고 있는 게임 수에 따라 불러오는 시간이 다른데 총 679개의 게임을 보유한 스팀 계정의 게임을 불러오는 데에 1분 11초 정도가 걸렸다. 에픽 게임즈 스토어나 오리진도 게임 보유 수에 따라 비슷한 비율의 속도로 불러옴을 확인했다. 타 플랫폼에서 게임을 구매하면 다시 통합 메뉴에 들어올 필요 없이 GOG 2.0이 알아서 게임 정보를 추가해준다.

게임 기자가 무슨 MAC이냐고 하겠느냐마는 잡스의 가호 아래 자란 탓에 업무용 PC는 무조건 OSX를 이용한다. 그 덕에 MAC에서 돌아가느냐, 안 돌아가느냐는 게임 구매와 플레이에 큰 선택 요인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GOG 2.0의 만족스러운 필터링 기능은 합격점을 주고 싶다.

기본적으로 게임을 불러오면 플랫폼별로 나뉘고 게임의 운영체제, 그리고 10여 개 이상의 장르가 기본적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외에 현재 PC에 게임이 설치되었는지도 필터링해 내용을 확인 가능하다. 이게 부족하면 게임마다 직접 태그를 입력할 수 있는데 태그별로 따로 볼 수 있는 기능 역시 제공하고 있다.

▲ 장르, 플랫폼, 태그 등 필터링 기능은 잘 갖춰져 있다

콘솔 주력 유저라고 GOG 2.0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Xbox Live, 플레이스테이션 계정을 연동하면 콘솔 게임의 게임까지 불러온다. 직접 계정에서 불러오면 본 계정에서 PSN을 이용해 다운로드 한 게임은 물론 북미 계정으로 구매한 게임, 심지어 물리 디스크로 플레이한 게임까지 모두 불러온다. 게임의 구매 여부가 아니라 플레이 여부를 통해 인식하기 때문이다.

단, 실제 보유한 게임과 비교해 많은 게임이 누락됐는데 이는 GOG 2.0과 연동하지 않은 다른 계정으로 플레이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디스크를 구매했다면 설치만 하지 말고 연동 계정으로 플레이까지 한 번은 꼭 해둬야 라이브러리 한 칸이라도 더 채울 수 있다.

불러온 게임은 장르, 게임, 이미지 정렬뿐만 아니라 업적, 플레이 시간까지 지원한다. 통합 후 정보는 물론 통합 이전의 정보까지 포함하니 업적 획득에 따른 부담은 따로 가지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일부 플랫폼은 플레이 타임이 제대로 기록되지 않는데 이는 베타 단계에서 수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 PS4로 플레이한 과거 업적까지 구현되어 있다

라이브러리 이미지는 서점 메인 가판대에 표지가 보이도록 세워진 그리드 형태가 기본이다. 도서 앱이나 애플 북스에서 볼 수 있는 형태다. 스팀 역시 디자인 개선 업데이트 이후 해당 형태의 외견을 지원할 예정이다. 예정이란 건 아직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리스트 형태로 볼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작은 원형 아이콘과 함께 게임명이 목록으로 나열된다. 원하는 게임을 드래그 드륵드륵 내려가며 찾을 수는 있다. 다만 그리드 형태처럼 시원시원한 맛은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도 아이콘 확대도 되고 별점에 태그도 지원돼 스팀식 리스트보다는 입맛에 맞춰 정렬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게임 정보 입력과 관리 부분에서는 별다른 손을 댈 필요가 없는 수준이다. 그저 필요한 건 누군가 내 라이브러리를 보기 전에 신사의 게임 'DOAX3'를 숨김 표시로 바꾸는 거다. 숨김 처리한 게임은 별도로 표시하지 않는 이상 뜨지 않으니 맘 놓고 '네코파라'를 하면 된다.

▲ 그리드형과 리스트형 나열. 여타 플랫폼보다 높은 가시성을 보여준다

라이브러리로서의 GOG 2.0은 더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이미 알려진 버그나 불편함은 베타 단계에서 개발진에서 수정할 예정이라 밝혔다. 지원되지 않는 닌텐도 스위치 타이틀은 추후 모든 대형 플랫폼 연동을 목표로 한 CD 프로젝트 측의 지원 덕에 추후 지원될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이게 스팀이나 오리진 등 다른 런처를 지워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라이브러리 연동 기능은 충실하지만, GOG 2.0에서 지원하는 상점은 GOG 게임뿐이다. 타 플랫폼 게임은 온라인 구매나 등록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실행에는 역시 기본 런처가 필요하다. 스팀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스팀이, 오리진 게임을 플레이할 때는 오리진이 깔렸어야 한다는 의미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콘솔 게임의 경우 정보 열람용 외에 실행은 불가능하다.

