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6일, 스팀 플랫폼을 통해 공포 어드벤처 게임 '아라하: 이은도의 저주'가 출시됐습니다. 아라하: 이은도의 저주는 '한국식 공포 게임, 없으면 내가 만든다'라는 선구자 정신으로 직접 발 벗고 나선 이니게임즈의 조영인 대표가 약 4년이라는 개발 기간을 들여 제작한 신작입니다.

이니게임즈가 스팀 버전 출시 이전에 제작한 모바일 버전 '아라하'는 독특한 공포 경험을 맛볼 수 있는 수작이었으나, 아쉽게도 모바일 플랫폼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수익화에는 실패했습니다. 조영인 대표조차도 조작이 불편하다 보니 몰입감이 떨어졌고, 결국 공포 게임에 모바일 디바이스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교훈만 남았다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모바일로 아라하를 즐긴 유저들은 좀 더 조작이 간편한 PC나 콘솔 플랫폼으로 플레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개발자는 이에 PC 버전 '아라하: 이은도의 저주' 개발 소식으로 화답했습니다. 화면도 크고 조작도 자유로운 PC 플랫폼을 통해 완벽히 새로운 모습으로 아라하가 다시 돌아온다니, 국내 공포 게임 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낭보였죠.


정식 출시에 앞서 공개된 하이라이트 트레일러도 공포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영상에서 3종 이상의 크리쳐가 등장하고, 하나의 건물 내부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닌, '이은도'라는 섬을 무대로 다양한 공포를 맛볼 수 있을 것처럼 보였거든요. 영상 중반에 비치는 당산나무, 장승, 연등과 같은 오브젝트를 통해 한국적이고 토속적인 무속 신앙 요소도 곳곳에 반영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기대가 크면 클수록 동시에 우려하는 마음도 커지기 마련이죠. 개발 기간은 여느 AAA급 게임에 못지않게 길었지만, 단 두 명의 개발자가 만든 공포 게임이기에 자칫 스팀에 널려있는 인디 공포 게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여전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플레이해보기 전까지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사항이었죠.

좀더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아라하: 이은도의 저주'를 엔딩까지 플레이한 후,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과 아쉬웠던 부분을 나눠보았습니다. 게임을 직접 구매해서 플레이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직접적인 퍼즐 해설이나 스포일러는 줄였으니, 이 글을 통해 과연 '아라하: 이은도의 저주'가 본인의 취향에 맞는 공포 게임인지 직접 판단해보시길 바랍니다.


아라하, 압도적인 초반 공포 분위기가 돋보인다
꿈에 나올 것 같은 크리쳐 디자인과 으스스한 사운드까지, 헤드폰을 끼고 플레이하세요!


장르의 특성상, 공포게임은 다른 사람이 제아무리 장점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소위 '하는 사람만 하는 게임'이 되곤 합니다. 공포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호러 영화나 소설을 읽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거든요. 태생적으로,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 게임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게임이 무서운가, 안 무서운가'일 텐데요. 아라하: 이은도의 저주(이하 아라하)의 초반부 플레이는 오싹한 공포 경험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게임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한밤중, 사람의 발길이 끊긴 폐병원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이 놓이게 된 상황에 감정을 이입한 채 단서 수집에 집중하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너무 긴장해서 발걸음의 주인과 대면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숨어서 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리게 되더군요.

어느 정도 병원의 구조에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비로소 병원 곳곳에 배치된 오브젝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장례식장 앞에 나열된 국화꽃 근조 화환이나, 때 지난 가요가 흘러나오는 낡은 전축, 그리고 학창시절 학교 복도마다 꼭 있었던 칠판지우개 털이 등, 당시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한 친숙한 요소들이 게임에 몰입감을 더해줍니다.

게다가 스토리의 중요한 부분마다 등장하는 성우 더빙도 톡톡히 한몫하고 있죠. 공포 게임에서 마치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몰입감은 곧 공포로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인데요. 이건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 배경의 공포 게임이기에, 한국 유저들만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독특한 감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 도서실 책장 뒤에 숨어 귀신을 피하다가 디테일에 감동하던 순간

▲ 익숙한 정서를 담은 한국식 공포라는 점에서 또 가산점이 부여됩니다

또 하나, 아라하 게임 플레이의 핵심은 '건전지'를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건전지는 손전등과 캠코더를 사용할 때 소모하고, 게임오버를 당할 때마다 하나씩 차감되죠. 아무리 많이 모아두어도 게임을 다시 시작한 순간 0개가 되어버리므로 항상 어떤 타이밍에, 어떤 장비에 사용할 것인지 계속 고민해야만 합니다. 건전지의 잔량이 부족할 때는 손전등의 불빛이 깜박이거나 캠코더의 화면에 심한 노이즈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찾아오는 '결핍에서 오는' 공포가 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공포 게임을 할 때 번거로운 소모품 관리 없이 그냥 스토리만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보통' 모드로 게임을 플레이하시면 됩니다. 최근 업데이트를 통해 보통 난이도에서 건전지를 획득하기가 보다 쉬워졌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스트레스가 될 수 있는 결핍을 그나마 덜 느낄 수 있게 되었거든요. 반대로 극한의 공포를 추구한다면, '어려움'과 '매우 어려움' 난이도로 도전하는게 좋겠죠.

건전지의 압박을 넘어, 크리쳐에게 계속 쫓기며 어렵사리 도달하게 되는 병원의 2층에선 1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랄한 패턴을 자랑하는 새로운 크리쳐가 등장합니다. 이후에는 두 크리쳐의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하죠. 이니게임즈의 조영인 대표도 "2층 이후가 아라하의 진짜 공포"라고 표현할 정도로 공을 들인 부분이라고 하니, 공포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라면 꼭 2층 이후까지 놓치지 않고 플레이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분명 아무도 없던 회의실 칠판에 갑자기 그려진 그림의 정체는…


공포를 상쇄해버리는 최적화 이슈와 부족한 힌트는 아쉽다
BUT, 빠른 피드백과 핫픽스 적용, 개선의 여지는 충분하다

물론 아라하를 플레이하며 불편하다고 느껴지는 부분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이 최적화와 관련된 문제들이었는데, 그래픽 설정에서 모션블러와 리플랙션 등 부차적인 설정을 해제하고 플레이하면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게임을 즐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어느 정도 해결됩니다.

하지만 하얀색 오브젝트에 손전등 빛이 닿으면 쨍하고 빛이 번져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밝게 보인다거나, 오브젝트를 뚫고 벽 너머에서 공격해오는 크리쳐들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힌트와 단서가 너무 적어서 무작정 같은 장소를 배회해야만 하는 등, 게임 플레이에서도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명확한 단서 없이 마냥 돌아다니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단서를 찾아 헤매다 보면, 초반에 눈길을 사로잡았던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흥분은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그저 아무런 기약 없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괴로운 심정이 되어버립니다. 어찌어찌 단서를 전부 모아 엔딩을 향해가면서도 '한국식 공포 한번 제대로 즐겨보자!'라고 설렜던 마음은 '시작했으니 그래도 엔딩은 봐야지'라는 숙제 같은 마음으로 변해버린 뒤였죠.

▲ 단서를 찾지 못해서 무작정 5시간을 헤맸을 때 심정이 딱 이랬습니다

▲ "앗, 절 이곳에서 꺼내주실 천사인가요?"

다행인 것은 이렇게 '총제적 난국'으로 느껴졌던 여러가지 문제들이 출시 직후 이틀에 걸쳐 적용된 핫픽스를 통해 하나둘 해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니게임즈는 스팀 평가를 통해 유저들이 지적한 문제들을 빠르게 파악한 뒤, 1.3 업데이트와 2차 핫픽스를 통해 대부분의 문제점을 보완했습니다.

현재는 가끔 글씨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빛났던 빛 반사 문제, 장애물을 모두 통과해서 빠르게 다가오는 귀신 문제 해결은 물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유저들을 돕기 위한 추가적인 힌트까지 모두 적용된 상태입니다. 출시 직후 단서를 찾기 위해 4시간 이상 헤매는 것이 기본이었던 것과 달리, 이젠 가장 쉬운 난이도인 '보통'에서는 누구나 크게 헤매지 않고 초반에 느꼈던 공포감을 그대로 유지하며 엔딩까지 도전해볼 수 있게 되었죠.

이니게임즈는 이후에도 게임 진행에 도움이 되는 힌트와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많은 이들이 문제점으로 지적한 최적화 문제까지 잡아나갈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스팀 플랫폼의 토론하기 기능을 통해 유저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빠르게 피드백을 반영한다는 점 또한 국내 개발사의 작품이기에 더 기대해볼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죠. 개발자가 직접 밝힌 "개발진과 유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아라하가 되도록 하겠다"는 말처럼, 아직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이틀에 걸쳐 진행된 빠른 업데이트로 많이 언급된 문제점들은 대부분 해소됐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국산 공포 게임 '아라하: 이은도의 저주'
한국식 공포 게임의 물꼬를 트는 의미 있는 도전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현재 아라하는 스팀에서 '복합적' 평가를 기록 중입니다. 초기에 최적화 문제와 몇 가지 버그를 남겨둔 채 미완성인 상태로 출시됐으니, 오랫동안 기대를 품고 있던 국내 팬들조차 박한 평가를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죠. 개발사가 빠른 대응으로 주된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고 있지만, 초반의 부정적인 평가를 금방 역전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 또한 별다른 보조 장치가 없었던 출시 초반에 몇 시간 동안 똑같은 장소를 헤매며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이 게임이 지금보다 더 긍정적인 이미지로 유저들에게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앞으로도 한국식 공포의 매력을 알리는 더 다양한 작품들이 계속 시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말이죠. 물론, 게임 그 자체만 바라보더라도 초반부에 느꼈던 진한 공포의 여운은, 최근 접해본 그 어떤 대중매체에서도 겪지 못했던 진짜배기 경험이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라하에는 앞으로도 지도 기능, 신규 크리쳐 등 게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콘텐츠가 계속 추가될 예정입니다. 이제 막 여정을 시작한 '아라하: 이은도의 저주'가 수년에 걸쳐 많은 인디 개발자들에게 자극을 주고, '한국식 공포 게임의 물꼬를 튼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유저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