GOG 2.0의 가치는 결국 내가 가진 게임을 단 하나의 프로그램에서 관리하고 정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세일 정보에 무심코 구매했는데 이미 가지고 있는 게임이었다면? 구매 전 GOG 2.0을 통해 검색하면 여러 플랫폼 내에 내가 가진 게임 이력이 나오니 번거롭게 확인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스팀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게임을 구매했는지 되돌아보고 자부심을 느끼거나, 혹은 자괴감에 집 밖 사회 활동에 눈을 돌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 게임이 900개면 국밥이 몇 그릇인데...

서두에 언급했듯 게임 라이브러리 정리 프로그램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게임과 관련 없는 기업이 나서거나 유저 프로그램의 한계에 이용이 어려웠을 뿐이다. CD 프로젝트는 이미 GOG, 그리고 그 이전 유통 사업을 통해 게임 업계에 정통한 기업이다. 또한, GOG의 이런 선택은 스팀이나 오리진 등 다수 유저들이 사용하는 ESD와는 이용 행태가 전혀 다르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잠깐 GOG를 만든 CD 프로젝트(현재는 cdp.pl)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우리에게는 '위쳐' 시리즈의 개발사 CD 프로젝트 레드(CDPR)로 잘 알려졌지만, 사실 개발 스튜디오인 CDPR을 빼면 CD 프로젝트는 오히려 유통사로 먼저 시작한 회사다.

▲ '위쳐', '사이버펑크2077' CDPR의 뿌리는 게임 유통업이었다

1990년대 민주주의를 표방한 제3공화국 출범 당시 폴란드에는 기본적인 저작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외국 게임 데이터를 플로피 디스크에 복제해 시장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CD 프로젝트는 이런 폴란드 시장에 '발더스 게이트'를 유통했다. 해적판이 만연한 시장에 성공 가능성을 점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CD 프로젝트는 해결책으로 '사고 싶은 게임'을 기치로 내세웠다. 폴란드어 더빙까지 된 현지화, 보물 상자 모형에 지도에 '던전 앤 드래곤' 안내서, 그리고 사운드 트랙 CD까지 담아냈다. 정품 구매만이 가지는 장점을 어필한 셈이다. 물론 게임 자체가 고전에 가까운 명작이기에 가능했겠지만, 이런 전략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GOG는 오늘날까지 이런 시스템을 고수하며 게임에 DRM(Digital Rights Management: 디지털 권리 관리)을 넣지 않는다. 게임 자체의 퍼포먼스를 떨어트리는 복제 방지 프로그램보다 유저들이 구매할 가치가 있는 게임을 제공하는 게 먼저라는 기조가 깔렸다. 그렇기에 본인 소유의 PC라면 설치고 플레이고 몇 대든지 가능하다. 실물 대신 월페이퍼며 사운드 트랙이며 포함해 증정하는 예도 많다.

▲ DRM 없는 플랫폼을 가리켜 '선택의 자유'라고 표현했던 GOG

이렇듯 GOG는 게임을 판매하는 ESD 플랫폼임에도 복제 여부를 가리고 게임을 실행시켜주는 런처라는 개념보다는 일종의 전시장 개념이 더 도드라져왔다. GOG 2.0이 다른 게임 플랫폼의 이용을 돕는 수준에 그칠 거라는 전망도 있다. 하지만 GOG 2.0의 활성화는 CD 프로젝트 입장에서도 이득이다.

'스팀, 오리진, 유플레이, PS4 등 여타 플랫폼 게임을 한데 모으는 이용자 편의'라는 대의적 명분도 있지만, 유저가 GOG 2.0을 이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프로그램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브랜드에 대한 접근성은 높아진다. '스팀이면 되는데 왜 GOG를 쓰지'에서 'GOG도 써보니 괜찮네'라는 결론이 이어지는 셈이다. 또 DRM-Free 정책과 GOG에서만 구할 수 있는 고전 게임 등의 제공도 다른 플랫폼이 가지지 않는 장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배틀넷이 가능한 '디아블로1'과 '워크래프트 1&2'는 블리자드가 아닌 GOG를 통해 구하기 더 쉽다.

일부만 체험 가능한 GOG 2.0은 이미 많은 부분이 구현되어 있다. GOG 2.0 계정으로 PS4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타 플랫폼 유저를 초대하는 등 편의 기능의 개선도 정식 버전에 맞춰 제공할 예정이다. 이른바 게임 플랫폼 대통합이 코앞에 다가온 셈이다. 물론 기존 런처를 지워선 안 된다. 하지만 적어도 불편한 타 플랫폼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

게임 모으는 게임을 하는 게이머들이여. 이제 맘 놓고 모으고 편리하게 정리하고 더 뿌듯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